추모록(아버지)

제 2편 살아가며 사랑하며 (수필 모음집)

묵향의 이야기 2011. 3. 14. 17:01

제 2편 살아가며 사랑하며

 

제 1장 살아가며

 

나의 아이들에게 - 271

넓고 크고 깊은 마음 - 274

봉평 가는 길 - 280

만 원의 행복 - 282

가을의 기도 - 283

응급실에서 - 285

생의 길목에서 - 287

거인과 난쟁이 - 289

작지만 아름다운 것들 - 291

 

제 2장 사랑하며

 

어릴 적 추억 - 297

현수와 현지 - 299

아빠와의 캠프 - 301

아빠의 마음 - 303

사랑하는 현수에게 - 305

사랑하는 현지에게 - 309

못다 쓴 편지 - 313

뽕나무 아래 추도비문 - 315

49제 발원문 - 316

감사의 인사 - 318

 

 

제 3장 끝이 없는 이야기

 

출근길 - 323

현주가 집에 처음 오던 날 - 325

가을에는 - 328

나뭇잎 하나 - 329

비오는 날 아침 - 331

작지만 아름다운 것 - 332

무심한 아빠 - 334

사랑하는 현주에게 - 336

한 달간의 동행, 우리들의 이야기 - 340

 

 

 

연대기별 일대기 - 349

 

가승(家乘) - 352

 

추억의 사진첩 - 355

 

 

 

 

 

제 1장

 

살아가며 

 

 

 

 

 

나의 아이들에게

 

사랑하는 아이들아! 몇 번의 계절이 바뀌었어도 끝맺지 못하던 할아버지의 추모록이 이제야 마무리되어 가고 있구나. 세상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것 없는 이야기들이라 할지라도, 할아버지 생의 발자취는 살피고 또다시 살펴보아도 훗날 너희들이 성장하여 인생의 방향을 정하여야 할 때 환한 등불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단다.

할아버지는 높은 공직에 오르신 것도 아니고, 많은 부를 축적하지도 않으셨고, 사회를 위하여 괄목할 만한 큰 기여를 하신 것도 아니다. 단지 할아버지에게 주어졌던 단 한 번뿐인 일생을 열심히, 그리고 깨끗하게 살아오셨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아빠가 굳이 책으로 남기고자 했던 이유는 할아버지께서 살아오신 많은 이야기들이 너희들에게 큰 덕목이 되어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물론 어른이 되어서 이 책을 읽게 될 때 어떤 것들을 얼마만큼 인생의 좌표로 삼을 것인가는 너희 몫이겠지. 단지 아빠는 할아버지에게서 생명을 받아 너희에게 전했듯이, 너희들이 지켜보는 아빠의 삶과 너희에게 글로 건네준 할아버지의 삶이 너희가 내딛는 발걸음의 길잡이가 되길 바라고 인생의 갈림길에서 중요한 선택이 필요할 때 이정표가 되길 바랄 뿐이란다.

사랑하는 너희들에게 덧붙여 전해주고 싶은 말들이 있다. 책으로써의 속삭임은 이 글이 아빠가 남기게 될 첫 번째이자 마지막이 될 것이기에, 채 정리되지 못한 글들이지만 몇 자 적어 보련다.

 

첫 번째로 맑은 마음을 갖기 바란다. 세상을 사랑의 눈빛으로 아름답게 바라보는 것뿐만 아니라 너희 영혼에 밝은 빛이 언제나 비추도록 스스로 노력할 때 자신에게서 맑은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일들에 고마워할 줄 아는 마음과 함께, 늘 미소를 잃지 않도록 하고, 쓰디쓴 인내 뒤에는 풍요로운 결실이 따른다는 것과 인생의 행복은 맑은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깊이 세기길 바란단다. 엄마 아빠의 가장 큰 소망은 너희들이 공부 잘하고 이름을 떨치고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너의 가슴 속에 늘 행복이 가득하길 바라는 것이란다.

 

두 번째로 바르게살길 바란다. 삶이라는 것은 너희의 바람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환경과 틀 속에서 너희의 자리를 넓혀가야 하는 것이기에, 감정과 이성 그리고 자신의 능력과 노력을 조화롭게 이끌어갈 때 비로소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얻게 되는 것이란다. 또한 자신만의 이기적인 욕심을 버리고 이웃과 어우러져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한단다. 거기에서 기쁨과 만족을 느낄 수 있다면 너희들은 참 행복을 얻게 될 것이다.

 

세 번째로 슬기로운 자가 되길 바란다. 밤과 낮이 있고 높고 낮음이 있듯이 너희 인생에서도 성공과 실패, 순탄함과 역경이 교차할 것이고 올바른 것과 잘못된 것을 두고 선택의 기로에 놓여 심각하게 고민도 하게 될 것이다. 힘들고 어려울 때 용기를 갖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은 지혜로운 자의 선택이고, 끊임없이 바른 길로 나아가는 것은 슬기로운 자의 모습이다. 지식이 부족하다면 지혜로서 헤쳐 나갈 수 있지만, 슬기롭지 못하면 어떤 부귀와 지식이 있다 할지라도 맑고 바른 삶의 길로 나갈 수 없게 될 것이다. 지혜로운 자, 슬기로운 자가 되길 바란다.

 

너희들에게 더 많은 이야기들을 하고 싶지만, 아빠도 그리 오래 살지 않았고 사고의 깊이도 얕기에 이 글은 미완성으로 남겨두련다. 너희 인생의 좌표가 되어줄 좋은 말들이 많지만, 몇 줄의 글로 너희에게 전하기에는 나의 부족함이 너무 크기만 하구나. 다만 위에서 말한 세 가지, ‘맑게 바르게 슬기롭게’ 살아주었으면 하는 아빠의 말을 언제나 되새긴다면, 행복이 너희 인생에 가까이 다가서게 된다는 것을 너희들 가슴에 새겨주고 싶구나.

엄마 아빠는 우뚝 솟은 바위처럼 영원토록 너희를 사랑한단다. 그리고 늘 너희의 행복을 빌고 있단다.

 

2001년 5월 8일

할아버지 추모록을 마무리하면서······.

 

 

 

 

 

 

 

 

 

넓고 크고 깊은 마음

 

상하이의 밤은 옅어져 갔다. 이제 서쪽 땅덩이 큰 나라를 떠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번쯤 다가서고 싶었던 백두산, 그 품속에 안겨보았다. 나는 아들이 넓은 마음, 큰마음 그리고 깊은 마음을 가슴에 담길 바라며 백두산 정상아래 내리 펼쳐진 광야를 가리켰다.

상해를 거쳐 연길에 머물게 되었다. 북한 사람들 때문에 위험하니 호텔 밖을 나서면 안 된다는 안내원의 엄포 때문에 모두들 방으로 들어가, 홀로 깜깜한 그 거리에 발걸음을 내딛기로 했다. 하지만 나 또한 불안감을 떨구지 못해 호텔 로비에서 근무하던 조선족 공안원을 꼬드겨서 함께 야시장으로 향했다. 그를 기다리며 길가 삼층집 창가에 걸려 있는 하얀 기저귀 세 개를 바라보게 되었다. 아마도 새근새근 아기가 잠들고 있는 모양이다.

길거리에 펼쳐진 술자리, 물건 파는 사람 등은 우리네 야시장과 다를 바 없어 그대로였다. 길가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자전거 충돌로 억세게 말다툼하게 된 여인네들의 옥신각신하는 소리를 뒷전으로 하고, 조선족 할머니의 내뱉은 말 한마디에 발걸음 멈추었다.

“감자떡 하나 사소”

200원을 주고 감자떡하고 고추떡을 한아름 사 안았다. 먹지 못하면 고수레라도 지내면 되지 않을까. 조선족 아주머니가 파는 양고기 꼬치구이 맛있었다. 아니 멋있었다. 좋았어요. 그 야시장을 가는 길에 자전거 안장에 사랑스런 여인을 태우고 가벼이 페달을 밟는 청년의 모습도 보았다. 그 어떤 차가 부러울까. 돌아오는 길에도 또 다른 자전거 행렬이 있었다. 여인이 몰아가는 자전거 뒷자리에 앉아 그녀 허리에 두 손을 얹고 있는 총각의 모습,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름다웠다.

 

백두산 가는 6시간의 비포장도로는 긴 여정이었다. 도회지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그 산하는 그리운 고향의 산천 같았다. 연길에서 천지 아래까지 가는 그 도로변에는 휴게소가 두세 군데 있었다. 몇 시간을 달리다 멈춰선 휴게소. 도로변에 나무로 좌판 만들어 놓은 가게 몇 평 남짓 있고, 바로 옆 개울로 흘러드는 물길 위에 나무로 남녀만 구분해 놓은 화장실이 있었다. 몇 사람 간신히 들어가는 그곳은 칸막이도 문짝도 없는 완전히 개방형 화장실이었다.

천지 아래 버스 종점에 다다르면 등산로 겸 장백폭포 가는 길과 천지까지 지프로 올라가는 길로 나뉘어진다. 굽이굽이 가파른 시멘트 길을 이리저리 휩쓸리며 지프에 실린 채 광활한 만주 벌판을 바라 볼 수 있습니다. 백두산 정상 부근은 이끼같이 땅바닥에 엎드린 들풀만이 있었고 그나마 정상 가까이는 그것조차 볼 수 없는 나신(裸身)의 땅덩이였다.

“아들아! 저 넓고 큰 대지를 보아라. 아들아! 깊은 천지를 바라보아라. 넓은 마음, 큰마음 그리고 깊은 마음, 너의 손을 잡고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란다!”

내가 재수의 고통을 인내하기 위해 홀로 여행했을 때, 백마강 낙화암에 올라 저 멀리 백사장을 바라보며 태고의 숨결과 숱한 병사들의 함성을 느꼈던 옛날 그 마음이 되고 싶었다. 굳이 무거운 노트북과 소주를 배낭 속에 담고 올랐던 건 깊은 사색의 마음을 담아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맑은 하늘과 천지의 모습을 바라 볼 수 없을지라도, 나의 가슴과 영혼에 백두산의 숨결을 감고 싶었다. 하지만 정상에 버려진 쓰레기마냥 이미 세상사에 깊이 때 묻어버린 내게는 지프에서 내려 불과 5분 걸음과 30분가량의 사진촬영을 위한 짧은 행락으로 끝나고 말았다.

다시 갈림길로 돌아와 장백폭포로 향하길 20여 분, 가벼운 산보 끝에 다다랐다. 떨어지는 폭포수는 잠시도 발을 담을 수 없을 만큼 차가웠다. 손이 뻗뻗해져 올 만큼 마시기 힘든 물이었지만, 두 손에 모아 담아 한 마음 빌며 한 모금, 또 한 마음 빌며 한 모금을 마셨다. 주위에 있는 모든 이들의 삶의 행복도 빌었다. 그리고 때때로 솟구치는 나의 욕망을 누르고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되길 빌었다. 길가에 수증기 피워 올리며 달걀을 삶는 노상 온천도 있다. 바로 옆에 온천탕을 지어놓고 조선족 종업원을 부리며 동방에서 온 우리네 주머니를 터는 중국인들이 얄미웠다. 우리 땅 백두산에서······.

백두산에서 용정으로 가는 길에 해란강을 바라볼 수 있었다. 이제는 자그마한 실개천이 되어서인지, 깊은 눈길을 드리우고 싶었던 그 강물은 차장 밖으로 흘러 갈 뿐이었다. 멀리 나지막한 산봉우리 위의 일송정도 그냥 스쳐가 버렸다. ‘일송정 푸른 솔’은 이제 사라져 버렸고, 노랫가락 속에 아쉬움을 느끼는 한국인을 위해 꾸며놓은 아기 소나무와 정자(亭子)만이 침묵한 채 옛 주인의 심정을 헤아리게 했다. 그리고 용정에 있는 대성중학교에서 윤동주 시인의 흔적을 볼 수 있었고, 국경도시 도문에서는 북한 땅을 바라볼 수 있었다.

