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록(아버지)

아버지 추모록 1편

묵향의 이야기 2014. 3. 20. 20:20

 

제 1편

 

나의 그리운 아버지

 

 

 

 

 

 

 

 

 

 

 

 

 

 

 

 

 

 

 

 

 

 

제 1장 광주 산골 마을에서 시작한 인생

 

검단산 아랫마을

 

예봉산을 오르며

어느새 시월이다. 차창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스피커에서는 오펜 바흐의 “하늘의 두 영혼”이 흐른다. 그 잔잔한 선율에 맞춰 가볍게 흔들리는 나뭇잎들을 바라보며 나는 차를 몰아 예봉산으로 향한다.

산자락에는 이름 모를 들꽃들이 청초하게 피어있고 가을 햇살 아래 반짝이는 나뭇잎들은 오늘 따라 유난히 맑고 푸르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자연은 이렇게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고 있는데, 우리 곁을 떠난 아버지는 지금 어느 곳에서 편히 쉬고 계시는지······.

아버지가 돌아오지 못할 언덕을 넘어 가신지 벌써 계절이 세 번 바뀌었다. 당신의 모든 걸 다 소진한 뒤, “평생 깨끗하게 살았노라!”며 병상에서 유언처럼 말씀하시던 아버지. 이제는 아무리 불러도 더 이상 아버지의 대답을 들을 수 없고 따뜻한 손의 온기도 느낄 수 없다.

‘아버지, 당신은 지금 저 세상에서 편안하신가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묻고 예봉산을 향해 이렇게 혼자 중얼거려본다.

‘얘야, 걱정하지 마라. 지금 난 이 곳에서 아주 편안하단다.’

산자락 어디선가 들려올 것만 같은 아버지의 음성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자식을 안심시키고 싶으신 아버지의 따뜻한 마음. 계절이 몇 번 바뀌고 자연의 경이로움을 새로이 느낄 때마다 이 아름다운 세상을 더 많이 둘러보지 못하시고 가신 아버지를 생각한다. ‘병상에 누워 계실 때 마지막으로 한번 당신을 부축해서 걷게 해드렸더라면······. 불쌍하신 아버지.’ 나는 예봉산을 오르며, 무엇이 그리 급하셨는지 어머니의 1주기도 되기 전에 뒤따라 떠나신 아버지를 생각해본다.

예봉산은 아버지의 유택이 모셔진 곳으로 아버지가 나고 자라신 검단산과 마주하고 있다. 예봉산과 검단산 사이에는 강이 흐르고 있다. 당신이 젊은 시절 뽕나무와 함께 열정을 담아왔던 여주·이천·가평 등지를 지나온 남한강과 북한강이 광주의 경안천과 함께 팔당호에 하나로 모였다가 이곳으로 흘러 들어온다. 아버지가 태어나시고 마지막 묻히신 두 산, 그 사이에 생명의 젖줄처럼 흐르는 강물은 그 옛날 아버지가 열정을 쏟았던 남양주를 돌아 내가 살고 있는 잠실 쪽으로 굽이쳐 흐르고 있다.

아버지의 일생과 맞물려 있는 두 산과 강을 내려다보며 나는 내 가족들, 특히 아들 딸과 후손들에게 아버지 삶의 이야기를 남겨주어야 한다고 다시 한 번 깊이 새겨본다. 아버지의 생애는 평생 동안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수행해 온 많은 공무원들 중 한사람으로 희미하게 기억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 아버지는 너무나 특별한 아버지였다. 평생 한가 지 신념만으로 살아오셨고 근검과 절약, 청렴한 정신을 온몸으로 가르쳐 주신 분이셨기 때문이다.

예봉산의 양지바른 산 중턱, 아버지의 유택 아래에는 단아한 자태로 서 있는 산뽕나무가 한 그루 있다. 당신과 뽕나무와의 소중한 인연을 하늘도 알아주셨다고 하시며 아버지가 무척 아끼시던 나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나는 그 인연의 나무 아래에 추모비를 세워드렸다.

“깨끗하게 살았노라! 그리고 열심히 살았노라!”

응급실 침상에서 내 손을 잡고 당신의 후회 없던 인생을 말씀하시던 아버지. 마치 지금 옆에 계셔서 또 한 번 나지막이 말씀하시는 듯 돌에 새긴 그 마지막 문구는 가을 햇살을 받아 환하게 빛나고 있다.

 

검단산 아랫마을 천현골

조선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내신 연원(連源) 할아버지께서는 퇴임 후 경기도 김포에 자리를 잡으셨다. 그후 우리 문중이 김포에서 광주로 이주해 정착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삼백여 년 전 숙종 시절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 좌승지로 추대되었던 량(량) 할아버지의 막내 아드님이셨던 8대조 약채(若采) 할아버지는 김포에서 한강을 거슬러 올라 배알미에서 광주 땅에 발을 내딛었고 검단산과 남한산성 산줄기 사이에 자리를 잡으셨다.

그 이후로 다시 6대, 2세기를 거쳐서 의양 할아버지는 검단산 아랫마을 맑은 샘이 솟는 천현골에 터전을 잡으시고 아버지를 비롯한 육남매를 낳으셨다. 아버지는 음력 1923년 11월 19일,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천현리(현 하남시 천현동)에서 육남매 중 다섯째이자 막내 아들로 태어나셨다.

일제의 수탈이 극에 달해 경제적으로 대부분 궁핍했던 1920년대와 1930년대에도 아버지는 비교적 큰 어려움 없던 집안에서 자라셨다. 그 당시 할아버지께서는 큰 부자는 아니셨지만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산과 논, 밭을 경작하시면서 소장사와 산판 사업을 벌이셨고, 동부면서기 및 구장(이장) 등을 맡아 하며 마을의 유지로 지내셨다.

일제 치하에서 마을의 크고 작은 일을 처리하는 이장으로서 관과 민을 중재하고 민심을 다독거리기 위해 할아버지가 겪어야 했던 심적 부담은 컸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인간의 도리를 항상 먼저 생각하셨고, 경제적으로 어렵고 힘이 없는 마을사람들 편에 서서 당신이 가진 것들을 이웃을 위해 함께 나누려고 애쓰던 분이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이렇듯 훌륭하신 인품을 지닌 할아버지 아래서 심씨 집안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며 자라셨다. 당신 생전에도 어린 시절을 회상하실 때, 머슴과 찬모들을 여럿 부렸으며 집안의 대소사가 있을 때면 어김없이 동네 장정들과 아낙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집안일들을 돕곤 했다고 하셨으니 천현골에서는 유복하고 덕망 있는 집안이었던 것 같다.

이러한 집안 분위기라면 아버지는 별로 부러울 것 없이 자라 철없는 생각이나 하면서 보냈을 법한데도 집안 어른들의 말씀에 따르면 어릴 때부터 무척 부지런하고 민첩했으며, 늘 무언가 쓸모 있는 일을 궁리하셨다고 한다. 아직 뼈가 여물지 않은 열한두 살 소년기에도 어른들을 따라 산에 가서 나뭇짐을 지고 내려온다거나 소여물을 끓이느라 외양간을 오가는 등 늘 분주하게 움직이셨다.

아버지의 왼손에는 커다랗게 흉터가 있다. 내가 열 살쯤 되었을까. 어느 날 팔을 걷어붙이고 열심히 정원을 가꾸시는 아버지에게 질문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 손은 어쩌다가 그러셨어요?”

“음, 이건 아주 어릴 때 소여물을 끓이다가 덴 자국이란다.”

“머슴이나 일꾼들도 많이 있었다고 하는데, 아버지가 직접 그런 일을 하셨어요?”

“사람은 늘 일을 해야 하는 거란다. 일하지 않으면 그날은 밥도 먹으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살아야지. 더구나 그 시절에는 어른이나 아이나, 또 주인이나 종이나 상관없이 누구나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또 모두들 그랬었지”

아버지는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주어진 환경에 안주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만이 진짜 사람 구실을 하는 거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삶의 철학은 이렇게 어릴 때부터 몸소 실행해 온 부지런함과 성실함에서부터 그 밑바탕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의 아버지는 무척 다부지고 영민했다고 한다. 인천에 사시는 막내 고모님 말씀에 의하면 개구쟁이 동네 아이들과 싸움이라도 붙을라치면 끝까지 이기고야 말겠다는 승부 근성 때문에 밑에 깔려도 절대 항복하는 법이 없었다고 하신다.

그렇게 옹골차게 유소년기를 보낸 아버지는 당시 4년제였던 상일보통학교를 마치고 5, 6학년 과정을 공부하기 위해 광주읍에 있는 광주보통학교(현 광주초등학교)로 옮기셨다. 학교까지는 왕복 80리 길이었는데, 눈이 오고 비가 내려도 게으름 한번 피우지 않고 열심히 학교를 다니셨다고 한다. 그 또래 아이로서는 대견한 일이기도 해서 동네 어른들이 “심씨 어르신 댁 막내아들이지? 참, 알토란 같구먼!” 하시며 볼 때마다 머리를 쓰다듬었다고 한다.

 

 

비범한 소년

광주초등학교를 다닐 무렵, 당시에는 주로 먼길을 통학하거나 통근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자전거는 아주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어느 날 자전거 체인이 고장나 자전거를 밀고 가면서 울상을 짓고 있는 중학생 형을 본 아버지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형을 돕겠다는 생각으로 다가가셨다.

“형, 그 자전거 어디가 고장났어요? 제가 한번 고쳐볼까요?”

아버지는 평소에 기계에 관심이 많아서 마을에서도 자전거를 유심히 보아왔고, 더러 고쳐본 적도 있었던 터였다. 곤란에 처한 사람을 그냥 보고 지나치지 못하는 당신의 타고난 성격 때문이었는지 아버지는 잘 알지 못하는 중학생 형에게 다가가 말을 건네며 민첩한 손놀림으로 자전거를 고쳐 주시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아버지를 본 중학생 형은 착하고 기특하다며 얼마간의 돈을 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아버지는 자신의 작은 수고가 이러한 대가로 나타나는 걸 보며 어린 마음에 무척 기쁘셨을 것이다. 그래서 그날 이후로 자전거가 고장 나 서 있는 걸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통학 길에서도 짬짬이 수리를 해주곤 하셨다. 사람들의 호응이 좋자 몇 개의 수리도구들을 갖고 다니며 자전거들을 고쳐주면서 아버지는 나름대로 노동의 성취감을 맛보셨던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아버지는 거기에서 얻는 작은 수입으로 학용품을 사서 쓰는 알뜰함도 보이셨다. 당신이 평생 가족들에게 말씀하셨던 자립심과 독립심, 그와 함께 몸에 익혀왔던 근검절약 정신의 일면을 깨닫게 하는 일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초등학교를 마칠 무렵, 할아버지의 산판 사업이 실패를 거듭하면서부터 가세는 점점 기울기 시작했다. 게다가 인정이 많으신 할아버지께서는 동네 사람들의 빚보증을 거절 못하고 선뜻 응해주셨는데, 그것들이 잘못되어 그 사람들의 빚마저 떠맡게 되면서 집안의 전답들이 하나둘 다른 이에게로 넘어가고 말았다.

아버지가 정규 학교인 서울의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게 된 이유도 그렇게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사리 분별이 정확하고 현실감각이 있어 또래 아이들과 달랐던 아버지는 상급학교가 있는 서울로의 진학을 포기하는 대신 광주공립농업실습학교로 당신의 인생 진로를 정하시게 되었다. 이곳에서 아버지는 농업의 근대화를 시작해야 하는 필요성을 인식하시게 되었다.

평생의 생업으로 삼게 될 잠업이라는 분야는 새로운 농업기술의 일환으로 당신에게 다가왔을 것이다. 또한 거기에서 당신의 일을 찾으리라는 결심도 이 시기에 싹트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아버지는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선생님으로부터 성실함과 근면함을 인정받으며 중학교 과정인 농업실습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시게 되었다.

무엇이든 끝까지 해내고야 마는 근성이 있는 아이에서 자전거 고치는 소년으로 그리고 나아가 집안의 형편을 생각해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미래를 꿈꾸는 청소년으로 성장해가면서 아버지는 당신 일생의 초년기를 야무지고 당차게 보내셨던 것이다.

 

 

고향 하늘 아래 공직의 출발

 

잠업의 길로

농업실습학교에서 이론과 실습을 통해 1940년대 당시 열악했던 농촌 실정을 절실히 체험한 아버지는 잠종업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하셨다. 그런 아버지를 유심히 보아온 학과 담당 선생님은 당시 소사(현 부천)에 있는 경기도 잠업강습소에서 구체적인 꿈을 펼쳐 볼 것을 권유했다. 잠업강습소는 누에씨 제조업자의 양성 목적으로 설립되어 1928년부터 각 도에 설치된 것으로 양잠에 대해 실험하고 연구하는 전문기관이었다.

경기도 관할의 1년제 교육기관인 잠업강습소에서 교육받으며 잠업이 보다 유망한 직종이 될 수 있음을 예견한 아버지는 그 이듬해부터 바로 경기도 원잠종제조소의 조수로 발탁되어 잠업과 관련해 첫 직업을 갖게 되셨다. 아버지는 잠업의 선구자적인 입장에서 우리 농가의 발전된 미래의 모습을 그려보며 당신의 입지를 펼칠 것을 다짐하시게 된 것이다.

1942년에서 1943년까지 근무했던 원잠종제조소의 조수직은 아버지의 공직생활의 시작이었다. 그 때 나이가 19세였고, 당신의 인생 진로를 어떻게 펼쳐 나가야할지를 본격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였다.

잠종업에 관심을 갖고 원잠종제조소의 조수로 열심히 근무하던 아버지는 광주군 서부면 면서기로 발령을 받아 정식으로 공무원 생활에 첫 발을 들여놓으시게 되었다. 그 때가 1943년 6월이었다. 광주 산골짝인 당신 고향마을을 잠업으로 활성화시키고 고향 발전을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일념을 갖고 있었던 아버지에게는 면서기라는 직책의 의미가 다른 사람과는 사뭇 달랐다.

생존해 계신 주위 분들의 말씀에 의하면 언제나 마을 주민들 입장에서 모든 사무를 처리했다고 한다. 마을 출장 시에는 일부러 시간을 내서 늘 농민들과 함께 어울리고 베틀작업이나 농사일도 거들며 관과 민이 가질 수 있는 거리감을 좁혀 나가셨다. 마을의 젊은 면서기로서의 싹싹함과 부지런함은 늘 주민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던 것이다.

한창 더운 여름 한철에는 면에서 직원들 몫으로 수박이 한 덩이씩 주어지곤 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 수박을 들고 서부면에서 동부면의 자택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마을 어르신들을 만나게 되면, 마치 친척 어른이라도 뵌 듯 반가이 다가가 인사를 드리고는 들고 있던 수박을 나눠 드시도록 자리를 마련하시곤 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아주 작은 것이라도 당신이 가진 것을 나누려고 하셨고, 주위사람에게 늘 인정을 베푸셨던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어둠이 깔린 뒤에야 산 넘어 동부면으로 귀가하곤 하셨다고 한다.

 

밀주 이야기

“따르릉······. 따르릉······.”