연길의 자그마한 공항에 서 있던 비행기는 승객들이 다 탑승하자 출발시각보다 30분 전에 하늘로 향해버렸다. 언젠가 좀 더 여유 있는 일정으로 만주 땅과 백두산의 숲속에 묻히어 그 옛날 조상님들의 숨결을 느끼리라 다짐하며 또다시 도회지로 돌아왔다.

듣고 보던 대로 자전거 행렬이 웅장했고, 북경 근처의 만리장성과 용경협도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아쉬운 것은 39도까지 열이 올라가는 아들의 몸살 때문에 놓쳐버린 북경의 밤거리였다. 중국 고전건물의 특징을 담아 새롭게 하늘로 뻗은 건물들이 부러웠다. 진 건물들로만 덮여진 육백 년 한양의 우리네 서울 모습과 대조적이었다. 그리고 천안문 광장, 자금성, 슬럼화되어 버린 도심의 옛 건물들 ······.

 

다시 찾은 상해 공항, 1920년과 2000년의 도시가 함께 있는 상해! 고가도로에 이어지는 자동차 행렬, 빈민촌에 자리하고 있는 임시정부 건물, 도심 속에 자리하고 있는 홍구공원은 대충 보고, 몸살로 몹시 힘들어 하는 아들 때문에 빨리 저녁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마지막으로 들렀던 어느 극장 안에서 펼쳐진 10살 남짓 소녀들의 서커스는 감탄보다는 깊은 슬픔을 자아내게 했다. 어둠이 깔리자 피로가 몰려왔고 이국에서의 밤은 깊어만 갔다.

상해에서 1시간 반 남짓 달려간 ‘소주’란 도시는 아름답게 가꿔진 정원과 실크로드의 출발점으로 알려진 곳이다. 북경까지 물길로 이어진 운하의 도시, 그리고 오나라 첫째 왕의 능이 있는 호구산 그 산의 마부로 잡혀 있던 월나라 왕이 귀국 후 와신상담하게 되었다는 곳이었다. 손에 들었던 만화책에 열중해 엉뚱한 행렬을 쫓아갔다가 잠시 미아가 되어버렸던 아들이 강한 해열제 힘을 빌어 조금이라도 기운을 차리는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한산사의 종소리!' 교과서에서 보았던 기억이 어렴풋이 살아났다. 한산사입구 촛불과 향으로 기원하는 곳에서 초 하나를 아들에게 건네주며 너의 소원을 빌라 했더니 “받아쓰기 백점 맞게 해 주세요!”라며 초에 불을 붙이던 현수······. “아빠는 백점 맞지 못한 받아쓰기가 걱정스러운 것이 아니라, 너의 마음 속 먹구름이 걱정이란다. 서둘지 말고 천천히 가자꾸나. 언제나 기쁜 마음, 밝은 마음을 안고 그리고 꾸준히 걸어 갈 수 있다면, 어느 길을 걷든 행복을 만들어갈 수 있는 거란다. 아빠가 너에게 바라는 것이야!”

 

마지막 날 저녁에 들린 상해 ‘외탄’이란 항구는 중국의 힘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아기를 안고 끈질기게 구걸하는 아줌마들도 있었지만, 발전된 문물을 받아들이고 멀지 않은 날에 중국의 힘을 실어 보낼 곳이었다.

친구와 아이들 우리 넷은 일행에서 떨어져 나왔다. 연길 밤거리에서는 만나는 이들이 조선족이었기에 언어소통에 문제가 없었지만, 같은 한자권이라도 의사소통이 정말 힘들었다. 그러나 우연히 마주친 열여덟 여고생의 유창한 영어회화 실력과 부모에 대한 딸로서의 예의바름, 그리고 친절하고 깨끗했던 그녀의 모습이 그간의 거칠고 지저분하게만 보여졌던 중국 인민들의 모습을 씻어 주었다.

상해의 마지막 밤은 아들에게도 찾아왔다.

 

“천지에서 들려주었던 이야기가 무엇이었지?”

“음······ 넓은 마음, 큰마음 그리고 ······ 뭐더라?”

 

“깊은 마음! 현수야! 내일 집에 가는 날이야. 잘자! 예쁜 꿈꾸고······.”

“아빠도 잘 자!”

1997년 8월 16일

아들과 둘만의 첫 여행 다녀와서

 

 

 

 

 

봉평 가는 길

 

 

봉평 가는 길은 소달구지 넘었음직한 야트막한 산등성이 넘어, 채 파헤쳐지지 않은 산과 산 사이의 자그마한 평야를 가로지른다.

굽이굽이 숨 가쁘게 오르막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보면 청계산 휴양림이 나온다. 또다시 겨울의 끝자락이 남아 있는 산을 몇 개 넘고 나면 길음이란 자그마한 샛길이 나오고 곧이어 둔내와 평창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타난다. 이곳에서 길손의 마음은 그저 달구지 자국 남아 있음직한 길로 향한다.

아이들 굴렁쇠 굴리는 소리에 힐끗 돌아보니, 여인네 저고리 선 마냥 한 점 산 끝에서 흘러내리는 농부님네 밭뙈기는 작은 들녘을 이루고 있다. 길가 한 뼘 땅붙이 굽이진 계곡에 안긴 어느 촌부의 오두막과 몇 개의 이랑들은 봄 향기 담겨있는 찻집과 정원으로 바뀌어 나의 눈에 맺혀온다.

길가에 흙을 발라 바람 막은 철물점과 건너편 시멘트 이층집에 새로 들어선 편의점은 차라리 봉평 마을님네들의 순박한 마음 그 자체이다. 산 넘고 고개 넘어 찾아 온 도회지 사람에게 제 모습 보여주기 부끄러운 듯 골목길에 숨어 버린 진미식당은 시골 아낙처럼 정겹고, 몇 개의 탁자와 군불 지펴 길손의 몸을 녹여주는 온돌방은 무뚝뚝하게 반기는 주인의 모습 같다. 숭늉인지 육수인지 알 수 없는 툭툭한 물 한 그릇에 허기진 배를 채우고, 돼지고기와 소주 한잔으로 하늘 아래 자그마한 마을을 가득 채울 메밀꽃 필 무렵을 그리고 있자니 그제야 메밀국수 한 사발이 나온다.

작은 시골마을 봉평에서의 짧은 여정. 되돌아서는 아쉬움 뒤에는 그리움이 고이고, 돌아오는 길 곳곳에서 메밀꽃 향기가 짙게 느껴진다.

 

 

1996년 3월 17일

아버지와 봉평을 들렀던 날

 

 

 

 

 

 

 

만 원의 행복

 

 

무더위에 지쳐 버렸기 때문인가? 꼬이기만 하는 일 때문인가?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저 메말라버린 가슴으로 하루를 산다. 하얀 거품을 머금은 파도처럼 금세 밀려왔다 밀려가는 일상들. 그 분주한 나날 속에 지난 밤 만 원짜리 한 장이 행복을 안겨 주었다.

선풍기 바람과 주름진 주인집 아줌마 부채질로 땀 바람 식히니 화사한 룸살롱의 에어컨 바람 보다 상쾌하고, 오천 원짜리 쥐포 몇 마리와 이천오백 원짜리 소주 한 병이면 하루의 피로가 가시고, 일 년 전에 한 단계 올려 피운 디스 한 갑 천원이면 몇 시간 빈 가슴을 뿌연 연기로라도 채울 수 있고, 지하철 사백 원짜리 차표 한 장 끊으면 몇 천원 택시비 안낼 수 있고, 걸어서 30분 거리 단돈 천 원짜리 한 장이면 집 앞까지 모시는 택시가 있고, 그러고도 남으니 모자란 것 보다 낫고, 얼큰한 취기에 달님 별님 내 입가에 미소짓게 하니 세상에 부러울 게 없소이다.

근데 얼마 남아 있지?

 

1996. 8. 6

만원의 행복에 흠뻑 젖은 날

 

 

 

 

 

 

가을의 기도

 

투명한 가을 하늘마냥 청명한 마음이 되게 하소서!

여유로운 가을 들녘처럼 풍요로운 삶이 되게 하소서!

바람결에 실려온 가을 햇살 같은 맑은 숨결이 되게 하소서!

계월은 깊어만 갑니다.

고개 숙인 저 이삭들을 따라 이 생의 주름도 깊어갑니다.

곧 겨울이 오겠지요.

황량해진 대지 속에 숨은 씨앗을 생각하렵니다.

봄의 화사한 축제도

강렬했던 지난여름의 햇살도

이 한 점 가을 이야기 속에 깊이 묻어두렵니다.

 

까르르 웃어대는 어린아이의 티 없는 눈동자

포로롱 날갯짓하는 황금들녘의 참새들

이 가을 창공 속에 깃들어갑니다.

터질 듯 벌어져 있는 밤나무 아람

뜨겁던 태양과 매섭던 바람의 기억 속으로

가을의 시간은 멈춰버렸습니다.

 

푸르른 가을 날

해맑은 아이의 미소가 언제까지나

내 곁에 머물게 하소서!

 

 

1997. 9. 20

농장을 향해 달리다가

 

 

 

 

 

 

응급실에서

 

 

응급실 한쪽 구석 의자에 망연히 앉아 있으려니 ‘제한구역’이란 표지가 달린 문이 열리고 마스크를 낀 젊은 남자가 기다란 나무상자가 얹혀진 이동 침대를 끌고 온다. 영원히 육신을 가두어버리는 관은 아닐지언정 중환자실로 가는 것을 보니 아마도······. 하지만 통곡소리가 나질 않는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숨가쁜 소리와 함께 또다시 마스크 낀 남자가 무심히 이동 침대를 끌고 온다. 눈앞을 지나치는 침대 뒤로 깔끔하고 중후한 편한 양복 차림의 노년 신사가 홀로 쫓아온다. 그리고 나를 지나쳐서는 ‘제한구역’ 안으로 사라져 버린다. 그렇게 어느 주검이 내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통곡 소리도 들을 수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이 보이지 않은 채, 영혼이 사라진 주검과 그 뒤를 쫓아오는 오직 한 사람의 모습이 나를 숙연하게 했다. 너무도 편하게 이별을 맞고 있는 죽은 자와 산 자의 말없는 대화······.

 

남자 등에 업혀 온 6세쯤 되어 뵈는 소녀의 가쁜 숨소리에 의사들이 응급실로 급히 온다. 불과 며칠 전 힘없이 쓰러진 그 소녀는 병명을 알 수 없어 다시 이 병원으로 옮겨진 것이다. 아이의 아빠는 모습이 보이질 않고 직장 동료인가 아이의 엄마의 친구인 듯한 여인들의 모습만 보인다. 20만원씩 추렴하자고 한다. 늦은 시간에 달려온 우정도 고마운데 넉넉하지 못한 주머니에서 동료의 딸 병원비를 보태자 한다.

재작년 머리가 아프다고 한 지 열흘 만에 재가 되어 뿌려진 친구의 아들이 생각난다. 사고로 다친 것도 아닌데, 어찌된 운명인가? 화장터에서 하얀 가루가 되어가던 안타까운 모습. 그리고 외진 강가에서 할아버지 손에 뿌려지는 그 어린 영혼! 훗날 그곳을 찾고 싶어 할 친구 녀석을 위해 애써 기억해 두었건만 친구는 끝내 함께 그곳을 가보자는 말을 하지 않는다. 눈물이 메말랐기 때문은 아닐 것인데······. 차라리 그렇게라도 잊어야 하는 것인가 보다.

 

“아빠 앞으로는 말 잘 들을게요!”

“여보 죽어서는 안 돼!”

술 취해 비틀거리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젊은 남자 등에 업혀 응급실에 들어온 젊은 여자의 얼굴은 엉망이 되어버렸다. 뒤이어 업혀온 작은 소녀의 얼굴도 엉망이건만, 다시는 말썽 피우지 않겠다며 아빠한테 애걸한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병원의 응급실에 앉아 있으면 실타래처럼 얽혀진 인생사 그저 무상하게 보일 뿐이다. 안타깝지만 어찌할 수 없는 무수한 사연들, 나는 그저 멍하니 앉아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볼 뿐이다. 불확실한 삶에서 단지 분명한 것은 이 어둠이 걷히면 또 새 날이 밝아온다는 것이다.

1996년 3월 28일

현지를 업고 갔던 밤 응급실에서

 

 

 

 

 

 

생의 길목에서

 

 

추석을 앞둔 가락시장 큰 길 가에 즐비하게 늘어선 트럭 위의 돼지들······. 죽어서라도 고기 한 점 되어 세상을 향해 무언가 남기련만······. 나 주검이 된다 할지라도 풀 한 포기 거름조차 되지 못할 삶. 세상을 향해 무엇을 남길 것인가?

한가위 보름달은 구름에 가려 희미하고, 폭죽소리 요란했던 구석진 시골 동네는 조용하기만 하다. 어느덧 아이들 마음에도 어둠이 깔린 모양이다.

기어가는 승용차 앞서 가라고 서 있는 것처럼 지친 몸 끌고 가는 백발의 노파. 지나온 인생의 무게를 실은 듯 큰 보따리 짊어지고 허리 꺾인 채 지팡이에 의지하며 느리게 걸어가신다. 기어가던 숱한 차들 그저 지나치니, 나 또한 무심히 할머니를 지나치고 말았다.

홀로 양수리 강변을 타고 잡념을 떨치려 나왔건만 초가을 문턱의 이 좋은 날도 낙엽처럼 허망하게 내 가슴에 맺혀질 뿐이다. 이 가을의 풍요로부터 처절하게 외면 당해버린 내 존재, 저 묻혀버린 낙엽 한 장 신세는 아닌가?

청계천에 다다르니 버스 사이에 끼어버린 할아버지 모습이 보인다. 버스 높이만큼 짐 쌓아 올려 진 손수레를 허덕이며 밀고 당겨보지만, 자동차 경적 소리에 그 모습조차 묻혀 버리고 만다. 산다는 것은 걷는 게 아니라 저렇게 허둥대며 뛰는 것이리라.

 

 

1997. 9. 19

그 할머니, 할아버지 모습 속에서...

 

 

 

 

 

 

거인과 난쟁이

 

 

거인 나라에 난쟁이가 있었는지 난쟁이 나라에 거인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대요. 하지만 어느 날 거인과 난쟁이가 만나게 되었어요.

땅을 바라보던 거인과 하늘을 바라보던 난쟁이의 눈이 마주쳤지요. 새롭게 눈망울에 비춰진 서로의 모습은 신기하고 설레고 새로운 만남에 대한 기쁨을 주었어요.

어느덧 둘은 고개를 숙이며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들어 올리며 발꿈치를 올리고 이야기를 나누었답니다. 소곤소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거인과 난쟁이는 자신의 앞만 보게 되었어요. 더 이상 난쟁이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된 거인은 그의 얼굴조차 잊어버리게 되었고, 거인의 다리만을 바라보게 된 난쟁이는 그의 눈망울을 잊어버리게 되었대요.

그러나 난쟁이의 눈에는 거인이 발걸음을 내딛기 전까지 거인의 모습이 비추어지게 되었고, 또다시 생각난 거인의 눈망울이 보고파서 난쟁이는 거인의 눈을 향해 깡총깡총 뛰었어요.

그렇지만 앞만 바라보던 거인은 더 이상 눈에 비추지 않는 난쟁이를 원망하면서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지요.

난쟁이와 거인은 그래서 헤어지게 되었대요.

 

 

2000. 7. 6

불현듯 이별이란 단어가 떠오르던 날

 

 

 

 

 

작지만 아름다운 것들

 

명동 코스모스 빌딩 앞, 행상을 하고 있는 뇌성마비 앉은뱅이 총각의 손을 잡고서, 허리 굽혀 목장갑 끼워 주는 청원 경찰 아저씨.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 주는 모습이다.

 

1997년 12월 18일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정장한 남자가 벽을 향해 서서 볼일을 본다. 나 또한 그 옆 자리에서 벽을 향해 서 있자니 그 남자가 일을 마치고 손을 씻는다. 나는 지퍼를 올리고 바쁜 마음에 문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그 때, 손 씻던 남자가 먼저 문을 열려다 비켜선다. 문손잡이에 나의 손이 먼저 가고 뒤따라 그 남자가 나온다.

물에 젖은 손잡이를 잡는 불쾌함을 주지 않으려 잠시 비켜서는 작은 배려가 아름답다.

 

1998년 3월 23일

 

조금은 비집고 들어 올 수 있는 공간이 있었지만 한쪽 손을 쑥 내밀고 양보해 달라는 어느 운전사. 밟고 있던 페달에서 잠시 발을 떼고 있으니 또 다시 손을 내밀며 고마움을 표시한다. 작은 배려에 고마움을 표시하는 마음이 아름답다.

 

1998년 5월 7일

 

올림픽 공원 큰 사거리 건널목. 신호등에 걸려 서 있는데, 곱게 차린 백발의 할머니 세 분이 가벼운 손짐을 들고 파란 불을 기다리고 있고, 반대편에 선머슴 같은 고등학생 몇이 어울려 있다. 건널목 한 가운데에서 한 학생이 반가이 할머니들에게 인사를 건네더니, 한 할머니의 가벼워 보이는 짐을 들어 드리겠단다. 활짝 웃으시며 사양하시는 할머니. 하는 수없이 꾸벅 인사드리고, 이미 빨간 불이 켜진 횡단보도를 달려 멀리 가고 있는 친구들을 쫓아간다. 달려가는 그 학생을 바라보며 나는 입가에 번지를 미소를 매만진다.

 

1998년 9월 18일

 

버스에 몸을 실었다. 사람들이 내리고 또 다른 사람들은 올라타고······. 칠십 가까이 되어 보이는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며 버스 문을 향해 뛰어오고 있다.

버스 기사는 급히 문을 닫고 출발하려 한다. 앞쪽에 앉아 계시던 나이든 아줌마의 “태워주시죠!”라는 말에 기사 아저씨는 마지못해 문을 열어 준다. 힘겹게 차에 오른 노인이 자리에 앉을 동안 버스는 잠시 멈춰 서 있다.

몇 정거장을 지나서 앞쪽에 앉아 있던 그 노인이 몸을 움찔거린다. 몇 자리 뒤에 앉아 있던 젊은 부인이 일어선다. 그 노인에게 다가서서 팔을 부축하고는 하차하는 문으로 다가간다. 버스는 덜컹거리고······.

함께 내려 주지 못함을 미안하게 생각하는 듯 그 젊은 부인은 노인이 땅에 발을 내딛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다. 그리고는 제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흔들거리는 버스 손잡이를 잡고 발길을 옮긴다.

버스 기사 아저씨가 그 젊은 부인에게 말을 건넨다,

“고맙습니다."

부인은 그저 가볍게 미소만 지을 뿐이다. 함께 어우러져 사는 모습, 작은 일이지만 아름답다.

 

1998년 11월 9일

아름다운 눈빛으로 세상을 보았을 때.

 

 

 

 

 

제 2장

 

사랑하며

 

 

 

 

어릴 적 추억

 

나무 그늘 아래에서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를 벗 삼아, 일상의 상념을 그적거려 본다. 한적한 시골 마을 변두리 야산에 불과했던, 아버지의 땀방울이 맺힌 이 보금자리는 어느새 세월의 흐름 속에서 동네 아이들의 천진한 목소리가 바로 곁에서 들릴 정도로 주택가 옆에 자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이곳만은 도심의 쉼터마냥 영혼의 안식을 찾을 수 있고 자연의 향내를 가슴에 담을 수 있는 옛적 그대로의 고향 땅과 같다.

모퉁이 길로 돌아 오르면 금잔화와 코스모스가 한껏 길을 덮은 채 흔들리고 있다. 아파트 보도블록에 익숙해져 있는 나는 할아버지 농장에서 칼을 허리에 찬 채 뛰어노는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어릴 적 나의 정원으로 추억의 발걸음을 옮긴다.

꼬마에게 미아리 집 그 정원은 넓고 넓은 숲속이었다. 향나무와 이름 모를 꽃나무들로 덮어져 있던 거대한 숲 속에서 동네 꼬마들과 총싸움, 숨바꼭질 그리고 다방구 놀이를 하며 놀던 그곳은 나의 고향이었다. 열한 살이던 어느 여름날 밤 나뭇가지에 걸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달님의 숨결을 느낀 적이 있다. 달님은 살며시 나의 얼굴로 다가와 얽힌 나뭇가지를 풀어달라며 속삭이는 듯했고, 그 달님의 슬픈 눈물은 결국 나의 눈물이 되어 볼 위로 흘러내렸다. 한 손에는 로봇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총을 들고 뛰어놀던 아들이 달려와 묻는다.

“아빠, 이건 왜 그래? 가르쳐 줘! 그건 왜 그래?”

한없이 이어져 “제발 가르쳐 줘”라며 졸라대는 아들의 얼굴 속 호기심과 그늘은 나의 어린 시절의 그대로이다. 작지만 너무도 넓은 미아리 집의 구석구석은 온통 신비의 세계였다. 싹이 움터 나는 것도, 끝내 낙엽 되어 떨어져 나가는 것도, 그리고 엄마 아빠가 살아가는 어른의 세계도 알 수 없는 곳이었다. 어느 날인가부터 아버지는 엄하고 두려운 존재가 되어버렸고, 영문도 모르던 내게 호되게 꾸짖는 아버지의 질책은 오래도록 가슴 속 상처로 남게 되었다. 감추어졌던 그 상처는 성년이 되면서 아들의 두 종아리에 휘둘렀던 회초리질과 툭하면 고함을 내지르는 나의 언성으로 나타났다. 현수에게는 그것이 커다란 그늘로 이어졌으리라.

조금도 틈새를 주지 않고 물어대는 아들의 호기심 가득 찬 얼굴은 나의 가슴에 스스로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진다. 안락한 삶 속에서도 부족함을 느껴야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여기 넓은 땅 위에 있으면서도 왜 가난을 느끼게 되는가? 나의 마음속, 그리고 아들의 가슴속의 그늘은 어찌 털어낼 수 있을 것인가? 어린 시절 나뭇가지에서 풀어 주지 못했던 달님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나는 그 굴레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을까?

아들의 끊임없는 질문은 시나브로 나를 삶의 고민 속으로 몰아넣는다.

 

1995년 10월 1일

농장에서

 

 

 

 

 

현수와 현지

 

 

지난해 여름의 일이었다. 늘 휴일이면 찾아뵙는 부모님을 모시고 현수와 현지와 함께 농장 가까운 곳에서 외식을 하게 되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나, 요술 부릴 줄 알아요.”

“응? 어떤 요술인데?”

“나, 고추 세울 줄 알아요!”

“하하하!”

“음 어떻게 세우니?”

“간단해요. 만지작거리면 되거든요.”

아홉 살 난 아들 녀석 자랑스럽게 할아버지에게 얘기를 늘어놓는다.

 

할아버지와 오빠의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현지가 말한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나 병관이랑 결혼할거예요.”

“응?”

“나, 저번에 병관이 한테 뽀뽀 했어요”

병관이가 뽀뽀 당했던 날 현지는 선생님에게 꾸중을 들었단다. 울상이 되어버린 병관이가 선생님께 고자질을 한 것이다.

 

 

1998년 7월 28일

즐거웠던 가족과의 한 때..