면에서 한참 오전 업무를 보던 아버지는 전화를 받고는 갑자기 긴장된 표정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으셨다. 그리고는 곧바로 하던 일을 덮어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자전거를 타고 마을로 쏜살같이 달려가셨다. 얼마 전 마을 출장을 나왔다가 우연히 김 노인 댁에서 밀주를 담그는 것을 보셨던 것이다.

아버지는 김 노인 댁 앞에 자전거를 세우더니 급히 대문을 두드려 안주인을 부르셨다. 김 노인 댁 아주머니는 심 서기가 여느 때와는 달리 숨이 턱에 차 헐떡거리며 달려오는 것을 보고는 놀라서 버선발로 뛰어 나왔다.

“무슨 일이 났나요?”

“예, 지금 관에서 밀주조사 나온다고 연락이 와서요.”

아주머니는 아버지 말을 듣자마자 즉시 안채로 들어가 하인들을 불러 모았고, 관에서 나와 조사할 경우를 대비해 재빨리 집안을 정리했다. 아버지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오후 무렵 밀주 조사반이 들이닥쳐 영락없이 서에 끌려가게 되거나 벌금을 물어야할 판이었다.

“에구, 정말 고맙구먼요······.”

김 노인 댁 안주인은 고마움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이 소식은 곧 은밀하게 마을 전체로 퍼졌고 관에서 나온 조사원들을 따돌릴 수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이렇게 알게 모르게 마을 주민들 편에 서서 많은 도움을 주셨다. 어찌 보면 관의 녹을 먹고 있는 사람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이지만, 아버지는 언제나 무엇이 주민들을 위해 옳은 행정인지 파악해 일을 처리하셨던 것이다.

비단 밀주 사건만이 아니라 일제 점령기에 터무니없는 만행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때마다 아버지의 세심한 배려와 재치로 위기를 모면했던 주민들은 아버지를 서부면의 청년 면서기로서 깊이 신뢰하게 되었던 것이다.

 

 

역사의 뒤안길

광주 산골짝에서 심씨 일가의 터전을 넓히며 살아가시던 할아버지는 1945년 향년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일제가 전쟁으로 발악하던 무렵인 음력 2월 27일, 봄을 시기하는 꽃샘바람이 산골마을에 불어 닥치던 때였다. 할아버지의 장례식은 온 마을 사람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치러졌다.

1945년 5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몇 달이 지나서 아버지는 제주도로 징용을 가시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아버지가 군대에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친부모나 형제처럼 애석해 했다고 한다. 그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은 우마차에 아버지를 태우고 광주에서 서울의 용산까지 먼 길을 걸어 배웅 나올 정도였다. 오랜 세월 마을 사람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베풀었던 할아버지와 면서기였던 아버지에 대한 신뢰와 감사의 표현이었으리라.

대동아전쟁으로 흉흉하던 그 당시에 징집되어 떠난다는 것은 언제 돌아올지, 과연 살아올 수나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집안에서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버지가 징병을 떠나시고 난 뒤 할머니와 형수님들께서는 날마다 정성을 들여 정화수를 떠놓고 아버지의 무사 귀환을 위해 빌고 또 비셨다. 그 기도 덕분인지 8월 15일 민족의 역사적인 광복을 맞자마자 아버지는 무사히 돌아오셨다.

아버지가 귀환할 당시 특이할 만한 일이 하나있다면 제주도에 징용으로 끌려가 있는 동안에도 얼마간의 돈까지 모아 오셨다는 점이다. 아버지는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 처해서도 스스로 자립해야 한다는 생각을 늘 염두에 두었고 어떤 이유로든 경제력이 중요하다는 걸 알고 계신 분이셨던 것이다. 힘든 여건 속에서도 악착같은 생활력을 보이셨고, 그것은 당신의 일평생을 아우르는 생활철학이 되었다.

광복이 되고 세상이 뒤바뀌자 일제시대에 상부에 잘 보이기 위해 각종 악행을 저지른 파렴치한 관료들은 주민들로부터 모진 보복을 당했다. 때로는 개인적인 원한까지 겹친 사람들에 의해 죽음에까지 이른 사람도 있었다. 그러한 보복이 두려워 도피해 숨어살거나 한밤중에 짐을 싸들고 몰래 그 마을을 떠나는 전직 관료들도 있었다.

아버지도 일제하에서 2년 여 동안 면서기를 하셨던 까닭에 당연히 그 대상에서 제외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밀주이야기를 비롯해 마을 사람들을 위해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 일하셨던 것이 인정되어, 오히려 마을 사람들이 직접 나서서 보호해 주었다고 한다. 관의 입장을 떠나 진정으로 주민들을 위해 일을 처리하셨던 것이 오래도록 기억되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그렇게 혼란의 시기를 무사히 보내고 다시 서부면에 복귀했고, 주민을 위해 더욱 열심히 봉사하시기 시작했다.

 

 

고향을 떠나 자립의 길로

 

홀로 서기

아버지는 광복 이후 일 년여 동안을 서부면에 더 근무하다가 그 당시 사람들이 별로 관심조차 갖지 않았던 잠업의 길로 당신의 진로를 정하시게 된다. 소사(현 부천)에 있는 경기도 잠업시험장에 발령받아 나가시게 된 것이다. 당신의 전공을 살려 잠업 일꾼들을 양성하는 지도자로서의 꿈을 펼칠 좋은 기회를 얻으신 것이다. 당신 인생에서 가장 오래도록 친분관계를 유지해온 잠업관련 후배들을 교육시키시게 되었던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1946년 7월, 소사에 있는 경기도 잠업시험장 기원으로 발령받자 아버지는 미래에 대한 꿈을 키우며 성실하게 청년기를 보냈던 고향 땅을 떠나셔야 했다. 어린 조카들의 양육을 생각해서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부친 몫의 땅을 두 분의 백부님께 고루 배분해 드리고 빈 몸으로 객지생활을 시작하셨다. 숟가락과 옷가지 몇 개만 들고 나와 오직 젊은 패기와 미래에 대한 자신감만으로 새 생활을 시작하신 것이다.

홀홀단신 고향을 떠나 단칸방에 세 들어 살면서 아버지는 새로운 부업거리를 물색하셨다. 퇴근 후 할 수 있는 일거리가 뭔가를 찾으셨다. 어느 날 아버지는 집 앞 공터에 적당한 자리를 보아두셨다가, 틈틈이 닭을 기르면 그 수입이 꽤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조그마하게 닭장을 지으셨다.

아버지는 그때그때 현실을 직시하고 뭔가 새로운 일을 계획하셨고, 일단 계획이 세워지면 순발력 있게 대처하는 능력이 남달랐던 분이셨다. 아침저녁으로 먹이를 주는 아버지의 손길도 점점 바빠지면서, 적은 돈이나마 차곡차곡 모이기 시작했다.

잠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위해 소사에 자리를 잡은 아버지는 잠종장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부업으로 양계를 시작하는 등 부지런하게 경제력을 키워 나가셨던 것이다. 무일푼으로 시작해 검소하고 성실하게 생활하면서 목돈이 모아지면, 고향에 있는 조카들에게 얼마간의 학비를 보내주는 등 가족들에 대한 배려 또한 잊지 않으셨다.

 

 

결혼이야기

소사에서 부지런히 일만하던 아버지를 보아온 고모님은 어느 날 중매를 할 테니 여자를 만나 보라고 알려 오셨다. 아버지는 당신 스스로가 결혼할 나이가 되었음을 잊을 정도로 당신이 정한 목표를 향해 열심히 일에만 매달려 왔던 터라 고모님의 제의에 조금 망설였다고 하신다.

어머니는 외할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외삼촌 아래서 성장한 수줍음 많은 처녀이셨다. 오래도록 어머니를 지켜보신 고모님이 순박한 어머니가 맘에 드셔서 어머니의 언니인 이모님께 매파를 보내 성사된 자리였다.

고모님의 적극적인 권유에 못 이겨 직장에서 잠시 시간을 내어 어머니를 만나러 나오신 아버지는 결혼이나 사랑의 감정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도 전에 어머니와 선을 보시게 된 것이었다. 맞선자리에서 아버지는 고개 숙인 채 다소곳이 앉아 있는 어머니 얼굴을 한번 보시고는, 이모님께 반지를 보내겠다는 말만 남기고 서둘러 직장으로 돌아가 일에 매진하셨다. 결혼상대를 결정하는 순간에도 당신에게는 일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그 후 혼례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한 달 뒤 어머니의 고향인 분원에서 아버지는 착하고 순종적이며 매사에 근면한 어머니를 아내로 맞이하여 결혼식을 올리셨다. 그때가 1948년 가을이었고 아버지는 25세, 어머니는 22세이셨다.

분원에서 초야를 치른 후 꽃가마를 탄 어머니는 조랑말을 탄 아버지와 함께 배알미를 거쳐 천현골로 시집오셨다. 아버지는 단 하룻밤 고향집에서 주무셨을 뿐 곧 단봇짐을 싸서 아내와 함께 소사로 돌아오셨다.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일 뿐이었다. 그 당시 잠업시험장에서 강습생으로 있던 김원기님은 아버님이 결혼하고 첫 살림을 차릴 무렵의 기억을 생생하게 말씀하신다.

“자네 선친은 참 대단한 분이셨어. 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철저하셨지. 결혼식 치르고 단 이틀 만에 서둘러 직장으로 복귀하셨다니까. 아버님이 단칸방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들어오시는 걸 내가 직접 뵙고 인사도 드렸지. 늦가을이었는데, 날씨가 차서 내가 아궁이에 불을 지펴드렸어. 수줍어하시던 새색시 시절의 어머님 모습이 눈앞에 선하군. 아버님은 잘 표현하지 않으셨지만 늘 순종하시던 어머님을 많이 사랑하셨지.”

아버지와 가장 가깝게 지내셨던 몇 분 중의 한 분이신 김원기님은 잠업시험장의 사감이자 교과목 선생님으로서 아버지를 처음 뵈었고 그후 잠업분야의 선배로서 동료로서 그 우정을 50 여년 지켜온 분이셨다. 아버지가 위독하셔서 병원에 계실 때도 자주 찾아오셔서 격려와 용기를 주셨다. 김원기님은 아버지 생전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몇 번씩이나 감회에 젖어 말씀을 잇지 못하셨다.

 

 

 

전쟁은 신혼의 꿈을 깨고

 

단칸방에서 시작한 신혼살림

아버지와 어머니는 결혼 이틀 만에 고향을 떠나와 잠업시험장 근처 단칸 셋방에 신혼살림을 차리셨다. 오직 ‘하면 된다.’는 꿈 하나만 갖고 밑바닥부터 시작한 두 분만의 보금자리였다. 아버지는 결혼 후,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더욱 열심히 일하셨고, 어머니 역시 부창부수(夫唱婦隨)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아버지의 생활철학에 맞춰 살림을 꾸려나가셨다. 총각시절 아버지의 양계장 일은 고스란히 어머니의 몫이 되었고, 어머니의 정성과 수고 덕분에 양계장은 조금씩 확장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자상하고 따뜻한 분이셨다. 잠업시험장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잠업의 활성화에 애 쓰시는 아버지 곁에서 50여명의 실습생들에게 틈틈이 간식거리를 만들어 주는 일을 손수 챙기셨다. 그렇게 어렵고 힘든 생활을 꾸려가면서도 학생들을 격려하며 지아비의 뜻을 받드셨던 것이다.

두 분의 성실함과 근면함은 서서히 좋은 결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소규모로 시작한 양계사업이 잘되어 제법 많은 닭들을 키우게 되었다. 부모님에게는 늘 고된 하루하루가 반복되는 신혼시절이었지만 그렇게 조금씩 일어서는 집안을 보며 누구보다 행복해 하셨을 것이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 가는 즐거움, 밑바닥에서 서서히 올라가는 기쁨은 느껴 본 사람만이 아는 거라고 말씀하곤 하셨다.

그러나 그러한 행복도 잠시였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1949년, 확장해 가던 양계장에 그만 큰불이 나고 말았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늘어나는 닭들을 보며 즐거워하던 두 분은 모든 것들이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되자 한동안 의욕마저 상실하셨다.

그러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가. 숟가락 하나로 시작한 객지에서의 삶이 아니던가. 실의에 빠진 어머니를 달래며 새로운 다짐을 하셨다. 모든 것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었다.

다시 양계장을 지어 닭을 키우고 새로이 소금장사에도 관심을 가지셨다. 어머니는 소래 염전에서 소금을 떼어 서울까지 가서 팔아오곤 하셨던 것이다. 아침에 눈을 떠서 밤중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두 분은 그렇게 부지런히 일만 하셨다. 모든 일을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어려운 가운데서도 작은 보람을 이루며 가정을 가꾸어 나가셨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민족의 비극이 터지고 말았으니 동족상잔의 포화는 모든 것을 또다시 고난의 시절로 돌리고 말았다.

 

하늘이 준 연분

북쪽에서 울리기 시작한 포성은 급기야 3일만에 서울로 이어져 내려왔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먼저 피난시키기 위해 서둘러 간단한 짐을 싸게 하셨다.

“곧 뒤따라가겠소. 대전까지만 가도 여기보다는 안전할 거요. 가서 만납시다!”

피난민들의 아우성 속에서 두려워 떨고 있는 아내를 겨우 달래서 남쪽으로 보내 놓고 아버지는 마지막까지 직장을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 애쓰고 계셨다. 잠업시험장의 주요 문서와 물품들을 땅속에 묻었고 차마 다 옮기지 못한 것들은 철캐비넷에 넣어 단단히 잠그셨다. 그러는 사이 북한군이 바로 코앞에 밀려들었고 아버지도 서둘러 피난민 대열에 합류하셔야만 했다.

남으로 남으로 피난민들과 함께 내려왔지만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어머니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 것인가. 결혼하자마자 온갖 모진 고생 다 시킨 아내에게 호강은 못시켜줄 망정 생이별의 아픔마저 안겨 주다니······. 아버지는 어머니를 찾기 위해 피난민 행렬을 헤집고 다니셨다.

한편, 젊은 새색시인 어머니는 포성소리에 깜짝깜짝 놀라면서 언제쯤 아버지가 내려올까 뒤돌아보며 피난 인파를 따라 무조건 남으로 내려가고 계셨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도 가족들과 함께 떠나는 사람들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면서 어머니는 혼자 눈물을 지으셨다.

그날도 어머니는 남편의 모습이 보이길 기대하며 북쪽만을 보고 계셨다. 충남 삽교천 다리에 다다르자 어머니는 아예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무작정 아버지를 기다리기로 하신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서 있다가 끝없이 내려오는 피난민 행렬 속에서 어머니는 아버지를 발견하셨다. 어머니는 가슴에 품고 있던 보따리를 흔들어대며 아버지를 향해 기뻐 소리치셨다.

“여보, 나예요 나!”

그 소리를 듣고서야 어머니를 발견한 아버지는 한걸음에 뛰어오셨다.