 

 

 

 

 

아빠와의 캠프

 

 

온 세상이 푸른빛으로 흠뻑 젖어버릴 듯한 날이다. 지난밤 뜨거운 물에 몇 시간 몸을 담고 있었지만, 주말 1박2일의 '아빠와의 캠프'에서 꼬마들과 함께 흔들어대던 '뽀뽀뽀' 시간의 그 율동 때문에 지금 나의 온몸이 결린다.

지난 주 쉴 틈 없이 보내다가 주말에 아들 학교에서 주관한 아빠와의 캠프를 다녀왔다. 40명쯤의 젊은 아빠 늙은 아빠들이 참석해서 엉덩이를 흔들고 깡총깡총 뛰며 아이들과 함께 재롱을 떨었으니 지금 온몸이 녹초가 될 수밖에. 아마도 거의 다 불량 아빠일 게다. 363일 관심을 기우려주지 못하다가, 1박2일의 짧은 시간에 아빠의 사랑을 전하려 했으니 불량 아빠일 수밖에. 그런데 생각해보니 우리 자랄 때는 그냥 내팽개쳐진 아이들 마냥 홀로 쑥쑥 컸는데, 요즘 자식들에게는 대화니 사랑이니 관심이니 하며 많은 애정을 쏟아야 한다니, 오늘날의 자식 사랑은 온실 속 사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학원이다 과외다 숙제다 하며 하루 종일 틀 속에 얽혀 지내야 하는 아이들을 위해서는 정말 많은 사랑으로 그들을 어루만져 주어야 할 것 같다.

나의 육신은 몹시 지쳐 있고 지난번 백두산 여행에서의 아빠와 아들의 한마음 갖기보다는 못했지만, 뭉개진 내 코 덕분에 아들의 눈빛에서 아빠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기에 보람을 느낀 시간이었다.

징그럽게 커버린 아들 녀석을 목말 태우고 달리다가 앞으로 그냥 슬라이딩 해 버렸으니까. 그래도 다행이다. 내 이마와 콧등만 뭉개져버렸고 현수의 얼굴은 말짱했으니까.

하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서 밀려든 씁쓸함은 감출 수 없었다. 그것은 또래 아이들과의 경쟁 속에서의 부대낌을 겪어야 하는 아들의 힘겨운 모습을 새삼스럽게 본 때문이다. 아빠의 눈으로 아들의 미래를 기대하지 않고, 아들이 내딛는 그 길을 그대로 인정하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살아가면서 혹여 커다란 그늘을 드리우게 될지 모를 아들의 힘겨운 발걸음들을 생각하니 나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그날 밤 아들을 향해 마음속으로 한마디 건네주었다.

“밝은 마음으로 자라기만 해다오!”

 

1997년 10월 26일

아빠와의 캠프를 다녀와서

 

 

 

 

 

 

아빠의 마음

 

 

기억나니? 아빠와 함께 산에 올랐었지.

아래에서 올려다보았을 때는 무척 높게만 보였는데

현수가 앞서고 아빠가 밀어 주며

올라섰던 그 높은 바위는 어느새 바로 네 곁에

가까이 다가섰던 것을.

 

서둘러 오르면 쉽게 지쳐 버리고

쉬고 싶다고 그냥 그 자리에 있으면

그곳까지 갈 수 없는 거란다.

 

한 발 한 발 내딛자구나!

힘들 때면 아빠에게 너의 마음을 열어 주렴.

현수의 발걸음에 맞추어 아빠도 함께 나아갈게.

너와 함께 가는 길 언제나 현수의 발걸음에 맞추어 갈게.

 

그렇지만 어떤 길이 너에게 힘든 길인 줄

아빠는 먼저 가보아 알고 있기에

현수가 가고 싶지 않은 곳일지라도

때로는 너의 손을 이끌고

때로는 너의 등을 밀어주고 싶구나.

 

오늘밤 모닥불이 꺼져 온통 어둡기만 할 때

아빠가 불 붙이고 현수가 두 손에 들었던

촛불은 너의 앞을 환히 비추어 주었었지.

그래, 현수 혼자 이루기 힘든 일

아빠와 함께 한다면 쉽게 해낼 수 있을 거야.

 

현수의 꿈, 아빠의 마음

그리고 우리의 사랑을 담았던 그 별님

언제까지나 그 하늘에 머물러 있듯,

현수와 아빠의 가슴에 한 마음으로 꼭꼭 간직하자구나.

 

넓은 마음, 큰마음, 그리고 깊은 마음······. 기억하지?

언제나 맑고 바르고 슬기로운 아들이 되길 바란단다.

예쁜 꿈 꾸렴!

1997년 10월 18일 밤

캠프파이어를 끝내고

현수와 한마음이고픈 아빠가

 

 

 

 

  

 

사랑하는 현수에게

 

 

나의 아들아! 엄마 아빠 곁에서 떨어져 너 홀로 친구들과 밤을 보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구나. 지금쯤 무엇하고 있을까? 그래······. 어쩌면 부모에게 편지 쓰는 시간일지도 모르겠구나. 그 시간이라면 아마도 아빠를 닮아서 쓰기 싫은 이야기 몇 자 적어 내려가다가 ‘아빠 술 드시지 마세요!’ ‘엄마 사랑해요!’라고 마무리 짓겠지.

아빠는 오늘 이 밤이 무척 기쁘단다. 그 이유는 오랜 동안 마음속에서만 다짐해 왔던 '너희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시작하게 되어 그렇단다. 편지를 쓰고 싶었던 이유는 현수가 걸어가야 할 멀고 먼 길 중에서 어느 날인가 네가 너만의 세상을 고집하게 되어 우리가 충돌하게 될 때, 네가 아빠를 이해하고 아빠도 너를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의 다리를 남겨 놓고 싶기 때문이란다.

물론 아빠가 걸어 왔던 길이 가장 바른 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먼저 앞서 가고 있는 아빠가 네가 올라야 할 길을 안내할 수 있기에, 아빠의 지난 길 그리고 지울 수 없는 삶의 모습들이 너에게 이정표가 될 수 있도록 들려주려 하는 거야.

이 편지가 네게는 아직 아무런 의미 없는 이야기이란 것 알고 있어. 그러나 시간이 흘러 다시 읽게 될 때는 지금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을 현수와 아빠와의 거리를 좁혀 줄 거야.

힘들지? 너는 너만의 세계 속에서 한껏 자유롭게 성장하고 있건만, 엄마 아빠는 너의 생각과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남들과 비교하여 너를 맞추려 한다는 것이. 음······. 다음 편지에서는 그 이야기 나누기로 하고, 오늘은 너를 처음 안게 되었을 때의 아빠의 기쁜 마음을 들려줄게.

손주 손잡아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시던 할아버지 등살에 엄마 아빠가 결혼 후 바로 아기를 갖게 되길 바라던 중, 어느 날 너의 심장이 뛰는 것을 느끼게 되었단다. 무척 기뻤어! 하지만 엄마 뱃속에서 삶을 준비하던 너에게 많은 고통을 안겨주었지. 그때가 엄마의 삶에서 가장 힘들었을 때였던 것 같아. 삶의 방식이 전혀 다른 곳에서 시부모를 모시고 살게 되었고, 생전 가보지 못한 고추밭에서 임신한 몸으로 쪼그리고 앉아 일도 해야 했고, 무엇보다 서로 다른 사람이 만나 하나가 되기 위하여 아빠와 많은 갈등을 겪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야. 좀더 엄마의 마음을 편하게 했다면 현수도 평온한 마음을 갖게 되었을 텐데. 네가 여러 가지 상념에 힘들어하는 이유는 엄마 뱃속에 있을 때 네가 겪어야 했던 일들 때문일 거야.

그러나 현수야, 그건 주어진 틀이야. 살아와 보니 주어진 틀이 아무리 좁다 할지라도, 그 틀 속에서 행복과 불행을 느끼는 것은 자신의 몫이더구나. 그 마음조차 주어진 것이라면 할 말 없겠지만 그건 패배자의 변명일 뿐이란다. 하늘을 바라봐! 지금 하늘은 무척 맑단다. 어둠으로 옥빛을 바라 볼 수 없지만, 하얀 구름 몇 조각이 보이고, 작년 가을날 그 캠프에서 현수와 바라보았던 별빛도 빛나고 있어. 어떤 이들은 어두운 하늘이라 외면하겠지만, 어떤 이는 그 어둠 속에서도 바라 볼 수 있는 별빛과 구름 몇 조각에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것이겠지.

아무튼 10시간의 산고 끝에 너를 보았어. 후후······. 너무도 지루하기에 아빤 소주 석잔 마시고 앉아 있다가, 코를 골면서 졸았단다. 그것 때문에 십 년이 넘도록 엄마한테 구박을 받고 있어. 그래 그렇게 1989년 3월 10일 오전 8시 50분쯤 너는 세상의 빛을 보았고, 간호사 품에 안겨 나오는 너의 얼굴을 기억에 담으려 뚫어지게 보니 아빠 귀를 쏙 빼닮은 쪽박귀가 먼저 눈에 띄더군. 크게 기뻐하신 할아버지께서 다음날 바로 지어주신 ‘명섭’, 그리고 몇 년 뒤 더 좋은 이름이 있다고 하기에 엄마 아빠가 부르기 시작한 ‘현수’.

갓난아기 때의 너의 모습은 남들에게 너의 모든 것을 내 줄 만큼 천진하고 온화한 모습이었어. 세상의 모든 평화가 너의 얼굴에 깃든 듯했단다. 하지만 아빠는 네가 여린 자보다는 강한 사람으로 세상을 헤쳐 나가길 바랐어. 어린 너를 안고 맥아더의 ‘아들을 위한 기도’를 들려주기도 했지만, 늘 큰소리와 꾸지람이 앞서게 되었단다. 왜 그리도 널 몰아쳤는지 알 수 없구나. 기억나지? 언제인가는 지워버리길 바라지만 너의 종아리를 차마 때릴 수 없어 아빠의 종아리에 피멍이 맺히도록 때렸던 일. 그것조차 너에게는 깊은 상처로 남겨져 있을 거야.

하지만, 현수야! 아빠와 엄마가 너에게 사랑의 물을 흠뻑 주려고 하는 것 잘 알고 있지? 아빠는 현수가 어떤 길을 간다 할지라도 인정할거야. 그것도 너의 길이니까. 그러나 아빠가 먼저 지나온 길이기에, 좀더 현수가 편하고 보람을 느끼며 살아 갈 수 있는 길을 알고 있어. 현수가 걷기 시작한 그 길이 아빠가 걸었던 길과는 달리 새로운 풀잎도 나고 새로운 가지도 움트기 시작했을지라도, 현수가 가 있어야 할 곳은 지금 아빠가 있는 이곳이기 때문이야.

아마도 이 편지는 며칠 뒤 너에게 전해지겠지. 그러나 지금은 읽기조차 힘들 거야. 아빠가 아니면 엄마가 한번 읽어 줄께. 훗날 현수가 혼자서 읽어 봐.

캠프에서 돌아오는 내일 밤 아빠와 함께 자자구나. 너의 볼에 아빠의 볼 비비면서······. 조금 더 커지면 아빠가 너의 곁에 있는 것조차 싫어하겠지만 그때까지 만이라도 너를 안고 잠들고 싶구나. 현수야, 정말 밝은 마음으로 살아가길 바란다. 아직은 읽기 힘든 편지겠지만, 종종 너에게 보내련다. 현수가 혹 어둠 속에서 걷게 될 때 자그마한 불빛이 되고 싶은 마음으로······.

현수야, 잘 자! 예쁜 꿈꾸고. 안녕.

 

1998년 9월 15일

열 살 된 현수가 캠프에 갔을 때

 

 

 

 

 

사랑하는 현지에게

 

 

언제나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아빠를 바라보던 현지 잘 지내고 있겠지? 현지가 있는 서울 하늘도 어둠이 밀려오고 있겠구나. 아빠와 오빠가 있는 이곳은 록키산맥의 끝자락에 있는 자스퍼라는 작지만 무척 아름다운 마을이란다. 지금 이곳 하늘은 차라리 보석 빛으로 찬란히 비추고 있다고 해야 할 만큼 깊은 어둠 속에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별들로 빛나고 있어.