어머니는 반가운 마음에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아버지를 끌어안고 펑펑 눈물을 흘리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6·25때 있었던 이 일화를 생전에도 가끔 술회하곤 하셨다. 살면서 두분 사이에 언짢은 일이 있기라도 하면 그때의 감격적인 해후를 떠올리며 감정을 삭이셨다고 한다. 그때의 그 극적인 해후야말로 하늘이 두 분에게 준 가장 소중한 기억이었음을 어머니는 늘 생각하셨던 것이다.

1950년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었다는 발표가 나오자 부모님은 다시 신혼살림을 차렸던 소사로 돌아 오셨다. 그러나 결혼 후 몇 년 동안 이뤄왔던 자그마한 삶의 기반은 모두 사라진 뒤였다. 남은 것은 전쟁의 폐허로 흔들리는 암담한 현실 뿐, 모든 것들이 완전히 파괴된 상태에서 무엇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아버지는 그런 암울하고 참담한 시절 속에서도 한줄기 빛을 응시하며 당신이 해야 할 일을 오래오래 곰곰이 생각하셨다.

그렇게 1950년대의 서막이 오르고 있었다.

 

 

 

 

 

 

 

 

 

 

 

 

 

 

 

 

제 2장 달음박질로 내딛던 양주군 시절

 

 

전쟁의 폐허 속에서의 입지(立志)

 

 

막막한 세월

전쟁 발발 3개월 만에 고향을 찾았지만 이미 그곳은 예전의 고향이 아니었다. 남아 있는 것은 오로지 잿더미뿐이었다. 모든 것이 뽑혀지고 파괴된 도시, 북한군의 탱크가 한번 짓밟고 간 자리에는 도시뿐만 아니라 산과 들, 논 밭 어디 할 것 없이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유엔군은 북쪽으로 계속 진격해 승전보를 울리며 압록강까지 밀고 나갔지만 곧 다시 밀려 내려왔고, 국민들은 언제 다시 북한군이 밀려올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매일 반복되는 총성을 들으며 바짝 긴장해야만 했다. 지뢰와 폭탄이 논과 밭에 뒹굴었고 하루에도 수십 명씩 사고로 죽거나 상해를 당했다. 어디를 가든 폭발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고, 부모를 잃고 구걸을 하러 다니는 전쟁고아들로 시장통은 늘 북적댔다. 정치 또한 부패될 대로 부패되어 극도로 불안하기만 했던 시절이었다.

이런 참담한 상황 속에서 다시 시작하려는 아버지의 마음도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막막한 가운데서 당신의 일터였던 잠업시험장을 하나씩 복구해가며 무엇이 이 땅을 배고픔으로부터 구원해줄 것인가를 오랜 시간 고민하고 계셨다.

춥고 배고프고 극한 상황에 처해 있을수록 인간은 더욱더 생의 의지를 불태우는 법이다. ?그래. 희망을 갖자. 하면 된다. 하겠다는 의지만으로도 이미 반 이상 이룬 것이다.?

아버지는 절망 속에서도 조금씩 당신 인생의 빛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 계셨다.

 

포천군 시절

1951년 가을, 아버지는 잠업시험장 기원직을 마치고 포천군 산업과 잠업기사로 발령을 받으셨다. 일제강점 하에서 암울했던 36년, 약소국이라는 이유로 주변 강대국에 의해 이리저리 끌려 다니길 몇 년, 결국 이념논쟁에 놀아나 동족상잔의 비극으로까지 치달은 만신창이가 된 나라에서 아버지는 이 나라가 다시 일어나는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셨다.

?무엇이 어려운 우리 농가를 살릴 수 있을까??

아버지는 당신이 그 동안 공부하고 일해 온 잠업에 대해 보다 넓은 안목으로 생각하기 시작하셨다. 우리나라 기후와 풍토 조건은 잠업을 하기에 알맞아 예전부터 국가적으로 잠업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들어서도 여러 가지 잠업장려가 이어졌지만 보다 싼 노동력으로 누에고치수매를 하려는 의도였기 때문에 열심히 일해도 일본인들에 의해 착취당하다시피 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때까지 잠업에 대한 일반 농민들의 인식은 별로 좋지 않았다.

사람들은 잠업이 우리 농가에 부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잠업이 범국가적인 차원에서 보다 체계적으로 이뤄진다면 그 어떤 분야보다 빠른 시일 내에 농가에 활력을 가져올 것이라고 판단하셨다. 그래서 이런 당신의 생각을 농민들에게 알리는 데 주력하셨다.

모든 산업기반이 전무한 나라, 식량의 70%를 수입해야하는 가난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수출이 급선무였다. 그 수출의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잠업이었던 것이다. 잠업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누에의 사료가 되는 뽕나무를 심는 일이었다. 누에는 뽕잎을 먹고 자란다. 누에를 많이 길러 고치의 생산을 늘리려면 뽕나무를 많이 심는 길밖에 없었다. 포천군 잠업기사인 아버지의 가장 주된 임무는 많은 땅을 확보해 뽕잎의 생산을 늘리는 것이었다.

이미 폐허가 되다시피 한 가난했던 우리의 농가에서는 어느 누구도 무엇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허탈해 있는 상태였다. 아버지는 직접 농민들을 만나 뽕나무 심기를 설득하셨다. 그러나 황무지 민둥산에 뽕나무를 심어서 어떤 득을 보겠냐고 모두들 시큰둥할 뿐이었다. 노는 땅이 있으면 밭으로 개간해 당장 먹고 살아야할 농작물 짓기에도 손발이 달리는데, 뽕나무를 심을 여력이 어디 있냐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잠업에 대해 그 동안 배워오고 가르쳐온 내용들을 열심히 알리려 다니셨다. 양잠의 미래는 밝으니 무엇보다 뽕나무를 심어야 한다고 역설하셨다. 뽕나무에 대해서 무지한 사람들에게 논과 밭을 경작하지 말고 나무를 심으라니······. 어찌 보면 참으로 얼토당토 않는 얘기였으니 그런 아버지의 설득 작업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사람들은 오직 곡식 농사일에만 매달릴 뿐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포천군에 잠업기사로 있으면서 산골마을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뽕나무에 대한 지식을 전파하기 위해 뜀박질하셨다.

“앞으로는 뽕나무가 돈이 되는 시절이 옵니다. 뽕나무를 심어보세요!”

“글쎄······.”

“제 말을 믿으십시오. 믿고 심기만 하십시오! 절대로 후회하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가난과 전쟁의 후유증으로 민심까지 흉흉해졌던 터라 대부분의 농민들은 남의 말을 잘 믿으려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인사하며 다가가 안부를 묻곤 하면 반가워 맞이하던 사람들도 정작 뽕나무 얘기를 꺼내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외면하곤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확신에 찬 설득에 반신반의하면서 수긍하는 사람들, 뭔가를 해보겠다는 의욕을 가진 사람들도 있기는 했다.

아버지는 그러한 몇몇 적극적인 사람들을 모아 뽕나무에 대한 교육을 시켰다. 그리고 후배들과 함께 다른 농작물이 심겨질 자리에 한 그루라도 더 뽕나무를 심으려고 동분서주하니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였다.

그러면서 틈틈이 국가 4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 통과하셨다. 2년 여 동안 근무하던 포천군에서 양주군 산업과 잠업 지방농업기사로 발령되어 새로운 발판을 다지게 되셨던 것이다.

 

 

 

 

식상황금출(植桑黃金出)

 

양주군에서의 활약이 시작되다

전쟁이 끝나던 1953년 9월에 아버지는 양주군으로 옮기시어 당신의 활동영역은 더욱 넓고 활발해졌다. 이미 포천군 시절 산간 오지를 일일이 두 다리로 누비시면서 익힌 실무적 경험을 토대로 좀 더 적극적이고 짜임새 있는 농촌 계몽에 박차를 가하셨다. 뽕나무에 대해 전혀 지식이 없는 포천군민들이 당신의 설득에 보여준 관심을 경험했기에 양주 군민들도 설득할 수 있다는 자부심에 차 있었다. 그래서 날마다 군의 지도를 펴놓고 뽕나무밭을 넓힐 계획을 짜곤 하셨다.

그러나 평생을 쌀과 보리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던 농민들이 전망을 알 수 없는 뽕나무를 심기 위해 자신의 농작물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또한 뽕나무 묘목을 정부에서 싼값에 배분한다고 해도 선뜻 땅을 내놓는 사람도 없었다. 더욱이 노인들의 입장에서는 새파랗게 젊은 말단 공무원인 아버지의 말을 들을 리 없었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설득은 집요하게 이어졌다.

마을에는 아버지 못지않게 자신의 주관이 뚜렷하고 고집이 센 농민도 더러 있었다. 좋은 땅에 뽕나무 심기를 적극 권장하던 아버지는 당신의 권유가 일언지하에 무너지자 어느 날 난데없이 남의 보리밭을 갈아엎어 버렸다. 보리밭 주인은 쇠스랑을 들고 나와 아버지에게 대들 기세였다.

그도 그럴 것이 보릿고개가 있던 그 가난한 시절 막 파릇파릇한 새순이 올라오는 넓은 보리밭을 갈아엎었으니, 어디 말이나 될 법한가. 아버지는 부하직원과 밭주인이 보는 앞에서 보리를 갈아엎고 태연하게 뽕나무를 심으셨던 것이었다. 왜 아버지는 그 보리밭을 갈아엎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누에가 막 잠에서 깨기 시작할 때면 그 누에에게 뽕잎을 주어야 한다. 아무리 누에를 많이 키운다고 해도 정작 뽕나무가 없으면 누에 사육은 끝장이다. 그래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뽕나무였고 뽕나무를 키울 밭을 확보하는 게 급선무였던 것이다. 사람이 당장 먹을 보리보다 누에의 사료인 뽕잎을 키우는 게 앞날을 위해 우선해야 했다. 부가가치로 따지면 누에 사육이 훨씬 높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설득을 해도 ‘쇠귀에 경 읽기’ 식의 꽉 막힌 사람들은 쉽사리 이해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그 보리밭 주인과 감정의 골이 깊어지고 언성이 높아졌으나 불화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아버지는 일을 하다가 지도원들과 함께 농민들을 위한 술자리를 자주 갖곤 하셨다. 어울려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누에와 뽕나무에 대해 재미있는 일화들을 애기하거나 막걸리 한두 잔에 취기라도 오르면 그동안의 서먹했던 관계도 풀리고, 알게 모르게 우정 어린 눈빛이 오고 갔던 것이다.

그런데 보리밭을 갈아엎고 뽕나무를 심으면 더 많은 이익을 얻게 된다는 것을 이웃을 통해 늦게나마 알고 난 보리밭 주인은 농민들과 어우러져 술을 나누는 아버지를 보고도 그냥 외면하고 지나쳤다. 그런 보리밭 주인을 본 아버지는 당신 특유의 유머감각과 붙임성으로 막걸리와 잔을 들고 그에게 다가가셨다.

“날 아직도 못 본 체할 거요?”

“흠! 흠!”

“예까지 왔으니 일단 술이나 한 잔 받으시우. 아, 팔 떨어지니깐 빨리 받아욧.”

“······.”

“자, 이 술 먹고 힘내서 새해에도 그 자리에 보리를 심어보시우.”

“아니, 이 사람이······. 심으면 또 갈아엎게?”

아버지의 입심과 막걸리 한 잔에 그동안의 앙금은 눈 녹듯 사라졌고 오히려 아버지에 대한 신망이 두터워졌다. 그리고 술이 몇 잔 더 들어가고 나면 도리어 한술 더 거들기까지 했다.

“암암, 보리고 뭐고 다 갈아엎고 뽕나무를 심어야지.”

아무리 종은 의도였다고 해도 요즘 같은 시대라면 남의 밭을 맘대로 갈아엎는 것이 말이나 될 법한가.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명백한 사유재산 침해로 고발당할 것이다. 그러나 50년대에는 사정이 조금 다르기도 했을 것이다. 아니, 사정이 특별했다기보다는 항상 농민들에게 좀 더 큰 이익을 주기 위한 일이라면 순발력 있게 처신해 신뢰를 얻어온 아버지의 처세술 때문에 그러한 일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렇게 산과 들 구석구석 돌아다니면서 아버지는 그 마을 가가호소의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알 수 있을 정도였고, 한번 본 마을사람들 이름은 물론이고 누구의 몇째 아들이라는 것까지 다 기억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남의 밭을 갈아엎고도 막걸리 한 잔과 웃음 한 번에 신뢰를 다시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은 농민에 대한 깊은 애정이 은연중에 아버지에게서 풍겨져 나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식상황금출(植桑黃金出), 근면황금출(勤勉黃金出)

양주군에는 오지가 많았다. 군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오지를 찾아 헤매며 아버지는 당신의 열정을 불태웠다. 특히 아버지가 하신 일 중에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있다. 기동성을 살리기 위해 자전거를 구입하신 아버지는 손수 페인트 통을 자전거에 매달아 산간을 누비시면서 바위나 다리 같은 곳에 식상황금출(植桑黃金出)이라는 구호를 커다랗게 적어서 농민들에게 그 중요성을 역설하셨다.

이러한 구호는 알게 모르게 농민들의 의식에 젖어들었고, ‘뽕나무를 심으면 돈이 된다.’는 사실이 보다 분명하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당시 뽕나무를 심지 않았던 집 아이들은 상급학교에 갈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지만, 뽕나무를 심고 누에를 키우는 집에서는 중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의 교복이 정갈하게 걸려 있었다는 이야기는 뽕나무 심는 일이 농민들에게 얼마나 큰 소득이 되었는지를 입증하는 말이다.

공직에서의 성실함은 곧 집안에서의 근면함으로 이어졌다. 누구나 밥을 먹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했고 쌀 한 톨이라도 흘리는 날이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야말로 삶 전체가 성실과 절약으로 똘똘 뭉친 분이셨으니, 어찌 안과 밖이 따로 있으랴.

페인트 통을 들고 바위나 다리 난간에 식상황금출(植桑黃金出)을 적으면서 옷에 페인트를 묻히고 다셨으니, 집안이라고 가만 놓아둘 리 없었다. 재미있는 것은 쓰다 남은 페인트를 커다란 붓에 싹싹 묻혀서는 근면황금출(勤勉黃金出)이라는 구호를 양계장 입구에 큼지막하게 써놓은 것이다.

어머니도 아버지 못지않게 부지런하고 성실하신 분이셨다. 늘 뽕나무 식재에 정신이 없었던 아버지를 보면서 어머니는 어떻게 해서든 알뜰히 살림을 꾸리려고 애쓰셨다. 집안에서 틈틈이 닭들을 키우면서 삯바느질까지 하시는 등 손에서 일을 놓으신 적이 없으셨다. 아버지가 산간 오지를 헤매 다니며 농촌계몽을 하고 나무를 심는 등 하루 종일 몸으로 뛰실 때 어머니도 가정에서 끊임없이 노력하셨던 것이다.

아버지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퇴근하면서 미군부대 근처를 돌아보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 그 당시 미군부대 근처에는 멀쩡한 담요들이 더럽고 해졌다고 그냥 버려지곤 했다. 그 버려진 담요들을 아버지께서 주워 오시면 어머니는 밤새 발로 밟아 깨끗이 세탁해서 새 담요처럼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파셨다. 어머니는 그 두껍고 빨기 힘든 모포를 세탁하느라 허리가 휘어질 지경이었다. 그런 고되고 힘든 일들을 하는 동안 당신들의 신혼시절 가진 첫 아이가 불행하게도 유산되는 일이 생겼다. 결혼 6년만의 일이었다. 두 분은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그렇게 당신들의 몸을 돌보지 않고 열심히 앞만 보고 일을 하셨던 것이다.