 

현지가 태어난 뒤 가장 오랜 시간 동안 헤어져 있는 아빠와 오빠의 이번 캐나다 여행도 이제 내일 밤이면 마지막이 되는구나. 오빠의 여름캠프 동안 어려움 없이 무사히 지낼 수 있었던 것은 현지와 엄마의 사랑 때문일 거야. 하지만 한 달 가까운 시간 동안 아빠는 항상 너에게 미안한 마음을 떨굴 수 없었단다. 오빠만 사랑하고 현지는 사랑하지 않는다며, 오빠 손을 잡고 집을 나서는 아빠를 무척이나 서운한 눈빛으로 바라보았지. 그렇지만 현지도 알게 될 거야. 엄마 아빠의 마음속에 너희들에 대한 사랑은 똑같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오빠가 첫째이기 때문에 더 많은 관심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단지 현지보다 앞서서 더 높은 학년이 되고 있기에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이야. 그만큼 오빠는 엄마 아빠 품에서 빨리 벗어나게 될 테고, 현지는 오빠와 똑같이 엄마 아빠의 사랑하는 아이로서 함께 하게 되는 것이란다.

나의 귀여운 공주님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아빠는 어땠을까? 현지가 엄마에게 그런 말을 했단다. 아빠가 매일 술을 마시고 오는 이유를 아느냐고? 바로 우리 집에 아빠의 친구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그래서 현지가 아빠의 벗이 되어주어야 한다며, 초인종 소리와 함께 가장 먼저 달려와 아빠 품에 안기지! 무뚝뚝한 오빠만 있었다면, 아빠는 정말 재미없었을 테니까. 그리고 엄마의 가장 소중한 친구도 현지뿐인 것 알고 있지? 아빠, 오빠 두 남자는 언제나 엄마 속을 썩이지만, 현지는 스스로 너의 일을 다 하면서도 엄마를 항상 기쁜 마음으로 돕고 있기에 우리 집에서 가장 향기 나는 꽃으로 피어나고 있단다.

 

현지의 얼굴을 본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나고 있구나. 아빠는 여기 캐나다에 온 뒤로 떨굴 수 없는 소망이 하나 있었어. 그건 현지 품안에 안겨줄 예쁜 선물을 찾는 거였지. 하루 이틀이 지나고 몇 주가 지나도 아빠의 마음을 담아 건네 줄 선물을 찾지 못했단다. 4년 전 엄마와 유럽여행을 갔을 때처럼······. 그때도 현지에게 안겨주고 싶던 ‘인형이 춤추는 탁상시계’를 사고 싶었지만 구할 수가 없었어. 그러다가 소렌토라는 이태리의 작은 항구도시 근처의 가게에서, 지금 현지 피아노 위에 놓여 있는 음악이 나오는 보석함을 보게 되었지. 마치 정말 보석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아빠는 무척 기뻤단다. 훗날 현지도 음악시간에 배우게 될 ‘돌아오라 소렌토로’라는 음악이 나오는 보석함이야. 그 보석함에 아빠의 사랑을 담았고, 그리고 현지의 꿈을 보태어 오래도록 나의 공주님이 간직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정말 행복한 마음으로 선물 보따리에 담을 수 있었지.

 

오늘 저녁에도 그때처럼 아빠는 행복에 젖어 있단다. 현지에게 안겨주고 싶은 선물을 구할 수 있어서. 기념품 가게를 들릴 때마다 현지의 어린 시절의 꿈을 담아둘 선물을 찾았지만, 이곳에 올 때까지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 하지만 오늘 저녁 오빠와 아름다운 이곳의 거리를 구경하다가, 어느 가게 유리창에 붙어 있던 하얀 종이 위의 ‘music angel'이란 글자를 보고선 한걸음에 문을 열고 들어가 가격도 보지 않고 예쁘게 포장을 부탁했단다. 빙글빙글 춤을 추는 천사는 아니지만, 태엽을 감고 나면 현지의 예쁜 목소리 같은 천사의 노래가 들려오는 아리따운 인형이야. 현지가 잠들려 할 때 그 노래를 들려주면, 분명 꿈 속 나라에서 천사가 되어 아름답고 행복한 이야기를 만들어갈 거란다. 빨리 현지 곁으로 달려가고 싶구나.

 

오직 하나뿐인 나의 공주님. 그리고 우리 집에서 유이할 아빠의 친구 현지. 현지에 대한 아빠의 사랑은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엄마, 오빠에 대한 사랑과 마찬가지로 언제까지나 똑같은 것이란다. 아니······. 살며시 너의 귀에만 들려줄게. 그 누구보다 너를 더 사랑한단다. 아빠의 이 마음은 그 보석함과 뮤직 엔젤의 추억을 현지가 가슴에 품고 있는 날까지 영원할 거야. 아빠와의 사랑과 현지의 꿈을 보석함에 꼭꼭 넣어두었다가 다시 보고 싶을 때마다 열어보렴.

언제까지나 현지가 아빠의 소중한 벗으로 곁에 있어주길 바래. 아빠도 현지가 꿈을 키우고 펼쳐나갈 때까지 소중한 아빠로서 그리고 벗으로 함께 할 거고, 늘 너의 밝은 미래와 행복을 기원하고 있을 거란다. 천사의 마음으로 꿈을 가꾸어가렴!

서울 가서 빨리 보고 싶구나. 나의 사랑하는 딸 현지야!

200년 8월 24일

자스퍼에서 현지 선물을 사던 날

 

 

 

 

 

 

 

못 다 쓴 편지

 

 

이곳은 참 아름다운 곳입니다. 당신의 고향 가을 하늘 마냥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평화롭습니다. 내년에는 당신의 며느리 손주들과 함께 한 달가량 이곳에 다시 찾으려 합니다. 당신이 머물렀던 그리고 우리가 발을 내딛고 있는 그곳에서도 평화와 행복을 찾고 가꿀 수 있겠지만, 아이들에게 더 넓은 다른 세상을 자주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당신 손을 잡고 미아리 시장에서 꽁치도 사고 순대도 샀던 그런 추억처럼······. 저도 아이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 주고,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습니다.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것은 당신들이 남겨 주신 은혜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고 영혼을 안겨 주셨고 양육의 정성을 쏟아 주셨고 바른 삶의 길을 알려 주셨으며 당신들의 뒤를 이을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셨으며 생활의 틀에 여유를 넓혀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 건너 세상으로 떠나시면서는 저희들에게 삶의 자유도 안겨주셨습니다. 하늘을 날고 있는 새들처럼.

진정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 바른 발걸음으로 내딛으려 노력하는 나의 길은 당신들이 가꾸어 놓으셨던 길이고, 우리 가족의 삶의 여유는 당신들이 남겨 주신 것이라는 것을 깊이 새기고 있습니다. 결코 헛된 길은 걷지 않으려 노력하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니! 당신들은 어디로 가신 건가요?

꿈에 언덕 넘어 가시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당신들의 눈빛을 마주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저 뒷모습만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그 마루턱을 넘어가셔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저희 또한 언젠가 넘어야 할 고개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당신들은 언덕 너머에 계시고 나는 이곳에 있기에 다시는 당신들의 따스한 손길을 느낄 수도 없고, 당신들의 사랑의 눈빛도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그립습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신가요? 저편 세상 나무 그늘 아래서 두 분이 함께 저희를 기다리고 계신가요? 오늘밤 너무나도 눈에 선합니다.

한없는 사랑을 감추고 엄하게 꾸짖음을 주시던 아버지의 얼굴, 그리고 오직 자식들을 위해 평안을 기원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지금이라도 당장 그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 앞에 다가 오시어 곧 손을 잡아 주실 것 같은 아버지, 어머니! 어디에 계신 건가요?

 

 

2000년 8월 5일

부모님 생각이 간절한 밤, 스쿼미시에서

 

 

 

 

 

 

뽕나무 아래 비문

 

 

검단산 아래 광주 천현골에서 낳아,

물 건너 보이던 곳 예봉산 중턱에 누웠다네.

 

한평생 뽕과 인연된 쉼 없는 발걸음에,

하늘과 땅이 가상히 여겨 이 자리 주었다네.

 

여기 첫걸음 내딛었을 적에

인연의 산 뽕 풀 속에 묻혀 그를 반겼으나,

 

이젠 무성한 잎 비벼 당신의 말씀 전한다네.

“진정 깨끗하게 살았노라. 열심히 살았노라”

 

2000년 1월 孤哀子 심 상 구

 

 

 

49제 발원문

 

비나이다. 비나이다.

당신의 공적이 이러하거늘

일곱 고개 넘을 적마다 굽어 살피시어

밝음의 세계로 인도하소서!

 

첫째는, 의지하지 아니하고 홀로 일어선 공덕이요.

둘째는, 쉼을 마다하고 일을 쫓아 살아온 공덕이요.

셋째는, 하늘이 주신 양식과 물품을 낭비하지 않은 공덕이요.

넷째는, 남의 것을 탐하지 아니하며 해를 끼치지 않은 공덕이요.

다섯째는, 인색의 옷을 입고서도 진정 옷을 벗어 걸쳐준 공덕이요.

여섯째는, 몇 십 년이 흘러도 변치 않는 우정을 지켜온 공덕이요.

일곱째는, 더 이상 남김없이 쇠하도록 살아온 공덕이요.

 

비나이다. 비나이다.

당신의 이러한 보잘 것 없는 공덕이나마

굽어 살피시어

당신도 알지 못한 채 행한 악업을 덮으시고

세상에 빛이 되는 삶을 또다시 주시옵소서!

 

2000년 1월 16일

49제 마음속 나의 발원문

 

 

 

 

 

감사의 인사

 

깊어가던 겨울의 매서운 추위는 입춘이 다가오면서 그 모습을 뒤로하고 있습니다. 부친이 걸어 오셨던 길이 그러했듯이 언덕 넘어서 저 건너 세상으로 가실 때도 몹시 혹독한 찬바람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극복하며 걸어야 하는 것이 진정한 삶의 길이라고 가시는 길에서도 저희에게 남기신 또 하나의 가르침이셨습니다. 언젠가 저희에게 닥쳐 올 일이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기대어 의지할 곳은 당신이었거늘 당신의 빈자리는 너무나도 큽니다.

 

당신과의 우정을 생각하고 또한 저희에게 큰 힘이 되도록 찾아주셨던 고귀한 님의 배려와 관심은 저희에게 깨우침을 주셨던 자리였습니다. 저희들은 마지막 촛농까지 태우며 세상에 불을 밝히듯 충실히 살아오셨던 당신의 삶을 이어받고, 홀로 일어나시어 오로지 근검절약의 정신으로 이룩하신 당신의 자리를 보존하고, 몇 십 년이 흘러도 변치 않고 어우러져 살아가는 신의와 우정의 세계를 지키며, 작은 것은 인색하면서도 큰 것은 아끼지 아니하셨던 진정한 베풂의 마음을 본받으려 합니다.

 

마지막 유언처럼 남기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정녕 깨끗하게 사셨노라고 말씀 남기셨습니다. 당신 슬하에서 ‘맑게 바르게 슬기롭게’ 살라는 가르침에 이끌려 성장해 왔거늘, 당신의 진정한 모습을 어찌 모를 수 있겠습니까? 단지 따라가지 못했던 불효와 어리석음을 통탄할 뿐입니다. 하지만 당신께서는 저희에게 생의 여유만을 남겨주신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바른 길을 알려주셨던 것이기에, 비로소 저희는 이제서라도 깨우쳐서 진실 된 삶을 향해 정진해 나가겠습니다.

 

어려운 발걸음 내디디시어 저희에게 베풀어주셨던 관심과 일깨우심을 깊이 감사드리고, 아울러 자필로 인사 올리지 못함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저희에게 하늘이셨던 선친과 어려울 때 힘이 되어 주셨던 님에 대한 보은의 마음은 선친의 뜻을 이어 보존하고 키워나가는 것으로 보답 드릴 것을 약조 드리며, 고개 숙여 감사의 인사 다시 올립니다.

 

2000년 2월 1일

孤哀子 심 상 구 子婦 임 수 연

子 경 희 壻 윤 동 권

준 희

* 부친상을 치르고 미처 인사의 글 전하지 못한 분들께 올립니다.

 

 

 

 

 

제 3장

 

끝이 없는 이야기

 

 

 

 

 

출 근 길

 

 

먼동이 트기도 전에 9개월 된 둘째 공주가 심심하니까 놀아 달라는 듯 나의 팔에 자기의 얼굴을 비벼대며 잠을 깨웠습니다. 밤새 축축해 있었을 아기의 엉덩이를 부채질로 뽀송이 말려주며 새 기저귀로 갈아주고는, 분유 8스푼에 따스한 물 160cc를 담아 아기 입에 젖병을 물려주었습니다. 다시 잠든 아기를 엄마 품에 안겨놓고서는 살며시 거실로 나섰습니다. 방문이 열려 있는 첫째 딸 방으로 들어가 ‘뮤직엔젤’ 인형의 태엽을 감아 주고, 건너편 아들 방으로 들어가 깔다만 이불 위에 쓰러져 잠들어 있는 아들의 얼굴에서 안경을 벗겨내 입김을 호호 불며 닦아주었습니다. 밝은 눈빛으로 세상을 바라보길 바라면서…….

 

밤새 굳게 닫혀 있던 승용차의 창문을 열고 농장을 향하다가, 매일 다니던 출근길을 불현듯 벗어나 남한산성 길로 핸들로 꺾었습니다. 새벽에 피어나는 풀과 나무 향기에 취해 어둠이 걷히기 시작한 굽잇길을 무심히 내달리다가, 길을 가로질러 푸드득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까치 한 쌍에 놀라 잠시 멈춰 섰습니다. 사무실 한쪽 벽면 유리창 아래에 있는 커다란 나무에 얼마 전 둥지를 틀었던 까치가 생각났습니다. 그 나무 아랫집에 살고 있는 할아버지가 까치의 지저귐이 시끄럽다고 어느 날 그들의 보금자리를 무너뜨렸고, 집을 잃은 까치 부부는 사무실 창가 나뭇가지에 앉아 슬픈 이야기를 내게 전하고 떠나가 버렸던 기억이 애잔하게 나의 뇌리를 스쳐 지났던 것입니다.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을지도 모를 팔당호수로 내달리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농장에 다다르니, 근처 초등학생들의 등굣길 가장자리에 씨앗을 길게 뿌려놓았던 과꽃들이 어느덧 꽃망울들을 하나 둘 터뜨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릴 적 미아리 집 정원을 가득 메웠던 과꽃 속에 묻혀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 라는 노래를 부르던 때를 떠올리며, 동네 아이들에게도 어린 시절의 추억을 심어주기 위해 괭이를 들고 몇 됫박 씨앗을 뿌렸던 우리들의 꽃밭이었습니다. 잠시 지나치는 곳일지라도 매일 오가는 등굣길이기에, 해마다 꽃을 마주하면 아이들 마음속에도 아름다운 기억으로 씨앗이 뿌려질 것이라는 나의 작은 바람입니다.

 

차를 세워놓고 사무실 현관으로 향하니 또 다른 까치 한 쌍이 한 입 가지를 물고와 그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습니다. 아마도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하려 하는 것 같습니다. 혹여 할아버지의 장대가 까치 부부의 꿈을 또다시 무너뜨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랫집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그리고 내년 새봄에 아기 까치를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하니, 할아버지의 큰 웃음이 내 마음에도 꽃을 피우게 했습니다.

즐거운 출근길이었습니다.

 

2002년 7월 5일

 

 

 

 

현주가 집에 처음 오던 날

 

 

 

“일자형을 사야할까? 팬티형으로 사야할까?” 기저귀 코너에서 한동안 망설이다가 하나를 고르고 분유코너로 향했습니다. 한편 행복하면서도 한편 쑥스러웠습니다. 손주도 볼 수 있는 나이이기에…….

 

힘든 일주일이었습니다. 아내의 발을 주무르며 지난 월요일부터 오늘 아침까지 좁은 병실에 갇혀 있자니 몸이 쑤실 정도였지요. 첫째 현수와 둘째 현지 출산 때는 직장생활에 녹초가 된 상태로 늦은 밤이 되어서야 병실에 누워있는 아내 곁으로 가서, 팔에 끈을 묶고 필요하면 깨우라 하고서는 코를 골며 잠에 떨어져 버렸었는데, 소홀했던 두 번의 지난 과오를 씻고자 이번에는 일주일 동안 큰 눈 뜨고 병실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죠.

 

깜박 졸고 있는데, 분만실에서 간호사가 아기를 안고 나오며 아내 이름을 불렀습니다. 첫째 현수 때는 긴 밤을 지새우기가 지겨울 것 같아서 저녁 식사를 하며 소주 몇 잔 들이켜고 대기실 긴 의자에 앉아 그만 코를 드르렁 골며 졸았다가 십여 년간 구박받고 있고 있던 터라, 간호사의 호출에 기겁을 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습니다. 아들이라며 고추를 보여주는 간호사는 보았어도, 딸이라며 고추 없는 고추를 보여주는 간호사는 처음 보았습니다. 혹이라도 아들에 대한 일말의 미련이 있다면, 깨끗이 포기하고 단념하라는 무언의 충고였던 것 같습니다. 볼 멘 소리로 말했지요.

“알고 있었어요!”

 

내심 아들이 하나 더 있으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외아들이라는 부담을 현수에게서 덜어 줄 수 있고, 형제간에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함께 나누며 살아가는 이들을 볼 때는 부럽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내 마음속의 갈등도 컸습니다. 삶이란 기쁨과 평화보다는 고통과 번뇌를 더 깊이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기에, 한없이 뻗어나갈 생명의 고리를 만들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번민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생명을 잉태하고 키워 나가는 것도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진실 된 생명의 진리일 것이란 생각에, 재작년 그리고 작년 두 번에 거쳐서 아내에게 유산의 고통을 안겨 주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셋째 아이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마음을 정갈히 하며 기다리던 지난 2월, 정동진 일출과 태백산 눈꽃 축제 가족여행을 다녀와서 한껏 태백산의 정기로 집안을 가득 채웠더니 바로 그 날 새 생명이 잉태하였고 그리고 몇 달 뒤에는 의사 선생님에게서 아내는 “막내는 예쁜 게 낫지?”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어여쁜 공주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지요.

 

오늘 퇴원할 때 어떤 딸딸이(?) 아빠가 늦둥이 아들을 안고 함박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해 하던 모습을 보면서 쓴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배가 아팠지요. 하지만 그래도 어여쁜 나의 공주이기에, 집에 두고 왔던 승용차를 어둠이 채 걷히기도 전에 몰고 와 아름답고 품위 있는 여인으로 자라나길 바라며, 아기가 타고 갈 차의 안과 밖을 정갈히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빌었습니다.

“너의 삶에 행복이 항상 가득하길 바란다. 그리고 세상에 빛을 널리 밝히기를 바란다. 나의 둘째 딸 아기야!”

 

아내의 가슴에 안겨 있는 아기의 얼굴을 다시 보았습니다. 내 얼굴을 판박이 했답니다.

“아이고, 걱정되네!”

아내가 내게 물었습니다.

“딸딸이 아빠가 된 소감이 어떠우?”

병실 앞에 앉아 있던 수간호사에게 내가 말했습니다.

“내년에 또 봐요!”

이어서 아내 하는 말

“고마웠어요. 다시 봐요. 아참! 다시 보면 안 되지.”

 

2001년 11월 12일

 

 

 

 

 

 

가을에는

 

 

느껴 보세요.

혼돈 번민 슬픔은 잠시 접고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창공을 바라보며

마음엔 풀잎 향기를 담아 보세요.

 

꿈마저 가두어버렸던

어제의 장대비는 멈추고

눈이 부시도록 푸르른 빛은 아니지만

오늘은 가을하늘이 끝없이 펼쳐져 있어요.

 

화나게 하는 이에게는 인내를 보이고,

스쳐 지나는 벗에게는 행복을 빌어보세요.

그리운 사람과의 연보랏빛 추억을 되새기며,

이 가을을 울타리 가득 갈무리 해 보세요!

 

 

 

2005년 9월 14일

 

 

 

 

나뭇잎 하나

 

 

연주회가 끝나고 잠시

길가 벤치에 앉아있던

만삭의 아내가

가로등 불빛에 곱게 모습 드러낸

단풍잎이 예쁘다며 하나를 따 달라 했습니다.

 

팔을 뻗어 나뭇가지에서

한 잎을 떼어 내려다가

그만 손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함께 있을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을 텐데…….

바람결에 이별을 맞이하게 될 그 날까지

그 잎을 가지에 머물게 하고 싶었습니다.

 

결국 나는 바닥에 떨어진

빛 고운 나뭇잎 하나를 들어

아내에게 건네주었습니다.

 

2001년 10월 24일

 

 

 

 

 

비 오는 날 아침

 

 

밤새 비가 내렸다.

해가 중천에 떠 있을 시간임에도

하늘은 어둡고 장대비는 여전하다.

 

이미 숲과 땅 위에는 피할 곳이 없고

빗물소리에 내 가슴도 깊이 젖어 드는데,

어디선가 들려오는 여린 새 소리가 애처롭다.

 

빗방울 그치기만을 기다렸을 작은 새는

어둠이 걷혔는데도 날개를 펼쳐보지 못한 채

웅크리고 배고픔을 삭여야 한다.

 

무심한 비는 끝내 멈추지 않고

부칠 곳 없는 마음속에

어느덧 바다 되어 넘쳐흐른다.

 

2005년 7월 27일

 

 

 

 

 

작지만 아름다운 것

 

 

 

며칠간의 언짢은 일들로 인상을 찌푸리며 달려가던 출근길에서 교차로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기에 나는 차를 멈추었다. 옆 차선에서 뒤쫓아 오던 덤프트럭이 나의 차선 앞으로 급히 핸들을 꺾어 밀고 나오며 신호를 무시하고 달려간다. 순간 우지직- 소리가 나며 내 차 뒷부분이 크게 흔들거렸다. 이미 신호등은 빨간불이었음에도 나는 앞질러가 그 트럭을 세웠다.

얼핏 겉보기에는 뒷범퍼의 일부에만 흠집이 났고 페인트가 벗겨져 있었다. 하지만 난폭 운전을 했던 그에게 나의 화풀이도 덧붙여 한바탕 큰 소리를 치리라 마음먹고, 옷소매를 걷고 트럭 운전사와 한바탕 붙으려는 순간, 어떤 젊은 친구가 다가서오며 말을 건넨다.

“아저씨, 내가 받는 거예요. 트럭을 피하려다 아저씨 차를 받았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그냥 모른 척하고 지나쳐도 되었을 젊은 친구는 머리를 조아리며 내게 사과를 한다.

“제대로 수리를 하려면 십 여 만 원은 들 테고, 적당히 겉의 흠집만 지우려 해도 몇 만 원은 들 텐데…….

그냥 가라는 나의 말에 그는 미안한 표정과 함께 환히 웃으며 자기 차로 돌아간다.

그의 티코 중고차 뒷 유리창에는 몇 개의 글자가 쓰여 있었다.

“아기가 타고 있어요.”

그의 차에는 아기뿐만 아니라, 작지만 아름다운 ‘양심’도 타고 있었다.