 

자전거 부대

양주군 시절의 일화 중에는 특별한 것이 또 하나 있다. 아니 일화라 하기보다는 눈에 펼쳐진 아름다운 한 폭의 수채화라고나 할까.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관할구역 주민들의 세세한 면까지 모두 알 정도로 부지런히 움직이기 위해서는 자전거가 필수였다.

아버지는 그 당시에는 드물었을 기어가 달린 고급 자전거를 타고 다니셨다. 더 많은 오지를 다니려면 무엇보다도 좋은 자전거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자전거 사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으셨던 것이다.

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마을로 출장을 나가시면 그 뒤로 아버지 수하의 직원들도 자전거를 타고 길게 아버지를 따랐다고 한다. 그런데 이 모양이 기러기의 이동처럼 무리를 이뤄 농촌 길을 달렸다고 하니, 그 당시 논이나 밭에서 일하고 있던 농부들이 허리를 펴고 그 모습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을 만도 했을 것이다.

그 자전거 부대는 의정부에서 지금의 남양주 도농(都農)까지 뽕나무 묘목을 가득 실은 채 좁고 굽은 시골길 먼지를 일으키고 내를 건너 달려가 내팽개쳐진 그 너른 땅을 푸른 밭으로 바꾸어 갔다. 비단 도농뿐이었으랴. 아버지와 부대원들은 양주군 곳곳에 그 자전거로 농민의 희망과 당신들의 미래를 실어 나른 것이었다.

이렇게 자전거에 페인트 통을 싣고 산골 구석구석 달려가, 바위와 다리를 식상황금출이란 구호로 가득 메웠고 버려진 땅과 밭을 푸른 뽕잎으로 바꾸어 나갔다. 때로는 당신 홀로, 때로는 자전거 부대와 함께 내달리던 양주군은 잠업 증산의 모범이 되어, 경기도 타 군에서 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자전거부대의 활약을 시찰하기 위하여 잠업 종사자들이 모여들게 되었다.

아버지의 젊음과 꿈을 실어 날았던 그 자전거는 당신이 도청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어 의정부에서 미아리로 이사 오게 되었을 때도 소중한 재산으로 남겨지게 되었다. 그 후 아버지의 화려했던 도청시절과 고독한 농민으로 지내던 날까지 자전거는 광 속 한 켠에 자리한 채 당신의 삶과 오랜 세월 함께 했던 것이다.

잠업지도원으로 일하셨던 분들은 아버지의 양주군 시절을 회상하면서 그 자전거 부대야말로 아버지의 일생을 한 폭의 그림으로 묘사하는 가장 멋진 모습이었다고 말씀하셨다. 양주군 시절은 아버지 당신의 공직생활 중 가장 젊고 패기 있던 시절이었고, 불모의 땅에서 확신을 갖고 시작한 일의 성공을 예감했던 시기였다.

 

 

 

작은 기쁨들

 

첫딸

힘든 일들을 마다 않고 일하시던 어머니는 유산을 한 뒤 다시 어렵게 임신하자 건강에 각별히 유의했다. 그도 그럴 것이 결혼한 지 7년이 되어도 아이가 없었으니, 집안에서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 역시 아이에 대한 기대가 당연히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기대가 아버지만큼이나 했을까. 겉으로는 어머니에게 내색을 하지 않으셨지만 내심 같은 동년배들이 아들이나 딸아이의 손을 잡고 나들이 가는 것을 보면서 부러워 하셨을 것이다.

“그러다가 탈나겠어. 몸조심을 해야지."

언제나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고 집안일을 하시는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미군부대에서 구한 약까지 건네며 당부하셨다. 그러나 언제나 양계일과 집안 일로 바쁜 어머니가 임신으로 몸을 움츠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특히 군청 직원들이 집에 오는 날이면 어머니는 많은 사람들이 먹을 음식을 손수 만들어 내오시면서 뒷바라지를 다 하셨다. 입덧으로 심하게 고생하시던 어머니는 어느 날 저녁 모처럼 휴식을 얻은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투정 비슷한 것을 하셨다. 왠지 귤이 먹고 싶더라는 것이었다.

“그냥 그게 먹고 싶네요."

“······."

아버지는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당시 귤은 아주 귀한 과일이었다. 아버지는 그날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나가서 저녁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으셨다. 혹시나 군청 일로 나가셨나 싶어 여러 군데 수소문 해보았지만 다들 모른다고 했다. 아버지가 돌아오신 것은 그날 늦은 밤이었다.

“아니, 당신 저녁이나 먹긴 했어요?"

“응 난 먹었다. 자 받아라."

“아니 이건? 이걸 다 어디서 구하셨어요?"

아버지는 상기된 얼굴로 귤이 들어있는 봉지를 어머니에게 내미셨다. 어머니는 그 귤을 차마 먹을 수가 없어서 한동안 말없이 내려다 보셨다고 한다. 아마 어머니 일생에서 가장 달게 먹은 과일은 그 귤이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몇 달 뒤 어머니는 누나를 낳았다. 누나는 그렇게 귤처럼 단 아버지의 애정을 먹고 태어난 우리 집의 첫 딸이었다.

 

 

기다리던 득남

누나가 태어나고 3년 뒤 여름 어느 날이었다. 어머니는 둘째 아이를 가진 만삭의 몸으로 며칠 만에 출장에서 돌아오신 아버지의 출근 준비를 끝내고는 이른 아침부터 양계장을 둘러보고 계셨다. 닭 모이를 주려고 먹이통을 옮기려는 순간 갑자기 묵직한 기운이 느껴지셨다. 산기가 있자 어머니에게 내심 걱정이 앞섰다. 첫째아이와 달리 임신 내내 힘이 들었고, 첫 아이 때보다 몸이 훨씬 무거웠기 때문이다.

“오늘은 일찍 들어오세요. 아무래도······.”

어머니는 출근하시는 아버지를 향해 작은 소리로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그 말씀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하루 일과만을 골똘히 생각하면서 말없이 출근을 하셨다. 주위에서 어머니의 배를 보고는 아들일 거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고, 아버지 역시 내심 아들을 기다렸었기 때문에 출산 때에 함께 있어 주었으면 하는 간절함이 더욱 컸었던 것이다.

이날 저녁 아버지는 예정에 없던 일들이 새로이 더해졌기에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셨다. 아버지는 잠업계 직원들과 마을의 뽕나무 밭에서 고된 일을 끝내고, 다리 밑에서 거나하게 막걸리를 걸치고 계셨다고 한다. 연일 계속되는 오지 출장을 비롯한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면서도 그저 일이 좋아 스스로 찾아서 일하던 아버지가 아니셨던가. 그 고된 일과를 끝낸 저녁, 막걸리 한잔에 피로를 털어 내고 계셨던 것이다.

“자, 모두들 수고했네. 다들 퇴근들 하라구."

“아, 예."

하지만 퇴근하라는 상사의 말에 넙죽 퇴근 할 수 있겠는가. 부하 직원들은 아버지가 다리 밑에 몸을 뉘고 잠을 청하는 걸 보고 함께 누울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밤하늘의 총총 떠 있는 별을 보며 눈을 붙이고 새벽의 미명에 깨어서야 아버지는 뒤늦게 어머니 생각이 났다고 한다.

‘출근할 때 나 한테 뭐라고 한 것 같았는데······.’

아버지는 어머니가 한 번 유산한 경험이 있었던 터라 내심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추진하고 있던 일이 눈앞에 산적해 있는데 다 집어던지고 집으로 달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어머니 걱정을 하면서도 마음 한 켠에 묻어두고는 결국 며칠 동안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바쁘게 일을 하셔야만 했다.

아버지는 며칠 만에 겨우 일을 끝마치고 집에 들어왔는데, 이미 아내는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해산한 후였고, 그 아이가 바로 나였다. 아버지는 나를 안고 첫 아들을 얻은 기쁨으로 큰 소리로 웃으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렇게 기다리던 아들이 태어나는 순간에도 함께 계시지 못할 정도로 일에만 당신의 모든 열정을 쏟은 분이셨다.

 

 

무(無)에서 유(有)로

아버지는 자립심이 강했고 경제력을 키우고 지키는 데에도 남들과 다르신 분이셨다. 외삼촌이 버스사업을 하던 마장동 부근의 폐가를 아주 헐값으로 구입하신 적이 있었다. 누가 봐도 낡고 헐어서 재산 가치라고는 거의 없는 집이었다. 구들이 꺼지고 벽이 무너지고 지붕도 새는, 금방이라도 귀신이 나올 것 같은 말 그대로 폐가였다.

아버지는 직장을 다니면서도 틈틈이 시간을 내어 손수 집수리를 하거나 더러 기술자들을 불러 조금씩 폐가를 고치기 시작하셨다. 그러자 얼마 안 있어 번듯한 집이 되었고 아버지는 많은 차익을 남기고 그 집을 되팔았다. 이 돈은 의정부에 대지 57평 건평18평의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루는데 사용되었다. 아버지는 그 폐가를 새집으로 만들어 파시면서 당신 생애의 최초의 집을 장만하신 것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아버지의 능력은 우리 집안의 경제적인 기반을 바로 세울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또한 아버지는 양계로 번 돈과 어려운 박봉을 쪼개고 쪼개서 마련한 돈으로 부서진 군용 지프차나 포차의 고철들을 펴서 샤시를 달아 얹은 중고 버스를 구입하셨다. 물론 관리는 버스 운수업을 하고 있던 외삼촌이 하셨지만, 가난한 살림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라면 그 무엇이라도 그냥 지나치거나 버려두지 않으셨다. 이재(理財)의 근본적인 길은 부지런함과 검소함에 있다는 생활지침을 지켜가면서 아버지는 소박한 방법으로 당신의 가정을 위해 돈을 모으신 것이다. 행복한 미래를 위해 이렇게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나가셨다.

남달리 부지런하고 당신이 추진한 일에 대해서는 끝장을 보고야 말 정도로 집념이 강했던 아버지는 그렇게 근검절약을 통해 재산을 모아 오셨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아버지가 그 시절 내딛었던 삶의 방향은 농촌에 부를 안겨 줄 뽕나무 밭을 넓히는 것이었다.

수많은 농민들과 부딪치고 대화하며 가난이 뭔가를 직접 피부로 느끼면서 우리 농가의 소득증대를 위해 손발이 부르트도록 일하고 또 일하신 분이셨다. 잠업에 대한 좋은 자료가 있다면 어디든 달려갔고 좋은 재원을 확보할 수 있다면 자신의 안위까지도 던져서라도 결재를 받아내고야 마는 성격이셨다.

이렇듯 농촌계몽을 위한 피나는 노력을 펼친 결과 아버지의 활약은 1960년 대통령이 수여한 면려포장증, 1962년 우량 공무원표창과 잠업장려 공로상 등을 받으며 눈부신 결실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 시기는 곧 있을 도청시절의 많은 꿈들을 이룰 밑바탕이 다져진 시기였던 것이다.

각종 표창장들을 받으며 아버지는 잠업계에서 큰 일꾼으로 성큼 발을 내딛으셨다. 지금도 오랜 세월 우정을 지켜 오셨던 잠업관련 분야의 어르신들께 여쭤보면 이구동성으로 말씀하신다. 그 당시 아버지의 신념과 추진력은 참으로 대단했었다고.

 

 

 

 

 

 

 

 

 

 

 

 

 

 

 

 

 

 

 

 

 

 

 

 

 

 

 

 

 

 

 

 

 

 

 

 

제 3장. 화려한 꽃을 피우며 (도청 시절)

 

 

독일병정의 등장

 

박정희와 경제 재건

1961년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인들이 반공과 부패, 부정의 일소 및 국가 재건을 내세우며 새로이 정권을 장악한 이른바 5.16 군사혁명이 일어났다. 박정희는 국민들로부터 혁명의 당위성을 인정받기 위해 경제재건을 최우선 과제로 두었다. 전통적인 농업국가이면서도 국민들이 먹고 살아야 할 식량조차 1년에 약 2백만에서 3백만 톤씩 수입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정도로 가난한 나라였다.

박정희의 정치적 신념은 확고부동했다. 국가와 민족을 살리는 길은 먼저 지독한 가난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통치자가 해야 할 가장 큰 과제는 경제건설이었다. 식량의 자급자족조차도 어려운 나라, 박정희 장군은 가진 것은 농토와 노동력밖에 없는 당시 실정에서 수출산업으로 부가가치가 높은 잠업에 대해 대단한 열의를 표명했고, 잠업증산을 위한 청사진을 펼쳐나갔다.

국가 통치자의 강력한 의지 아래 1962년부터 1966년까지 제 1차 잠업증산 5개년 계획이 수립되었고 정부에서는 경제적으로 변혁시킬 수 있는 강인한 성품을 가진 지도자들을 필요로 했다. 박정희 장군은 각 도지사들을 모아놓고 그런 인물들이 시급하다는 것을 주지시켰다. 당시 경기도지사였던 박태원 육군준장은 이러한 통치자의 의지를 수행할 수 있는 인재를 찾고 있었다. 산업기반이 전무한 경기도의 경제를 회생시킬 수 있는 잠업에 탁월한 식견을 갖춘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때 박태원 도지사가 떠올린 인물이 바로 양주군에서 활약하고 있는 아버지였다. 아버지와 50여 년의 우정을 쌓아 오셨던 안성의 김창환님의 말씀에 의하면 박태원 도지사는 농촌 곳곳을 발로 뛰었던 아버지의 활약을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박정희 장군의 국가 정책을 제대로 수행할 적절한 인재를 찾던 중 젊은 일꾼 심계택을 주목했고 도청에서 함께 일할 재원임을 점찍었던 것이다.

잠업계에서 일하셨던 아버지의 친구와 동료 분들은 그 당시의 아버지 모습을 박정희 대통령과 자주 견주곤 하셨다. 자그마한 키에 옹골찬 외모나 카리스마적인 눈빛 등도 그러하거니와 한번 결정한 일에 대한 과감한 추진력과 확고부동한 신념, 경제부흥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유능한 잠업일꾼을 찾던 박태원 도지사의 눈에 아버지의 모습도 그렇게 비쳤던 것일까. 도지사와의 이러한 인연의 출발은 아버지 인생의 화려한 꽃을 피울 도청시절을 예고하는 전주곡과도 같은 것이었다.

 

 

양주군에서 경기도청으로 - 일취월장(日就月將)

당시 양주군에 있던 아버지는 각종 공로상과 표창장을 받으면서 크게 고무되셨고, 양주군의 산간 오지까지 종횡무진으로 활약하고 계셨다. 일개 군의 계장이었지만 그 업적은 주변에서 꽤 알려졌고 몇 차례 표창을 받고 나자 잠업계의 큰 일꾼임을 누구나 인정하고 있었던 터였다.

어느 날 뽕나무 월동준비로 며칠씩 출장을 나가셨던 아버지가 몇 가지 행정처리 문제로 오랜만에 군청에 들어서자 사무실 직원이 반갑게 메모 한 장을 전해주었다. 경기도청에 한번 다녀가라는 상부의 지시가 담긴 메모였다. 마침 경기도청 식산국 농무과 잠업계장이 군수로 발령되어 나가는 바람에 잠업계장 자리가 공석이었고, 그 자리에 서울대 농대 잠업과 출신인 서기석님이 임시로 대행 업무를 맡고 있는 중이었다.

아버지는 당신의 앞길이 어떻게 펼쳐질지 전혀 예상치도 못하신 채 메모 한 장을 들고 당시 서울 중앙청 앞에 있던 경기도청으로 향하셨다.

식산국 농무과 사무실로 들어서자 사무실 여직원은 점퍼에 모자를 쓴 허름한 단고바지 차림의 아버지를 보더니 어디에서 왔느냐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물었다.

“예, 양주군에서 온 심계택이라고 합니다. 상부에서 들리라고 해서 왔습니다.”

여직원은 소파 구석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앉으라고 하고는 국장실로 전화를 했다. 아버지는 인사를 하고 소파에 앉아 묵묵히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전화를 걸던 여직원은 갑자기 얼굴이 벌개져서 벌떡 일어서더니 공손히 아버지를 산업국 국장실로 안내했다. 아버지는 국장실에서 다시 도지사실로 안내되었고 면담을 마친 후 누군가의 안내를 받아 경기도청의 이곳저곳을 살펴본 뒤 집으로 돌아가셨다.

포천군과 양주군에서의 아버지 활동을 잘 알고 있던 박태원 도지사님은 아버지를 면담하면서 양잠과 뽕나무 식재에 대한 실무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또한 가난한 농민들을 위해 얼마만큼의 애정을 갖고 있으며 그들과 어떻게 협력하며 성공적으로 잠업을 활성화시킬 것인지를 살펴보았던 것이다.

1962년 12월, 아버지는 경기도청 산업국 농무과 잠업 지방농업기사로 정식 발령을 받아 도청에서 근무하게 되셨다. 도청의 농무과 직원들 중에는 서울대 농대 출신의 인재들이 대거 투입되어 있던 시절이었다. 오래도록 농무과에서 근무해온 좋은 학력의 인재들을 제치고 농업실습학교 출신에 불과한 양주군의 잠업계장인 아버지가 도청의 계장급으로 발령 받았다는 것은 상당히 획기적인 인사였다.

거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포천군과 양주군에서 잠업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밤낮으로 뛰면서 뽕나무밭을 넓혀가던 아버지는 이제 경기도 전 지역을 향해 힘찬 행보를 펼칠 위치에 서게 되셨다. 아버지 일생의 가장 화려한 꽃을 피워낸 도청시절이 마침내 시작되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양주군에서의 활약을 발판 삼아 경기도 전역을 바라보는 커다란 계획을 세우셨고 차근차근 실행에 옮기셨다. 넓다고 생각한 양주군이었지만 경기도 전체에 비하면 양주군은 작은 지역일 뿐이었다. 양주군뿐만 아니라 가평군, 여주군, 이천군, 광주군 곳곳이 이제는 당신의 앞마당이 된 것이었다.

양주군의 너른 논길을 달리던 아버지의 자전거는 관용 지프차로 바뀌었고, 아버지는 한층 더 빠른 기동력으로 경기도 전 지역을 시찰하실 수 있었다. 구석구석 그 지역의 지형을 훤히 꿰뚫어야 했고, 어느 지역의 어느 땅이 기름지며 어디가 어떻게 황폐하다는 것을 자세히 알고 있어야 했다.

도청에 온 이후로도 마을마다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누에고치가 농가소득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리려 애쓰셨고, 누에를 기르기 위해서 농가에서 먼저 해야 할 것이 뽕나무 식재라는 사실을 강조하셨다. 그렇게 몸으로 부닥치며 농민들을 설득하고 뽕나무에 대한 교육을 하면서 하나씩 둘씩 눈에 보이는 결과들을 농가에 선사하셨던 것이다. 농민들의 반신반의하던 태도는 바뀌었고, 잠업이야말로 가난한 우리 농가를 살릴 것이라는 사실을 차츰차츰 인식해가기 시작했다.

 

‘독일병정’ 나타나다.

아버지는 책상에 앉아서 잠업관련 도표나 식재 현황 차트를 뒤적이며 업무를 지시하는 탁상행정을 용납하지 않는 분이셨다. 현장에서 직접 농민들을 교육하고 뽕나무 심는 법에 대해 실습을 통해 직접 눈으로 확인 시켜주는 등, 궂은 일을 가리지 않고 솔선수범하셨다. 따라서 직접 지도원들을 모아 실무교육을 하고 농민들과 일대일로 대면해 하나하나 식재와 양잠에 대해 깨우쳐 주는 과정에서 아버지는 유난히 엄하고 까다로우며 고집스러운 면들을 많이 보이셨다.

그래서 지도원들과 농민들, 젊은이나 노인 할 것 없이 아버지를 원칙 위주의 매우 무서운 분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실제로 아버지가 한번 하겠노라고 결정한 일은 누가 뭐라고 하든 기필코 해내셨고, 부하직원들을 혹독하게 훈련시켜 일을 완수해내도록 하고야 마는 강한 추진력과 집념이 있었다. 때로는 그런 아버지 밑에서 일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기에 여기저기서 불만들이 많았지만, 불가능할 것 같은 일들이 흡족한 결과로 이어지는 것들을 보고 모두들 보람을 느끼곤 했다.

아버지는 오직 일밖에 모르셨다. 일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욕심이 많으셨고, 삶이란 일로 시작해서 일로 꽃피우고 일로 열매 맺는 것이라는 생각만으로 젊은 시절을 보냈던 분이셨다. 한번 가능성이 보인다고 판단하면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안 될 거라고 여겨지는 일도 될 때까지 신념을 굽히지 않고 기필코 해내고야 마셨다.

어느 날 식재 현장에 새로 투입된 젊은 지도원이 제 시간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자 시간관념이 없다며 아버지는 크게 화를 내며 벼르고 계셨다. 뒤늦게 나타난 지도원은 말쑥한 양복에 구두차림으로 서서 아버지께 인사를 했다. 콧등에 땀을 흘리며 열심히 땅을 고르고 삽질을 하던 아버지는 부하직원을 보자 당장 그 옷을 벗어버리라고 호통을 치셨다.

“뭐하다 온 녀석이냐? 정신상태가 썩었어.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도 마라!”

얼굴이 벌개 진 채 당황해 하고 있는 지도원을 보며 아버지는 당장 잠업 일을 때려치우라고 잘라 말하셨다. 아버지는 다시 나무 심을 자리를 고르며 다른 지도원들에게 서둘러 다음 일을 지시하셨다. 얼이 빠져 있던 신입 지도원은 그 즉시 돌아가 간편복으로 갈아입고 돌아왔지만 그에게는 한동안 눈길도 주지 않으셨다. 그 정도로 아버지는 일할 자세가 되어 있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는 차갑고 매몰차게 대하셨다.

“농민의 일을 내 일처럼 하자면 내가 농민이 되어야 해! 공직에 앉아 나랏일을 한다면서 그저 입으로만 떠벌리는 놈들은 필요 없어. 이 시대에 진짜 필요한 사람은 온몸을 던져 나라의 경제를 일으킬 사람이야. 옷차림을 보면 그놈이 뭘 생각하며 다니는지 벌써 알 수 있지.”

아버지의 곧고 강직한 성격은 종종 혹독한 꾸지람으로 나타났는데, 사소한 일 하나라도 당신의 지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그것이 될 때까지 다그치고 윽박질렀다. 그래서 부하직원들로부터 적잖은 불만을 사기도 했을 정도로 완고하셨다. 처음부터 아닌 것은 끝까지 아니었다. 사시사철 점퍼차림으로 다니며 당신과 같은 마음자세로 모든 지도원과 직원들이 함께 뛰어주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게으르고 자신의 몸을 사리는 사람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아버지의 별명은 어딜 가나 무서운 ‘독일병정’으로 통했다. 도청에서 어느 군으로 출장 나간다고 하면 벌써 그 지역의 잠업관련 공무원들과 지도원들은 아침부터 일들을 다시 점검하느라 진땀을 빼곤 했다. 혹시 전에 지시 받았던 것들 중에 미처 처리하지 못한 것이 있는지 노심초사 긴장했던 것이다.

지프차를 몰고 군으로 시찰을 가면서 아버지는 군청에 들러 직원들을 만나는 것보다도 논두렁 밭두렁에서 농민들과 먼저 인사를 나누는 일에 우선을 두셨다. 농민들과 안면을 트고 그 군의 식재 상황을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나서야 군청에 들어가셨다. 그러니 군 직원들이 꾀를 내어 눈에 보이는 일들만 대충 처리하거나 주먹구구식으로 일하는 것은 처음부터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지난 번 시찰 때 지적했던 일들이 보완되지 않거나 심혈을 기울여 계획해 둔 일들이 제대로 추진되지 못했으면 그 자리에서 불호령이 떨어졌다.

아버지는 지도원들에게도 무섭게 대하셨다. 물론 지도원들의 지시에 따라 함께 일하는 농가의 주민들도 그런 아버지를 무서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일 하나만은 똑 부러지게 해 내셨으므로 아무리 귀찮고 무섭더라도 아버지가 하는 일에 대해 별다른 불만을 제기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완고함이 완고함 그 자체로 끝났다면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따르며 협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매사에 정확한 분이셨지만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인간적인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일단 당신의 품안에 들어온 부하직원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끝까지 적극적으로 밀어주셨다. 장래성이 보이는 근면하고 성실한 사람을 유심히 보아 두었다가 다른 사람 보다 더 혹독하게 훈련시키셨다. 그 훈련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버지에게서 멀어지기도 했지만, 아버지의 속 깊은 정을 아는 사람은 결코 당신 곁을 떠나지 않았다. 당신의 의리와 인정은 쉽게 끓고 쉽게 식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독일병정’이라는 당신의 별명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이름을 통해 사람들이 긴장하며 더 열심히 일할 수 있게 된다는 것에 의미를 두셨다. 당신의 이미지가 괴팍하다거나 고집이 세다거나 하는 세상의 평판들에 개의치 않았다. 열심히 일하는 우리 농민들이 당신을 통해서 보다 나은 미래를 꿈꾸며 하루하루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보람이었다.

“독일 병정 나타났다!”

단고바지를 입고 농구화를 신은 작은 체구의 아버지가 보무도 당당하게 논두렁을 걸어오는 걸 보면 농부들은 일손을 멈추고 그렇게 서로 소리쳤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오히려 손을 높이 흔들며 “나, 독일 병정. 심계택이요!” 하면서 웃음으로 답하셨고, 농민들도 그런 아버지의 여유로움을 알고 더불어 반가움을 표시하곤 했다.

아버지는 일을 사랑하고 일을 통해 인생의 참 의미를 찾아가는 순박한 농민들을 언제나 존경하셨다. 가난한 농민들을 위해 어떻게 하면 좀 더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을까 늘 고심하셨고, 맹렬한 독일병정이 되어 확고한 신념을 갖고 일하셨던 것이다. ‘독일병정 심계택!’ 아버지는 당신 인생의 멋진 꽃을 피우기 위해 그렇게 힘차게 달려가고 계셨다.

 

 

 

잠업의 부흥

 

잠업과의 신설

박정희 대통령의 제 1차 잠업 증산 5개년 계획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추진되면서 점점 그 효과가 눈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잠업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던 농가에서조차 다투어 누에고치를 기르겠다며 나섰고, 따라서 뽕나무밭도 점점 늘어갔다. 독일병정으로 불리면서까지 열심히 뽕나무 식재에 심혈을 기울이셨던 아버지의 집념이 경제부흥을 추진하는 정부의 정책과 맞아 떨어졌고 또한 농민에게는 구체적인 농가소득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아버지의 뽕나무에 대한 집념과 잠업활성화의 노력은 도청으로 온지 3년만인 1965년 12월, 내무부장관 표창장으로 그 공로를 인정받으셨다. 지도원들과 농민들, 잠업에 관련된 모든 분야의 사람들로부터 더 많은 신뢰를 얻게 된 아버지는 이로써 높은 추진력으로 당신의 일들을 더욱 발 빠르게 진행하실 수 있었다.

아버지는 뽕나무 식재를 통해 꾸준히 당신의 기반을 확장하면서도 안으로 내실을 기하기 위하여 고단한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나서도 늘 손에 책을 들고 진급시험을 준비하셨고, 1966년 4월에는 공무원 3급 특별 승진 시험에 합격하여 농산과 잠정계장으로 직급을 새로이 받게 되었다.

잠업계장으로서 관련된 모든 일들을 처리해 나가면서 아버지는 경기도 전체를 담당하기에는 잠업계만으로는 그 체제가 미흡하다는 생각을 하시기에 이르렀다. 당신의 생각으로는 어느 정도의 강력한 행정력이 뒷받침해줘야 대통령이 추진하는 잠업증산 5개년 계획이 보다 차질 없이 진행될 것이라고 생각하셨다.

어느 날 저녁, 아버지는 지금이야말로 잠업과가 필요한 시기가 아니냐고 후배인 서기석님에게 물었다. 서기석님도 아버지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동의해 주셨고, 이에 아버지는 힘을 얻어 도지사에게 면담을 요청하셨다.

도지사도 현재 진행되어지고 있는 잠업의 중요성을 감안해 그 필요성을 알고 있었지만, 막상 중앙정부차원에서의 허락이 쉽게 이루어질 것 같지 않기에 다소 망설이게 되었다.

“도지사님, 그 문제는 제가 한번 추진해 보겠습니다. 몇몇 직원과 함께 면밀하게 제안서를 만들어 내무부로 찾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도지사는 그 누구보다 아버지의 추진력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독려를 아끼지 않았다. 아버지는 도지사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후배 서기석 씨와 함께 잠업과 신설에 관계된 시안을 작성해 당시 내무부 행정계장으로 있던 고건(현 서울시장)씨를 찾아갔다. 물론 아버지의 확실하고 당찬 소견서와 경기도 잠업계를 총 지휘하고 있는 행정 책임자로서의 의지가 확고하게 전달되었음은 당연한 것이리라.

아버지의 몇 차례에 걸친 끈질긴 설득과 탁월한 추진력 덕분에 내무부 행정계장으로부터 잠업과 설립의 당위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결국 1966년 12월 12일 잠업계에서 잠업과로 부서가 확대되었고, 이에 아버지는 경기도청의 잠업과 초대 과장으로 선임되어, 더 높은 긍지와 소신을 갖고 도의 잠업을 활성화하기 위하여 더욱 일에 매진하실 수 있게 되었다.

우리나라 잠업의 최전성기를 이끌어 가신 아버지는 놀라운 행정력과 추진력, 농민에 대한 남다른 애정, 타고난 부지런함과 검소함을 두루 갖춘 명실 공히 모범공무원으로 그 누구에게나 귀감이 되신 분이셨다.