2002년 5월 31일

 

 

 

 

무심한 아빠

 

 

 

왕복 이차선의 시골길을 달린다. 이쪽 차선은 차들이 쉴 틈 없이 연이어 기어가고 있고, 저쪽은 간간이 빠른 속도로 돌진해 온다. 반대편 차선 가운데서 두리번거리며 서 있던 강아지 한 마리가 쏜살같이 달려오는 차의 경적 소리에 놀라 건너편 길가로 내달음 친다. 그러고는 또다시 차선 가운데를 향해 두리번거리며 몇 걸음 옮긴다. 날은 어두워 가는데 그 강아지는 집으로 돌아갔을까? 잠시 멈춰 서 줄 것을…….

 

농장 차고 옆에 아기 토끼 세 마리의 보금자리가 있다. 차를 타기 위해 내딛는 주인 집 아저씨의 발걸음에 놀라 어쩔 줄 몰라 했다. 어느 날 하얀 아기 토끼 한 마리가 탈출해 버렸다. 먹이를 주기 위해 열어 놓았던 위쪽 문을 밀고 엄마를 찾아 가겠다며 뛰쳐나온 모양이다. 닭장 옆에서 풀을 뜯던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들고양이에게 물려가 버린 건 아닐까.

 

소파 팔걸이에 포도송이가 담긴 접시를 올려놓고 입과 접시 사이에서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흘러내린 안경 너머로 나의 눈동자는 TV 뉴스에 고정되어 있다. 거실 바닥에 있던 9개월 된 아기는 아빠의 무릎에 오르려고 뒤꿈치를 들어 올린 채 ‘아뿌 아푸 아부’라 하며 나의 다리에 매달려 있다. 앞만 보고 있던 내가 비어버린 접시에서 포도 몇 알갱이를 찾아보려고 몸을 뒤척일 때, 아기는 그만 뒤로 발랑 넘어지고 말았다. 그러고는 무심한 아빠를 원망하며 한없이 울어댄다.

 

비틀거리는 세상과 어울리기 위해 술기운에 흠뻑 젖은 채 비틀대며 집으로 들어왔다. 거실 소파에 쓰러져 지쳐 잠들어 있는 엄마의 품에서 아기가 머리를 빠꼼히 내밀며 아빠의 얼굴을 바라본다. 쪽잠에 빠져있던 아내가 들릴락 말락 말을 건넨다. 첫째 둘째와는 달리 막내 아기는 ‘엄마’ 보다 ‘아빠’ 소리를 먼저 한다며 볼멘소리를 한다. 아마도 세상사에 찌들어 있는 아빠와 훗날 맞이할 빠른 이별이 아쉬워 부지런히 불러 보나 보다. ‘아뿌, 아빠…….

 

2002년 8월 27일

 

 

 

 

 

사랑하는 현주에게

 

 

 

우리 집에 보석처럼 항상 빛나는 현주! 네가 우리 곁에 와준 지 네 돌 째 되는 날이구나. 아빠가 이 책을 탈고하고 있을 때 너는 엄마의 심장 소리를 자장가 삼아 세상을 준비하고 있었단다. 몇 달 뒤 새로 태어날 아기에게 남겨주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었지만, 어여쁜 공주가 될지 멋진 왕자가 될지 알 수 없었기에 현주에게 남겨지는 편지는 책에 담지 못했지. 그러나 이제 할아버지를 추모하며 펴냈던 이 책을 증판하면서, 현주를 향한 귓속말을 담게 되어 기쁘구나.

 

엄마와 아빠는 오빠 언니도 행복하게 살아가길 많이 바라지만, 현주에 대한 꿈은 특별할 수밖에 없단다. 그 이유는 우연히 현주가 우리 곁에 오게 된 것이 아니라, 한 아기를 이 세상에 발을 내딛게 해서, 그 아기가 자라나고 살아가면서 또다시 새로운 생명을 이어가며 기쁨과 행복 속에서 생이 이어갈 수 있는 것인지 아빠는 많은 고민을 한 뒤 아기를 갖기로 결심했단다. 엄마 또한 두 번의 유산 끝에 너를 잉태하여 거의 한달 간 네가 자리를 잡아가도록 병원에 누워 있어야만 했기 때문이야.

 

하지만 현주는 우리 가족이 소중한 추억을 더했던 정동진 일출과 태백산의 티 없는 눈꽃 축제를 다녀왔던 2001년 2월 18일 잉태하였고, 또한 현주 너를 포함하여 우리 가족 모두가 가장 아름다운 추억을 남겼던 캐나다 여행에서 엄마의 포근한 뱃속에 자리 잡고 가정의 소중한 행복을 함께 했기 때문인지, 현주는 지금 우리 집에서 가장 웃음꽃을 피어나게 하는 보석이 되어 있단다. 아마도 네가 우리 곁에 와주지 않았다면, 우리의 행복은 지금보다도 많이 줄어들었을 거야.

 

그러나 아빠 엄마는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단다. 젊은 아빠 엄마들처럼 너의 눈높이에 맞춰 너를 가꾸어 주지 못하고, 어느 날인가 친구들의 부모보다도 훨씬 늙은 아빠 엄마의 모습을 감추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너의 앞날을 먼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단다. 하지만 늦둥이 현주에게는 언니 오빠가 누리지 못한 커다란 선물이 있단다. 그것은 바로 오빠 언니의 사랑이야. 이제 아빠보다 큰 키를 뽐내며 제법 가장의 역할도 해내고 있는 오빠는 아빠보다도 더 커다랗고 깊은 마음으로 현주를 보듬어주고 있고, 막내에서 둘째가 되어 버린 언니는 떼쟁이 현주의 응석을 모두 받아주며 언니의 많은 시간을 쪼개어 현주의 놀이친구가 되어 주곤 한단다.

 

사랑하는 현주야! 지금 문득 그 때 생각이 나는구나. 몇 년 뒤 네가 다니게 될 초등학교 바로 앞에 있는 외할머니 댁에 가며 현주와 단 둘이 걷게 되었을 때야. 현주가 걷기 시작한 후 서 있는 아빠의 가장 긴 손가락 하나를 간신히 처음으로 잡았을 때였지. 아무리 아빠가 발 폭을 좁게 해도 현주 네가 아빠의 걸음을 쫓아오기 힘들어 하기에, 앉은뱅이걸음을 걸으며 아빠는 너의 발걸음과 너의 눈높이에 맞추려 했단다. 하지만 아빠는 더 넓고 더 먼 세상에 익숙해 있기에 결코 현주가 느끼고 생각하는 그 세상에 아빠는 맞출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단다. 그러나 아빠는 노력할거야! 아빠가 쉰 살 되는 해에 너의 손을 잡고 초등학교 입학식에 가겠지만, 네가 나이든 아빠를 부끄러워한다면 잠시 숨어 줄 것이고, 네가 아빠를 부른다면 언제나 다가설 수 있도록 항상 곁에 가까이 있을 거란다.

 

하지만 해맑은 늦둥이 현주를 바라보면서 항상 걱정되는 것이 있단다. 적극적이고 욕심도 많고 총명하기에 현주는 더 넓고 더 높은 세상을 향하여 스스로 잘 자라나겠지만, 아빠가 언제까지 너의 곁에 머물러 있어줄지, 그리고 현주가 성숙한 여인이 되어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날을 맞이하게 되는 그 날, 아빠가 곁에 있어줄 지에 대한 걱정을 오빠 언니를 바라 볼 때는 느끼지 못하지만, 현주 너의 환한 미소를 바라볼 때마다 아빠의 근심이 앞서게 되는구나.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셨을 때 또 다른 손주의 모습을 보여 드리려 했었지만, 아빠 엄마의 정성이 부족했기 때문인지 두 분 당신들이 떠나신 뒤에야 너를 우리 곁에 두게 되었던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구나. 언니 오빠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았건만, 두 분 곁에 있는 현주의 모습을 사진으로조차 남길 수 없었던 것이 무척 가슴을 아프게 하는구나. 비록 현주가 당신들의 따스한 손길을 느끼지 못했다 할지라도, 훗날 현주가 자라나서 어른이 되었을 때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은혜와 사랑을 분명 느끼게 될 거야.

 

언제나 엄마 품에 안겨 있었지만, ‘엄마’보다 ‘아빠’를 먼저 불러주었던 나의 현주! 지금은 우리 집의 재롱둥이에 머물러 있지만, 너의 키가 조금 더 커지게 되면 아빠의 멋진 친구가 되어 주리라 믿어. 이제는 아빠 엄마의 슬하를 떠나려 하는 오빠 언니 대신에 우리의 손을 잡고 새롭게 변해가는 또다른 세상을 둘러보며, 너의 어린 시절의 추억을 엄마 아빠와 함께 했던 시간들로 가득 메우게 하고 싶구나. 먼 훗날 짧았던 아빠의 사랑을 그 추억으로 메워주길 바라고, 부족한 사랑은 현주 스스로의 행복으로 채우며 아빠 엄마의 사랑을 언제까지나 가슴에 담고 살아가는 아름다운 여인으로 자라나 주길 바란단다.

현주야! 마음과 몸 모두 건강하고 소담스럽게 자라렴. 사랑한다.

 

2005년 11월 5일

 

 

 

 

 

한 달간의 동행, 우리들 이야기

 

 

 

사랑하는 나의 아이들아! 그리고 언제나 그대 삶 속에 오직 가족만을 품고 살아가는 나의 아내여! 가족이라는 하나의 울타리 속에 있다지만, 우리 모두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고 함께 삶의 이야기를 남기는 일상이 얼마나 있었고 앞으로 얼마나 있겠는가?

추억은 희미해지고 사진은 빛바래지는 것이기에, 꼭 잊지 않고 간직하고 싶은 아름다웠던 동행을 간직하고자, 캐나다 밴쿠버에서의 한 달간의 지난 여정을 이 책에 남기려 한다. 우리들이 나누었던 속삭임과 우리들이 남겼던 발자국을 하나하나 풀어 쓴다면 책 한 권으로 엮는다 해도 부족할 것이기에, 하루도 빠짐없이 서로에게 충실했던 그 순간들을 일지 형식으로 남기려 하니, 먼 훗날까지도 이 책을 뒤적여 볼 때마다 그 행복했던 날들을 기억해 주기 바란다.

 

 

2001년 7월 2일(월) 현주를 엄마 뱃속에 감추고 밴쿠버 공항에 무사히 도착하여 차 렌트. 서울에서 예약했던 GLENWOOD 8503번지 한국인 민박집 반지하 숙소에 도착.

 

3일 (화) TECUMSEH 초등학교 사전답사. 센트럴 파크 산책. 핸드폰 렌트 및 먹거리 등 장만.

 

 

6학년 현수와 2학년 현지의 어학연수를 핑계 삼아 한 달간 가족여행을 떠났다. 현수 현지는 공부에서 해방되고 아빠는 오직 엄마와 너희들에게 모든 시간과 마음을 함께 하기 위해 떠난 여행이었지. 방과 후에는 밴쿠버 시내에 있는 공원을 놀러가고, 주말에는 여행을 하며 최대한 우리 가족 모두가 함께 있으리라 계획했던 한 달간의 일정이지만, 엄마 뱃속의 현주를 비롯한 모두의 건강에 대한 걱정과 무사고에 대한 염원으로 아빠의 어깨는 무겁기만 했다.

 

 

4일 (수) 입학. 월-금요일 오전 9시 수업 시작하여 오후 3시 수업 끝. 전자오락실을 들려 민박집 뒷마당에서 바비큐 파티.