오랜 지기였던 김창환 회장님은 아버지를 회상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즘 공무원들이 자네 아버님 같은 마음가짐으로 일한다면 우리나라는 아마 선진 어느 국가 부럽지 않은 최고의 나라가 될 걸세. 자네 아버님 같은 분은 내 평생 동안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어.”

 

 

보다 넓은 안목으로

열심히 일한 만큼 정직하게 결실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양잠이었다. 일한 만큼 수입을 고스란히 손안에 넣는다는 것처럼 좋은 것은 없으리라. 잠업은 식량의 자급자족조차 어려웠던 우리 농가를 부유하게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달러를 벌어들일 수 있는 몇 안 되는 분야로서 60년대 경제재건을 위한 일등공신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잠업은 잠종업, 양잠업, 제사업 등 그 분야가 다양했다. 무엇보다도 이 관련 분야의 모든 것들이 원활하게 움직이려면 양잠이 가장 기초적인 분야였고, 양잠의 규모를 늘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뽕나무를 심는 것이 중요했다.

아버지는 뽕나무야말로 우리나라의 미래를 밝혀줄 등불이라고 확신하셨다. 공무원으로서의 투철한 국가관 없이는 이렇게 당신의 몸을 사리지 않고 헌신적으로 일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잠업이 점차 우리나라 수출 부문에 있어서 효자 노릇을 하게 된 것은 이런 아버지의 소명의식과 일선에서 헌신적으로 함께 해준 지도원들, 부지런한 농민들 덕택이었다.

잠업과가 신설되기 전인 1964년 10월 아버지는 일본 잠업인들의 초청으로 일본 산업시찰을 다녀오셨다. 그 동안 잠업에 대해서는 많은 지식이 있다고 자부했었지만 일본에 다녀오고 나서 우리의 잠업수준은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셨다.

아버지는 처음부터 실무교육을 철저하게 배우고 익히며 몸으로 실습해 온 실무 위주의 잠업인이셨다. 그러나 일본에 다녀오신 후에는 그러한 탄탄한 실무 능력도 철저한 이론이 없이는 더 발전적으로 이어 나가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으셨다. 그래서 일본 산업시찰 이후, 우물 안 개구리식의 잠업관을 벗어나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하셨다.

새로운 잠업기술을 받아들이기 위해 일본에서 쓰여 진 관련 서적들을 뒤져가며 부지런히 공부하셨고, 기술서적을 번역하고 책으로 출판하는 일에도 관여하셨다. 직접 카메라를 구입해 누에가 고치로 변하는 과정을 촬영해서 스크랩하고 뽕나무가 보다 많은 잎들을 맺도록 가지치기를 잘하는 방법 등도 연구하셨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관련 자료들을 슬라이드로 만들어 그때그때 치밀하게 정리를 해두셨고, 언제 어디서든 시간이 날 때마다 메모를 하고 확인, 재확인을 거치는 등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이셨다.

재래종 뽕나무에만 기대어 잠업 부흥을 일으킨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새로운 품종의 뽕나무가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에서 최신 우량 품종의 상묘(桑苗)를 수입하여 시범적으로 몇 군데에 심어 본 뒤 우리의 토양과 얼마나 맞는지 경과를 살피는 일이 우선 되어야 했다.

또한 정부에서 묘목 수입이 결정되면 아버지는 타 지역보다 더 싼 가격에 더 많은 묘목을 구입하기 위해 남들보다 더 바쁘게 움직이셨다. 기왕이면 타 지역과의 경쟁에서 이겨 보다 많은 이윤을 관할 구역의 농민들에게 전하기 위해 좋은 묘목을 가져오려 애쓰셨다.

 

 

잠업지도원 제도의 강화

잠업증산 5개년 계획이 추진될 당시 정부는 대규모로 잠업지도원을 육성했다. 이러한 정부정책에 맞춰 아버지는 우리 농가의 건강한 생각을 가진 젊은 사람들을 눈여겨보았다가 잠업지도원으로 이끌어 주었고, 그들을 모아 정기적으로 철저히 교육시켰다. 보다 많은 농민들에게 양질의 고치를 생산하는 법을 알리기 위해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을 개발하며 기존의 잠업지도원 제도를 더욱 강화시킨 것이었다.

실질적으로 누에씨 품종 개량이나 그 밖의 뽕나무 식재에 관한 것들을 교육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이 농민들을 직접 만나 어떻게 계몽시켜야 하는지에 관한 대 농민 계몽교육까지도 맡아하셨다. 관과 민을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 잠업지도원이며 그들의 역할이 잠업발전에 얼마나 중요한지 늘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곤 하셨던 것이다.

또한 일을 하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인간관계라는 것을 알리셨고, 의리와 우정,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교육하셨기 때문에, 그 당시 경기도 내 잠업지도원의 80% 이상이 훗날 면장까지 했을 정도로 그분들의 실력과 인품을 쌓게 하는데 큰 일조를 하신 분이셨다.

직장 후배를 비롯하여 잠업지도원, 일반 농가의 젊은이들은 많은 부분에서 아버지를 닮고 싶어 했다고 하신다. 탁월한 지식과 실무능력도 그러했겠지만 무엇보다도 끈끈한 인간관계를 형성해 나가신 아버지의 인품을 닮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키우고 이끌어주신 많은 후배와 잠업지도원들은 아버지를 평생의 은인처럼 생각하셨다. 함께 일할 때는 혹독했지만, 나중까지 그 정을 잊지 않으시고 직장을 손수 알아봐 주시는 등 당신이 할 수 있는 데까지 도움을 주셨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온몸으로 실천하신 근면 성실함, 삶의 철학 등은 잠업지도원 개개인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경기도 잠업진흥회 회원 분들 중에도 잠업지도원으로 젊은 시절을 함께 지내신 분들이 계신데, 지금까지도 그런 아버지를 기억하며 눈시울을 붉힐 정도로 아버지를 존경하고 계셨다.

 

 

 

생각하면 달라진다.

 

생각의 전환

어느 날 점심식사를 마치고 사무실에서 오후 근무일정을 점검하며 생각에 잠기신 아버지는 갑자기 여직원에게 먹과 화선지를 가져오라고 하셨다. 근무하던 잠업과의 직원들은 잠시 일손을 멈추고 아버지를 주시했다. 아버지는 여직원이 가져온 먹을 갈며 한참동안 침묵하시더니 곧 큼지막한 글씨를 써내려 가셨다. 그리고는 먹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사무실 벽에 모두가 잘 보이도록 붙이셨다.

“생각하면 달라진다.”

아버지는 이 여덟 글자에 당신의 모든 삶이 담겨져 있다고 말씀하며 끊임없는 아이디어로 발상의 전환을 꾀하라고 부하직원들에게 당부하셨다. 처음에는 사무실 벽면에 붙어 있는 글귀를 보며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직원들이었다. 그러나 오며 가며 한 번씩 그 글자가 주는 의미를 되새기면서 자신들의 사고방식이 은연중에 바뀌어 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 했다. 각 시 군에 현지 출장을 가서 각종 업무를 수행하는 동안에도 부지불식간에 이러한 구호가 떠올라 좀 더 진취적인 사고를 하면서 행정 처리에 만전을 기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이렇게 후배 공무원들의 의식구조까지 바꿀 수 있을 정도의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계셨다. 그런 영향력은 주입식교육이나 강압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가 그렇게 살아왔고 늘 실천하고 계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남들과 비슷한 생각, 비슷한 행동양식은 결코 인생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같은 자료, 같은 차트를 보고도 앞으로의 사업방향이 어떻게 전개되고 어떤 변화를 보일 것인가를 알아낼 수 있는 사람은 무엇이 달라도 다르다. 그것은 생각의 발상이 근본부터 다르기 때문이다. 이전과는 다른 방법으로 한 번 더 깊게 생각하면 지금보다 분명히 달라진다는 신념이 있었다.

아버지는 각 시와 군의 현황을 파악해 산간 오지를 비롯하여 일반 농작물을 재배하지 못하는 곳을 찾아가서 뽕밭을 넓혔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군수와 직접 협의해야 하는 것들도 많았고, 막상 협의에 성공한다고 해도 막대한 국비 지원이 따라 줘야만 가능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누구보다 심혈을 기울였던 문제도 보다 넓은 식상지역을 확보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많은 예산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아버지의 설득력과 소신을 관철하는 힘은 잠업예산을 많이 따내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뛰었다는 얘기에서 잘 나타난다. 예산관련 공문을 세밀하게 작성한 뒤 상사의 결재를 받으러 가실 때는 윗주머니에 당신의 사표도 늘 함께 넣어 가셨다고 한다. 당신의 목표를 위해서는 평생직장과도 맞바꿀 결심을 할 정도로, 투철한 소명의식을 갖고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셨다. ‘생각하면 달라진다.’는 아버지의 신조는 불가능해 보이는 많은 일들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전정가위를 든 뽕나무 박사님

원칙 위주로 일을 처리하시던 아버지에게는 ‘독일 병정’이라는 별명과 함께 ‘땡삐’라는 별명도 함께 붙여졌다. 일침을 가하고도 죽지 않는 토종 땅벌 같은 끈기와 함께 항상 부지런히 꿀을 모으듯 발 빠르게 움직이셔서 얻게 된 이름이다.

아버지는 이 두 이미지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소품을 늘 허리춤에 차고 다니셨다. 다름 아닌 전정가위였는데, 농가를 시찰할 때는 그 전정가위를 손에서 놓은 적이 없을 정도였다. 군직원이나 잠업지도원들이 아버지를 수행하여 뽕나무 작황을 설명할 때도 눈에 거슬리는 뽕나무가 보이기라도 하면 당장 밭으로 들어가 가지를 잘라내는 시범을 보이셨다.

뽕나무 선단벌채에 대해서 아버지만큼 손놀림이 빠르고 유연하게 처리하신 분도 없었다. 탁월한 전정솜씨는 철저한 과학적 식견이 밑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잘못 자란 뽕나무를 보면 이렇게 가지를 쳐야한다며 현장에서 시범을 보이셨고, 수행하던 직원들은 그 전문성과 민첩함에 감탄하곤 했다. 다년간의 경험과 일본서적을 참고해 우리 실정에 맞도록 고치고 만들어낸 당신만의 독창적인 방법이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쉬지 않고 공부를 하셨고 늘 새로운 아이디어를 많이 창출해 내셨다고 한다. 어느 날은 새로운 농기구를 가져와서 당신이 직접 개발했다고 하며 시범을 보이셨는데, 농민들이 그 기구를 직접 사용해 보고는 참으로 편리하다며 감탄했다고 한다. 농민들이 불편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보다 빠르고 손쉽게 많은 뽕잎을 얻어 누에를 키울 수 있을지 늘 생각하셨던 것이다.

또한 양잠을 연구하면서 아버지만의 재치를 보인 것들도 있었다. 지도원들에게 개량된 ‘섶’을 만들어 보여주시곤 했다고 한다. 다 자란 누에가 올라가 고치를 짓도록 만들어진 물건으로 짚이나 잎나무 따위로 만든 것을 ‘섶’이라고 하는데, 아버지는 실무자 입장에서 어떻게 하면 이를 좀 더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을까 고심하다가 독창적인 섶을 만들기도 했다. 뭔가 새로운 것을 고안해 조금이라도 효과를 볼 수 있도록 늘 생각하셨던 것이다.

아버지는 누에가 뽕나무를 먹을 때 나는 사각거리는 소리가 한여름의 소나기 같다며 좋아 하셨다. 그 소나기 소리가 가난했던 우리나라를 살리는 웅장한 교향곡과 마찬가지였다고 말씀하면서 당신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웃곤 하셨다.

전정가위를 들고 오지의 농가를 찾아다니며 경기도 전 지역을 누비신 뽕나무 박사님, 그런 아버지의 손에는 언제나 굳은살로 단단하게 옹이가 박혀 있었다. 그런 투박한 손으로 만졌던 아버지의 뽕나무들은 당신의 정성과 사랑 안에서 많은 잎들을 키워 나갔던 것이다.

 

 

잠업증산의 기술화에 발맞추다

일본 산업시찰을 다녀온 이후 일에 대한 집념은 더 커져만 갔다. 보다 합리적이고 기술적인 방법들이 있다면 바쁜 농가에 일손을 덜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좀 더 많은 고치를 생산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늘 하고 계셨다.

누에를 키우는 농민들은 언제나 일손이 부족해서 힘들어했고 뽕밭이 많이 늘기는 했지만 여전히 목표량에는 미달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생각했다.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우리 농촌이 아니던가. 정부에서 본격적인 식상장려를 하기 전에도 산에는 더러 산뽕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아버지는 누에를 산에 방출해서 스스로 산뽕잎을 먹고 자라게 하는 방법을 시도한 것이다. 이른바 ‘갈잠 사육’이라 하는데, 결국 여러 가지 문제로 실패했지만 농촌 일손을 덜어보기 위한 아버지의 생각은 끊임없이 계속되었고, 아버지는 갈잠 사육의 실패 원인을 분석해서 또 다른 방법을 연구해 보려고 애쓰셨다.

아버지는 일본의 잠업현황을 부러워하면서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도 우리 실정에 맞게 선진 잠업기법을 도입할 수 있을까 고심하고 계셨다. 사비를 들여 일본에서 직접 사온 책자와 씨름하면서 우리도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셨고, 새로운 사육방법을 도입하려고 노력하셨다. 때 마침 정부에서 전국적으로 치잠 공동사육소를 설치하는 대대적인 움직임이 있었고, 아버지도 적극적으로 이 제도의 활성화를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치잠 공동사육소는 이른바 ‘캐리어 잠실’이라고도 하는데, 당시에는 매우 혁신적인 사육방법이었다. 이전에는 농민들이 잠종(누에씨)을 받아다가 농가에서 직접 알을 깨게 한 뒤 누에를 몇 잠씩 자게 한 다음 고치를 생산하는 방법으로 누에를 키웠다. 바쁘기 만한 시골 농가의 농민들로서는 버거울 정도로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하는 어려움과 고단함이 있었다.

그러나 치잠 공동사육소를 설치한 이후에는 농민들은 한결 일손을 덜 수 있었다. 부락별로 항온 항습이 잘 되는 대규모 사육장 시설을 만들어 잠업지도원들의 주도하에 누에씨의 알을 까게 한 다음, 두 잠을 재우고 난 뒤 누에가 어느 정도 성충이 되면 그 때서야 각 농가에 보급해 주는 제도였던 것이다. 전문 잠업지도원들에 의해 알을 까게 하기 때문에 부화율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게 되었고, 공동사육소에서 잠종을 키우는 동안에는 농민들의 일손이 현저하게 줄어들 수 있어서 그만큼 농민들에게 환영을 받았던 것이다.

아버지는 누에고치 수매와 관련해서도 좀 더 많은 이익이 농민에게 돌아가도록 고심하셨다. 당시의 누에고치 수매는 농산물검사소에서 검사원들이 육안으로 그 품질을 평가했다. 농민들의 피와 땀으로 키운 누에고치가 몇몇 사람의 육안으로 대충 등급이 매겨져 평가된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아버지는 좀 더 과학적인 방법을 찾으려 하셨다.

검사원들에게도 나름대로 등급을 매기는 기준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제사업체에 넘겨졌을 때 자신들의 판정보다 실의 양이 적게 나오면 곤란을 받았기 때문에 대부분 실지보다 낮게 등급을 매기는 것이 상례였다. 한 개의 고치에서 보통 1200미터의 실이 나오는데도 1,100미터로 낮게 등급을 매기곤 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그런 부당한 이유로 농민들의 노력이 평가 절하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실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농림부에서 견기계 검정에 대한 시안이 나오자 아버지는 옳다구나 하며 무릎을 치셨다. 농민들이 잠을 설치며 애써 키워온 누에고치를 더 높은 가격으로 책정해서 돌려줄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느 도에서도 선뜻 이 제도를 시행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새로운 제도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고 그 시행착오가 가져오게 될 제사업체와의 껄끄러운 관계에 대한 우려 때문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타 도에서 하려고 엄두조차 내지 못하던 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하셨다. 그런데, 실상 농민들을 위해 실시하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농민들의 반대의견에 부딪히자 아버지로서는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육안 검사를 하면 그 자리에서 판정이 나와 바로 돈을 받아갈 수 있는데, 뭐 하러 그런 건 합니까?”

“당장 돈이 시급한 농가에서 판정시기를 늦춰가면서까지 번거롭게 기계검정을 할 필요가 있습니까?”

정부에서 자신들에게 돈을 늦게 주려는 술책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농민도 있었다. 그만큼 농민들은 가난했고 자녀 학비와 영농자금의 빠른 조달이 시급했던 것이다. 아버지도 농민들의 입장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러나 농민들에게 돌아갈 이익이 제사업자들에게로 고스란히 들어간다는 사실이 못마땅하셨던 아버지는 어느 도에서도 시행하지 못했던 견기계 검정제도를 당신이 직접 나서서 적극적으로 시행하셨던 것이다.

아버지는 우선 몇몇 친한 농가를 중심으로 이 제도를 시행하셨고, 극구 반대하는 농가에서는 기존의 방법을 병행하도록 조치를 취하셨다. 그러나 당신의 이름을 걸고 추진했던 것이 어디 잘못된 것이 있었느냐며 고치를 들고 검사소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기계검정을 권유하는 것을 잊지 않으셨다.

결과적으로 이 제도는 농민들에게 많은 호응을 얻었다. 기계로 실을 뽑아보면 십중팔구 처음 내렸던 등급보다 한두 등급씩 오르게 마련이었다. 무엇보다도 실의 길이를 정확히 재서 그 숫자에 맞게 등급과 금액이 계산되어 나오니 농민들에게 돌아가는 수익은 당연히 높아졌던 것이다.

기계검사에 대한 반응은 당연히 긍정적이었다. 며칠 늦게 돈을 받기는 했지만 이전에 받았던 것보다 훨씬 많은 수입을 얻게 되자, 처음에는 반대했던 사람들도 기계검정을 선호하게 되었다. 경기도내에서 성공적으로 시범 운영되자 제사업체들의 은근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각 도에서는 뒤늦게 이 제도를 받아들였고 곧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아버지는 치잠 공동사육소나 기계검정제도 등 정부에서 추진하는 새로운 제도들에 대해 거부감을 가졌던 농민들을 설득하면서 최선을 다해 업무를 추진하셨기에 신뢰감을 더욱 얻게 되었다. 잠업증산의 기술화에 발맞춰 나가기 위해 그렇게 부지런히 노력하신 분이셨다.

 

 

 

 

 

여천잠업특설단지

 

대통령과 키 재기

점심시간 무렵이 다가오던 시각, 아버지는 사무실 의자에서 움직이지 않으셨다. 평소 같으면 오전에 벌써 현장에서 각 단지의 뽕나무를 둘러보고 있을 시간이었지만, 이날만큼은 바쁜 행보를 잠시 멈추고 무언가 들여다보며 골똘히 생각하고 계셨다. 아버지가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여천잠업특설단지의 조감도였다.

사무실의 직원들은 시장기를 느끼며 시계를 쳐다보았다. 어느덧 12시를 넘어 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조감도를 덮고는 오후에 갈 곳을 노트에 체크하고서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셨다.

“자 다들 점심 먹으러 가자구!”

직원들도 하던 일을 정리하고 하나둘 일어섰다. 그때 사무실 문을 나서는 아버지의 뒷덜미를 낚아채는 소리가 들렸다.

“과장님, 전화 좀 받아보세요. 지사실이라는데요.”

“네, 잠업과 심계택입니다.”

아버지의 표정이 변한 것은 그 순간이었다. 안색뿐만이 아니었다. 아예 부동자세로 꼿꼿하게 선 채 저쪽의 말에 ‘예’ 라는 말만 연방 되풀이하고 계셨다.

“예! 알겠습니다.”

전화의 내용은 오후 두시에 박대통령이 헬기로 여천 잠업특설단지에 시찰을 나온다는 내용이었다. 대통령의 예정에 없던 불시 시찰인 만큼 도에 비상이 걸린 것은 당연했다. 아버지는 전화를 끊자마자 점심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직원들을 재촉하셨다.

“자 다들 서두르라구, 나는 지사 차로 먼저 갈 테니 자네들은 여천단지와 관련된 차트들을 준비해서 내 차를 타고 오라구!”

아버지는 다급하게 부하들에게 차 키를 넘겨주고 몇 개의 서류를 들고는 사무실 문을 박차고 나가셨다. 그런데 나가던 아버지는 돌연 발걸음을 멈추고 사무실 직원들을 돌아보셨다. 그리고 다소 허둥대고 있는 직원들을 향해 잊었다는 듯 한마디 덧붙이셨다.

“아참, 내가 각하 옆에 나란히 서 있을 테니까 다들 눈 크게 뜨고 보라구. 내가 큰지, 각하가 큰지.”

그제야 직원들의 굳었던 표정에는 미소가 번졌고 몸놀림이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사전에 아무런 통보도 없이 대통령이 시찰을 나왔으니 얼마나 긴장되고 떨리셨을 것인가. 아버지 역시 경기도청의 과장에 불과했으므로 대통령을 만난다는 사실이 부담이 되셨던 건 사실이었을 게다. 그러나 특별한 상황이 닥쳐도 아버지는 흔들리지 않으셨다. 그만큼 당신 스스로 열심히 펼쳐온 사업에 대해 자신감 있게 대처할 수 있는 순발력과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대규모의 잠업단지 조성

아버지는 도지사의 차를 타고 대통령을 영접하기 위해 잠업단지 현장으로 달려가셨다. 대통령의 경제재건의 관심사 중에 하나가 잠업이었던 만큼, 여천 잠업특설단지는 박대통령의 잠업에 대한 의지가 꽃처럼 피어난 곳이기도 하다. 그 단지가 조성되기까지에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있다.

박대통령은 어느 날 여주의 영릉을 둘러보고 오다가 여주와 이천 사이의 그저 돌밭으로 방치된 땅을 보고 와서는 경기도지사에게 전화를 걸어 왜 그 땅을 놀리고 있냐고 힐책하셨다. 대통령의 지적에 고심을 하고 있던 도지사는 이 넓은 땅에 무엇을 해야 할 지 막막하기만 해서 간부회의를 소집했다.

간부회의실 아침회의 석상에 모인 도청 간부들은 서로의 얼굴만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방치되다시피 한 대규모의 땅에 어떤 사업을 추진해야 할지 아무도 선뜻 생각해 내지 못했다. 얼마나 침묵이 흘렀을까.

“그곳을 대규모 뽕나무 단지로 만들면 어떨까요.”

좌중의 무거운 침묵을 깨고 아버지가 낭랑한 목소리로 말하셨다. 아버지는 국가적으로 잠업증산 계획이 이뤄지고 있던 시기임을 감안해 대단위 뽕나무 단지를 조성해야겠다고 생각하셨다. 잠업이 우리나라 외화 획득에 효자 노릇을 하기 시작하면서 잠업의 재원이 되었던 뽕나무 식재는 해도 해도 모자라던 시기였다. 따라서 이 대규모 잠업단지 조성사업은 시의 적절하다고 아버지는 믿으셨던 것이다.

“하, 역시 심 과장 자네밖에 없구만”

도지사는 반색을 하며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맡겨만 주신다면 제가 책임지고 해보겠습니다. 대신 도지사님이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추진해 나가겠습니다.”

“그야 여부가 있나. 말만하게, 내가 다 지원해 줌세.”

이렇게 해서 불모의 땅이었던 여주·이천의 그곳은 경기도청 잠업과장인 아버지의 책임 하에 방대한 규모의 잠업특설단지로 새로이 태어나게 된 것이었다. 이 잠업단지는 너무나 방대하여 버스를 타고 돌아볼 수 있도록 도로가 구획되어져 있었다고 하니 그 규모가 쉽게 상상이 가지 않으리라. 그 규모만큼이나 들어갈 재원은 방대한 양이었고 중앙정부 차원에서 지원을 한다고 해도 그것을 조성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열악한 상황에서 아버지는 당신이 할 수 있는 한 민간재원까지 이 사업에 끌어들이려고 노력하셨다. 그 동안 알게 되었던 잠업관련 업자들 및 투자자들에게 이 사업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하셨다. 국가 재정만으로 이 일을 감당하기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다행히 도지사의 적극적인 지원과 아버지의 강한 추진력으로 물적 인적 자원은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그러나 또 제동이 걸렸다. 이 척박한 땅을 뽕나무가 자랄 비옥한 토지로 바꾸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비료와 퇴비였다. 영세한 농가에서 비료는 꿈도 못 꿀 판이었고 각 군마다 조금씩 모아 온 퇴비는 턱없이 모자랐다. ‘생각하면 달라진다.’는 당신의 신념이 떠오른 것은 이때였다.

마사회의 마분을 잠업단지로 실어 나르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러나 그 수송이 문제였다. 하지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듯이, 아버지는 동분서주 끝에 30사단과 33사단의 군 병력과 차량을 이 사업에 투입시킬 수 있었다. 수천의 병력과 민간인들 그리고 많은 잠업지도원들이 이 일에 합세했다. 말 그대로 민관군이 밤낮없이 이 대규모 단지 조성에 박차를 가했던 것이다.

박대통령은 바로 이 여천 잠업특설단지 상황을 둘러보기 위해 불시에 시찰을 나온 것이었다. 아버지는 당당하게 대통령 앞에 서서 당신의 눈물과 땀방울이 스며든 잠업단지에 대한 브리핑을 하셨다. 몇 년 동안 밤낮 없이 일한 결과를 대통령 앞에 직접 보고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도 처음 맞이한 대통령을 바로 눈앞에 두고 상황을 보고하는 것이었으니 아버지로서는 그 순간이 얼마나 숨 막혔으랴.

그러나 그 누구보다 자신감 있게 추진해온 당신의 일이었기에 당당하셨다. 브리핑이 이어지는 동안 박대통령의 눈빛은 아버지의 야심찬 눈과 차트에 번갈아 깊숙이 꽂혔다. 밤이면 지프 안에서 전조등을 켜고 멀리 논밭의 벼이삭 숙성 정도를 파악할 수 있다는 대통령의 날카로운 그 눈빛이 아니었던가?

박대통령은 아버지가 브리핑을 다 마치자 그 특유의 표정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 단단한 표정 속에는 가난으로부터의 탈출구로서 당시 산업 수출의 선봉이었던 잠업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섞여 있었다.

아버지는 헬기로 대통령을 수행하고 현장을 둘러보셨다. 헬기에서 내려다본 잠업단지는 넓고 푸르게 펼쳐져 있었다. 그 잿빛의 돌밭이 푸른 조끼를 걸치고 막 녹음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잠업단지 구석구석을 낮게 비행하면서 일일이 살폈고 아버지는 그런 대통령에게 세심하게 설명을 하셨다.

아버지는 체격과 외모가 박대통령과 비슷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대통령과 닮은 점은 그런 외형뿐이었을까. 가난한 나라의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이 나라를 반드시 부유한 나라로 만들어 보겠다는 신념은 두 분의 외모보다 더 가깝게 닿아 있었을 것이다.

 

 

홀로 깨어나

아버지는 오로지 일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같다고 모두들 말씀하시곤 한다. 당신의 모든 삶의 기준과 생활의 방식을 일에 두셨으니 당신만의 독특한 습관들도 있게 마련이다. 아버지는 제 때에 식사를 하는 분이 아니셨다. 일을 하다보면 식사 때를 놓치기 다반사였고 그러다 보면 주위의 부하직원들까지도 밥을 거르게 마련이다. 특히 운전기사는 이러한 아버지의 습관을 견디지 못했고, 그래서 아버지가 손수 운전을 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또한 아버지는 언제나 새벽같이 출근을 해서 도청의 작은 화단에 물을 주셨다고 한다. 그렇게 주위의 아주 작은 것들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셨다. 그 중에서도 아버지의 아주 중요한 습관 중에 하나는 메모하는 버릇이었다. 당시 잠업지도원들은 출장이 잦았고 그러다 보면 그 곳에서 유숙을 해야 했는데 항상 자는 여관은 정해져 있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여관에 들어서자마자 잠깐 잠이 드셨다가도 하루의 정리를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격이었기에 다시 일어나 메모를 하셨다고 한다. 잠업 관련 서류를 정리하고 다시 그날의 작업 현황을 일일이 확인 점검을 하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잠드는 시각은 언제나 늦어지게 마련이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는 남들이 자고 있을 새벽 무렵에 다시 일어나 오늘 해야 할 일들을 세밀하게 적으셨다.

이러한 아버지의 메모하는 습관은 언제나 모든 일을 주도면밀하게 처리하는 발판이 되었다. 전날 아무리 술을 많이 드셨어도 언제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찍 일어나 좌정하고 하루 일을 곰곰이 생각해 보셨던 것이다. 이러한 아버지의 꼼꼼한 면은 부하직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아버지는 그렇게 홀로 깨어 당신 자신을 돌아보면서 그 젊은 날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오셨던 것이다.

 

잠업특설단지를 조성하던 시절은 아버지 생애에 있어 가장 적은 시간을 자면서 일했던 시기였다. 결과적으로 여천 잠업특설단지는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우리나라 양잠사업의 지속적인 성장에 큰 뒷받침을 한 것은 틀림이 없었다.

이렇게 조성된 여천특설잠업단지는 전국에서 가장 식재가 잘된 지역으로 선발되어 1등 상을 타는 등 이 일에 참여했던 사람들에게 큰 보람을 안겨주었다.

 

이때의 일화가 하나 있다. 1등 상금이 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이었던 200만원이었는데 아버지는 그 돈의 일부를 떼어 경기도 각 군의 잠업계장들에게 금반지를 해주는 것으로 포상을 마무리했고, 도청 잠업과 직원들에게는 밥 한 끼조차 사먹지 못하게 하셨다고 한다. 그 상금은 오직 여천단지를 조성하기 위해 밤낮없이 현장에서 일했던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한 공금과도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나머지 돈은 다시 재투자하는 방법으로 여주에 모수원을 조성하는데 쓰여졌다. 보다 좋은 뽕나무 종자를 만들어 내기 위해 어미나무를 만들어 접을 붙이는 방법을 연구하는 등 아버지는 모수원을 통해서 당신의 전문분야에 대해 더욱더 과학적인 안목을 갖고자 노력하셨다.