 

5일 (목) 버나비 마운틴에서 엄마와 데이트하고 디어파크 답사. UBC 인류학 박물관 관람 후 근처 고급주택가 드라이브. 비치에서 현수와의 대화. UBC 대학 6번 출구 아래 해변은 성인이 되면 가보렴-

 

6일 (금) 싸이프러스 드라이브. 강 여사 댁 방문 저녁 식사. 밴쿠버에서 휘슬러까지 이어지는 SEE TO THE SKY 도로 주행 후 휘슬러 시내 블랙콤 롯지 투숙(침대 하나. 소파 하나에 5식구 얼키고 설켜 잠). 현수와 시내를 뒤져서 육개장 컵라면 사와 늦은 저녁 식사

 

7일 (토) 휘슬러 시내 산보하고 곤도라 탑승. 블랙콤 등정 길에 곰 목격. 정상에서 눈싸움. 휘슬러 시내 인근 꽃동네(이웃을 위해 꽃으로 장식한 집들) 구경. 그린호수에서 큰 보트 승선하고 현수 현지 보트 운전. KEG 스테이크집에서 식사 후 오락실.

 

8일 (일) 그린호수에서 승마. 펨버트까지 드라이브. 알타 호수와 스쿼미시 계곡 전망대, 알리스 호수를 지나 OLLI 아주마 댁 방문. 올리 아저씨 세차장에서 세차 후 맥도날드 햄버거 먹고 샤논 폭포와 개울 구경. 라이온스 베이 근처 카페에 차 마시고 귀가.

(현수의 추억 : 스쿼미시 어학연수. 솔지형. 퍼레이드 축제. 벌목공 축제와 거리 행진)

 

9일 (월) 학교에서 식구들과 함께 점심 식사. 아이스크림 이동차(딸랑딸랑). 엘리자베스 공원 방문. 로얄옥 근처‘한우리’에서 식사

 

10일 (화) 버나비 민속 박물관. 디어레이크 (3인 카약. 공놀이. 오리 떼. 바비큐)

 

11일 (수) 학교에서 점심. 그랜빌 섬 방문과 선셋 관광배 탑승. 서울로얄옥 식사

 

12일 (목) 록키여행 숙박지 예약. BELCARRA BAY에서 라면과 바비큐. 게잡이 구경

 

13일 (금) 게틀 및 게잡이 라이센스 구입하여 벨카라에서 게잡이. 엄격한 제한 및 자율적 통제

 

14일 (토) 싸이언스월드. 롭슨거리. 스탠리파크 (자전거, 아쿠아리움, 마차. 뷰포인트. 라이온스 브릿지), 가스타운, 카나디안플레이스, 하버센터. 인도인 식당.

 

15일 (일) 하루 종일 비. 현대백화점 선물 구입. 집 주인의 저녁식사 초대

 

16일 (월) 차이나타운. 중화정원 관람. 피씨방

 

17일 (화) 강여사의 중국 식당 점심 초대. 메트로타운 구경. 집주인 가족과 민박 가족을 안내하여 벨라카 게잡이 (집 주인이 이민 7년 만에 손님과 처음으로 함께 했던 외출)

 

18일 (수) 전자오락실. 3박 4일 빅토리아 섬 여행 준비 및 휴식

 

19일 (목) 방과 후 트왓슨 항구에서 페리호 승선. 스왓츠베이 근처 그린하우스(한국인) 민박. 부처가든(시크릿가든). 빅토리아 국회의사당 인근의 야경. 해안가 거리의 예술가. 해변 산책로에서 현수의 멋진 디스코 춤.

 

20일 (금) 수업 결석. 시드니 항구에서 게잡이 라이센스 구입. 시드니 섬으로 이동. 아기 머리만한 조개잡이(삽 대신에 조개껍질 이용. 아빠의 멋진 여행지 개척). 빅토리아 시내. 로얄브리티쉬 박물관. 왁스뮤즘. 미니워처월드. 해양수족관. 귀가 길에 시드니항에서 게잡이. 게찜

 

21일 (토) 빅토리아 시내. 크리스탈가든(손가락 크기의 원숭이). CRAIGDARROCH 古城(지역 축제 행사 중). 돌고래 있는 해안 카페. 1번 도로 출발점. 해안도로 드라이브. 섹스피어 집. 나나이모를 거쳐 토피노로 이동. 늦은 시간 라면 사다가 끓여 먹음.

 

나나이모에서 토피노로 가는 길은 좁고 굽어져 있었다. 깊은 산속 길은 지나치는 차량조차 보기 힘들만큼 외진 길이었고, 초행길이라 아빠의 어깨는 굳어 있었다. 모두들 잠들어 있었지만, 너희들의 숨소리는 아빠를 향한 속삭임으로 내게 힘이 되어 주었다.

“우리는 지금처럼 가족이라는 차에 함께 타고 있는 것이지. 지금은 함께 있지만, 어느 날인가 아빠가 먼저 내릴 것이고 엄마도 이 차에서 내리게 될 거야.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 모두가 함께 있다는 것이란다. 자고 있는 너희들의 편한 여행을 위해 아빠는 조심스레 운전하고, 잠결 속에 있는 너희는 예쁜 꿈을 꾸고 있을 테니, 우리의 안전이 이 차에 달려 있듯 우리의 행복도 서로 이해하고 돕는 가정에 달려 있는 것이란다. 우리들의 사랑을 담고 오래도록 달려가고 싶구나! 편히 자고 있으렴!”

어느덧 토피노를 30여 키로 앞두고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이 하나둘 깨어나더구나. 서둘러 숙박지에 가고 싶지 않았지. 여행을 떠난 이유는 우리가 함께 행복을 담고자 했던 것이고, 그때 그 차안은 어느 곳보다도 우리들의 행복을 지켜주는 보금자리였기 때문이었어.

 

22일 (일) 수상 비행기 탑승(현수 조정간 잡아봄, 추락한 비행기 목격). 롱비치 박물관 구경. 해변에서 원반 던지기. 나비의 집(CLOSED). 나나이모 항구에서 밴쿠버행 페리호 승선.

 

23일 (월) 민박 뒷마당에서 주인집과 바비큐 파티.

 

24일 (화) 주인집 안내로 NORTH BANCOUVER BAY에서 3가족 게잡이. 8마리 중 2마리 주인집 아저씨와 술안주. 빅토리아 게보다 맛있음.

 

25일 (수) 그라우스 마운틴 곤도라. 정상에서 밴쿠버 전망. 카피라노 계곡과 서스펜션 브릿지.

 

26일 (목) 귀국 및 록키 여행 준비. 아빠의 생일. 차이나 마켓에서 케잌과 초를 현수가 구입.

 

27일 (금) 등교 기간 중 언제나 엄마의 김밥이 최고 인기였음. 졸업식 후 웰링텅 스트릿에서 오후 3시40분 1번 고속도로 진입. 브라이달 폭포 휴식 후 5번 도로 주행 중 286 출구에서 메리트시 잠시 진입. 한국인 식당에서 저녁 식사 후 캠룹스 COMFORT INN 에 숙박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도로가에 대포가 덮개로 가려 진 채 있었지. 전쟁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나라에 왜 대포가 설치되었는지에 대해 퀴즈풀기를 하며, 현수 현지는 아빠의 힘든 초행길 운전에 힘을 북돋워 주었단다.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마지막으로 계획했던 일정이기에 한편 홀가분한 출발이었지만, 부족한 아빠의 영어 실력과 쉼 없는 긴 여정 중에 엄마 뱃속의 현주가 말썽을 피지 않을까에 대한 걱정으로, 감춰진 아빠의 마음속에는 근심이 가득 차 있었단다. 그러나 아름다운 폭포와 호수, 그리고 만년 이상 변함없이 자리를 지켜온 대빙하로 이루어진 록키 산맥의 일정은 아무리 어렵다 할지라도 너희들 마음과 추억에 담아 주고 싶었던 아빠의 과제였어. 마치 살아가면서 힘든 일들이 닥쳐도 헤쳐 나가야만 하는 것이 인생인 것처럼…….

 

28일 (토) 9시 밴프행 1번 도로 진입하여 오후 2시 골든 시에서 햄버거 점심. 오후 3시 요호국립공원 진입. 내츄럴브릿지. 에머랄드 호수 WAPTA폭포 TAKAKKA(탁카가우)폭포 구경. KICKING HORSE 고개 통과. 오하라 호수는 사전 예약 미비로 통과. 오후 6시 레이크루이스 갈림길에 있는 마운틴 식당 통과해서 오후 7시 밴프 시내 진입. 야경 구경 및 서울옥에서 식사. 9시 캔모아 MARRIOT RESORT 숙박

 

29일 (일) 9시 밴프의 보우밸리와 폭포, 스프링스호텔(세계 10대 호텔, 영화 <돌아오지 않은 강> 촬영지) 산책. 설퍼산 곤도라 통과. 미네완카 호수 드라이브. 1A 도로 우회 루이스 곤도라 통과. 12시 모레인 호수 구경 후 루이스 호수 도착(흰 눈과 노란 꽃들이 함께 호수에 비치는 루이스 호수. 샤또레이크 호텔. 세계적 비경). 밴프 시내로 재진입. 인디안 밀납박물관. 캔모아 숙소로 귀환

 

30일 (월) 루이스 호수 재방문. 93번 도로 자스퍼행. 까마귀발 빙하 전망대. 보우호수. 페이토호수. 개울가에서 라면. 1시경 아이스필드 도착(ATHABAS 대빙원. 설상차). 선왑타 폭포. 애싸배스카폭포. 휘슬러 산 케이블카. 정상에서 거의 원형에 가까운 무지개 배경 촬영. 자스퍼 시내 TONQUIN INN 숙박

 

31일 (화) 마린 호수(관람선 탑승. VIEW POINT에서 잠시 하선 후 사진 촬영). 애드먼트 방향 16번 도로를 미엣온천 입구까지 드라이브 후 자스퍼로 귀환. 피라미드 호수 드라이브. 김치하우스에서 늦은 점심. 오후 4시 30분 자스퍼 출발. YELLOWHEAD PASS 통과. 무쓰레이크 통과. 롭슨 마운틴 전망대 정차. 캠룹스 시내 한국인 식당에서 늦은 저녁 식사. 오후 11시 숙소(미예약) 도착

 

8월 1일 (수) 6시 켐룹스 출발. 지옥의 문 계곡 방문 위해 1번 도로로 우회. 길가에서 라면으로 아침 해결. 오전 8:30 HELL'S GATE 도착(거친 급류. 낚시터) 12시 정오 밴쿠버 버나비의 웰링턴 애비뉴 도착. 5박 6일 총 2,676㎞ 주행.

ENGLISH BAY 해변에서 열린 세계 폭죽 경연대회 불꽃 아래에서 마지막 밤 장식.

 

8월 2일 (목) 밴쿠버 공항에서 차량 반납. 12시 40분 그리운 집으로 출발.

 

기억나니? 록키 산맥의 마지막 기착지인 자스퍼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 산 정상에서 바라보았던 원형에 가까운 무지개는 한 달간의 긴 여정을 사랑으로 채웠던 우리 가족에 대한 하늘의 축복이었어. 그리고 밴쿠버의 마지막 밤하늘에 수를 놓았던 폭죽은 이번 여행을 마감하면서 아빠 가슴 속에 혼재되어 버린 행복과 사랑 그리고 안도의 마음이 한꺼번에 꽃을 피운 것이었지. 거친 여행길을 잘 버텨 주었던 현주 그리고 양보와 배려의 마음으로 서로를 감싸주었던 현지·현수가 대견스럽고, 또한 넓은 마음으로 너희들을 감싸 고 보살펴 주었던 엄마에게 고맙기만 하단다. 비록 집으로 돌아가면 또다시 공부에 시달리고 일상에 쫓겨야 하겠지만, 우리들이 한 마음으로 동행하면서 만들었던 캐나다에서의 여정이 바삐 살아가야 하는 너희들 삶에 때때로 여유를 넓혀 주는 추억이 되었길 바란단다.

아빠는 참 행복했단다. 우리 가족 화이팅!

 

 

2006년 4월 19일

 

 

 

 

부록

 

연대기별 일대기

 

가승(家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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