이렇게 여주·이천이 대규모 잡업특설단지로서의 모범 사례가 되자 전국의 시도에서 수시로 견학을 오곤 했다. 아버지는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정으로 그 어떤 난관에도 굴하지 않고 발걸음을 내딛어 대규모의 사업을 당당하게 이끌어 오신 것이다.

 

 

 

 

이끌어 주고 떠나 보내고

 

나라의 미래는 젊은이에게

아버지는 어려운 학생들을 보면 언제나 그냥 보아 넘기지 않으셨다. 더욱이 그 학생이 성실하고 장래성이 있다 싶으면 더욱 그러하셨다. 지금은 자수성가했지만 도청시절 어렵게 고학을 하던 박영남 씨는 이런 사람들 중 한 분이셨다

당시 도청의 사환으로 들어와 아버지와 인연을 맺었던 박영남 씨는 13살의 어린 나이로 그 나이 그 또래와는 다르게 무척 성실하게 일을 하셨다. 아버지는 일도 잘하고 무엇을 시켜도 꽤 부리지 않고 열심히 하는 것을 마음에 들어 하셨다.

아버지는 그를 늘 친자식처럼 챙겨주시고 자주 집에 데려와 함께 밥을 먹고 자며 가족처럼 지내셨다. 나는 그때 초등학생이었지만 박영남 씨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이 있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당시 아버지가 해주신 금반지를 잊지 못하고 있다. 어느 날 아버지는 그를 데리고 금은방에 들어가셨다. 부모와 떨어져 늘 외롭고 힘든 시절을 보냈던 그에게 고등학교 졸업을 축하해 주면서 졸업 기념으로 반지를 선물하신 것이다.

“남자는 어디를 가더라도 수중에 돈이 없으면 기를 못 편다. 금반지 하나 정도는 급한 상황을 대비해 꼭 갖고 있을 필요가 있단다. 자 손 내밀어라.”

아버지는 그의 손가락에 직접 금반지를 끼워 주셨다.

친부모의 사랑을 가까이서 받아 보지 못한 박영남 씨에게는 가슴에 뜨거운 눈물이 솟구칠 정도로 큰 선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졸업 후 진로를 두고 고민할 때 역시 아버지는 조용히 그를 부르셨다고 한다.

“너, 돈 걱정은 하지 말고 일류대 갈 수 있으면 가라. 내가 다 대 줄 테니······.”

아버지는 실력만 있다면 어떠한 학비든지 다 대주겠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공부가 소원인 사람에게 단지 돈이 없어서 학업을 포기한다는 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상대방이 당신의 뜻에 부응하면 어떤 물적 지원도 아끼지 않으셨다. 그는 대학을 진학하는 대신 사업의 길로 들어섰지만 아버지는 그에게 의정부에 작은 가게를 내 주었을 정도로 그를 아껴주셨다.

아버지의 사람 다루는 방식은 좀 특별했다. 당장 어떤 대가를 주지는 않지만 일단 당신의 밑에 들어온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돌봐 주셨던 것이다. 학생들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는 아버지는 후학들을 돕는 것에 돈을 아끼지 않으셨다. 나라의 미래는 젊은이들에게 있고, 그 젊은이들을 곧게 서게 할 수 있는 것은 배움에 있기 때문이었다.

 

설악잠업고등학교 설립

그날도 여느 때처럼 가평군의 잠업지도원과 함께 오후 늦게까지 일하던 아버지는 설악면 오지의 뽕밭을 찾으셨다. 일에 몰두하다보니 이미 해는 산 뒤로 모습을 감추었고, 간신히 지프차 한 대 서행할 수 있는 도로는 이미 어둠 속에 사라져 버렸다. 더욱이 이날도 일에 매달려 있다가 점심때를 놓쳤기에, 잠업지도원은 어디 가서 저녁이라도 하자며 아버지를 끌었다. 아버지는 그제야 공복을 느끼셨는지 천천히 엑셀레이터를 밟으셨다.

그때 저만치에서 눈에 익은 한 사람이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아이구, 과장님! 여기까지 오셨네요.”

늘 수더분한 웃음을 짓곤 하는 김씨였다. 평소에 그 어떤 농부보다 아버지의 일을 잘 거들었고, 농부의 마음이 되어 늘 열심히 일하시는 아버지를 고마워하던 분이었다.

“자, 시장하실 텐데 저녁이나 같이 하시죠!”

김씨는 자기 집에서 저녁 대접을 하고 싶다며 아버지 손을 잡았다. 옆에 있던 지도원도 함께 웃으며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그 친절함에 고마워하며 그를 따르셨다.

산골마을의 가난한 농가였지만 인정이 많은 김씨네 집이었다. 저녁을 드시고 나자 아버지는 김씨가 권하는 탁주를 들이키며 뽕나무와 양잠에 대해 담소를 나누고 계셨다. 두 분의 이야기는 양잠에서 다시 아이들 교육문제로 이어졌다.

“아이들은 학교에 잘 다니죠?”

“에그, 학교가 다 뭡니까? 뽕을 키우면 뭐 하는지.”

아버지는 술잔을 비우는 김씨의 한숨 섞인 말을 놓치지 않으셨다.

“아니 왜요?”

“설악면 아이들은 중학교를 졸업하면 끝이죠 뭐. 상급학교에 진학하고 싶어도 이곳에는 학교가 없어요. 정 학교를 가고 싶으면 청평으로 나가야 하는데 우리 같은 살림으로 타지에 유학시킬 수가 있나요? 가당치도 않지요.”

그 당시 설악면의 학생들은 대부분 설악중학교를 졸업하고 통학의 어려움으로 학업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사정을 전해들은 아버지는 말없이 술잔을 기울이셨다. 공부는 하고 싶은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 포기하는 아이들을 보면 언제나 마음 아파하던 아버지셨다.

며칠 동안 일을 하면서도 설악면의 열악한 교육 환경에 자꾸만 마음이 갔던 아버지는 어느 날 일부러 가평으로 출장을 나가셨다. 그리고 당시 가평군 국회의원이었던 오치성 씨를 찾아갔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난 오치성 의원은 난색을 표명했다.

“사정도 딱하고······. 취지도 좋지만······.”

아버지는 오치성 의원에게 설악면에 고등학교를 설립하는 것에 대하여 진지하게 의논하셨다. 학교 설립이라는 것은 말처럼 그리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끈질긴 제안과 설득에 두 분은 소규모 특화학교라도 설립을 추진해 보는 걸로 의견의 일치를 보셨다.

일반 고등학교보다는 모집 인원이 작았지만 설악면의 규모와도 맞고 또 당시 잠업관련 학교도 필요하다는 점을 감안해 잠업고등학교를 설립하기로 한 것이다. 이것은 아버지가 학생시절부터 적을 두었던 잠업강습소에서 일한 것과 30여 년 가까이 몸담았던 잠업의 길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의 어려웠던 학창시절을 회상하며 보다 현대화된 잠업교육에 대한 염원이 간절했는데 그 오래된 꿈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가난한 농가의 가난한 학생들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랑이 고등학교 설립의 필요성을 느끼게 했고, 아버지가 앞장서서 설립에 관여함으로서 1972년, 공립학교 인가를 받은 설악잠업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 초대 교장은 한승완 씨가 부임하였다. 드디어 아버지의 산지식을 전달할 수 있는 교육의 장이 마련 된 것이었다.

고등학교가 세워지자 누구보다 기쁜 것은 학생과 그 부모들이었다. 중학교 과정만을 마치고 더 이상 학업을 할 수 없었던 설악면의 60명의 학생들이 다시 배움의 길을 열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들 60명의 가슴에는 아버지가 은인으로 깊이 새겨지게 되었고, 제 1회 졸업생들 중에는 대학이나 육군, 삼군사관학교로 진학하여 더 많은 학업을 이어간 사람도 있었고 고교졸업 학력으로 잠업의 길로 들어선 사람도 있었다. 그 학생들 중에는 설악면 김씨의 아들 김지식 씨도 있었다.

“자네, 아버님이 아니셨다면 난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지 못했을 걸세”

김지식 씨는 그 때의 감회를 새삼 술회하면서 계면쩍게 웃었다. 그는 졸업 후 아버지의 권유로 더 많은 잠업기술을 체득하게 되었고 훗날 아버지와 같이 광주의 농장 일을 하면서 오래도록 아버지의 소중한 인연으로 남게 되었다.

오지의 산골 마을에서 한 농가의 아픔을 전해들은 것을 잊지 않고 있다가 손수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학생들의 배움의 장에 다리를 놓아주셨던 것이다. 이러한 배움에 대한 필요성의 인식과 젊은이에 대한 사랑은 후일 장학회 설립을 하면서 또 다른 결실을 보게 되었다.

 

 

심재덕 수원시장과의 인연

1966년 경기도 잠업과로 심재덕(현 수원시장)이라는 한 청년이 들어왔다. 서울농대 잠사학과를 졸업하고 교편을 잡고 있던 그는 당시 계장이었던 서기석 씨가 추천하여 특채로 채용되었다. 밑에서부터 차근차근 승진해 온 사람들에게는 불만이 아닐 수 없었다.

당연히 잠업과 직원들은 그를 따돌리곤 했다. 심재덕 씨 역시 이런 사무실 분위기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였다. 집이 수원이었는데, 교통이 불편했던 당시로서는 수원에서 서울에 있는 도청까지 출근하려면 2시간 이상 걸렸다. 그래서 그의 출근은 늘 늦었고 동료 직원들에게 더더욱 미움을 사게 되었다.

동료들과 쉽게 친화하지 못한 심재덕 청년은 5시가 되면 정확하게 퇴근을 했다. 가장 늦게 출근한 사람이 그것도 퇴근은 제일 먼저 하니 주위의 불만이 오죽했으랴. 그러나 그는 퇴근을 하는 척 했을 뿐 건너편 다방에 있다가 사무실 불이 모두 꺼지면 몰래 숨어들어 밤 10시까지 혼자서 일하고 집에 돌아가곤 했던 것이다.

그런 어느 날, 그는 퇴근을 하기 위해 시계를 쳐다보았다. 4시50분. 퇴근 10분 전이였다. 주섬주섬 서류를 정리하던 그에게 누군가가 다가왔다.

“벌써 가려구?”

잠업과장인 아버지셨다.

“이거, 낼 아침까지 정리해서 완벽하게 차트로 만들어 와!”

아버지는 그에게 한 무더기의 서류뭉치를 건네셨다. 막 퇴근하려고 하는 젊은 기사는 자기 앞에 부려진 일에 어이없는 표정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아니, 과장님. 그걸 심 기사 혼자 하라구요?”

그런 상황을 지켜보던 서기석 계장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아버지는 계장을 쳐다보지도 않고 심 기사를 향해 큰 소리로 또박또박 말씀하실 뿐이었다..

“그럼, 혼자 해야지. 아무도 도와주지마! 이 일은 심 기사가 내일 아침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책상 앞에 갖다 놓으라구! 국장님께 보고해야 하니깐!”

하나 둘 동료들은 퇴근하고 그는 혼자 남았다. 막막했다. 여럿이 힘써도 끝낼까 말까하는 작업을 내일 아침까지 하라니. 하지만 과장님을 실망시켜 드릴 수도 없었고 또한 자신을 비웃고 있던 동료들을 떠올리자 왠지 오기가 생겼다.

그는 먼저 모조지 30장을 사왔다. 이때가 11월 하순이었는데, 사무실마다 난로를 피우고 있었다. 그는 밤을 세울 작정으로 얼마 남지 않은 조개탄을 모두 긁어 난로에 퍼 넣었다. 불기가 실내에 퍼지자 그는 팔을 걷어붙이고 엄청난 분량의 서류들을 뒤적이며 차트를 작성해 나갔다.

그렇게 쉼 없이 일하다 보니 새벽 3시. 어느새 실내는 싸늘해졌다. 난로가 꺼져버린 것이다. 더 이상 넣을 조개탄도 없었다. 그는 밀려오는 졸음과 한기를 뿌리치며 다시 일에 매달렸다. 춥고 졸렸지만 속도를 늦출 수 없었다. 몇 시간 후면 동료들이 출근할 것이었다. 언 손을 비비며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일에 매달렸다. 아침 8시가 가까워서야 일의 끝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표지까지 다 만들어 놓고 그는 과장님 책상 의자에 앉자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잠결 속으로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출근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바로 과장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했네? 했어!”

아버지는 심 기사가 만들어 놓은 차트를 들고 사무실 안의 모든 직원들에게 들으라는 듯 커다란 목소리로 외치셨다. 그날 아버지가 심 기사에게 그런 무리한 일을 시킨 것은 그가 미워서도 그를 고생시키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직원을 절대 잘못 뽑지 않았다는 것을 전 직원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였다. 특채로 들어왔다는 이유로 은근히 따돌림을 받았던 이 젊은이를 아버지는 처음부터 범상치 않게 보아 오셨다. 반드시 뭔가를 해 낼 사람, 어떤 상황에도 굽히지 않고 소신껏 행동할 수 있는 사람임을 알아 보셨던 것이다.

직원들의 시기를 당하면서도 상사가 시킨 일을 밤새워 완성해 주위를 감동시킨 이 젊은이가 훗날 수원시장이 된 심재덕 씨였다. 심 시장님은 자신의 생애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들 중 한 사람으로 경기도청에 근무하던 시절의 직속상관이었던 아버지를 꼽으셨다. 언제나 남을 위해 봉사하는 마음, 근면 성실함, 그리고 무엇보다 곤경에 처한 후배에게 남다른 애정을 갖고 항상 돌보던 깊은 인간미에 그 의미를 두셨다.

“보통 사람들은 그 분의 정을 잘 느끼지 못하지. 겉으로는 차갑고 냉정하게 보이지만 내게는 그 어떤 분보다 따뜻한 분이셨어. 사람에 대한 신의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셨지.”

심 시장님은 이미 고인이 된 아버지를 두고 그렇게 감회에 젖어 말씀하셨다.

 

 

눈물로 감싸 안은 선후배

심재덕 시장님과 관련된 일화가 또 하나 있는데, 그분의 개인적인 아픔이 배어 있는, 그래서 더 인간미가 묻어나는 일화이다.

성실과 근면함으로 직무에 충실한 결과 심재덕 씨는 공직에 들어선 지 8년 만에 과장의 직위에 오르신다. 그때가 35세였으니 꽤 젊은 나이에 주요 직책을 맡은 셈이었다. 그러나 그런 기쁨도 잠시, 어지러운 사정의 태풍에 휘말리고 마신다. 서정쇄신이라는 명목 하에 대대적인 공무원 사정을 단행하기 시작했는데, 그때 심재덕 씨가 음해성 투서와 함께 억울하게 사정의 대상이 되셨던 것이다. 중앙정부에서는 잠업과의 전 직원에 대한 파면으로 상황을 종결지으려고 했다.

이때 심재덕 씨가 아버지를 찾아와 이 억울함에 대해 얘기하셨고, 아버지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며 파면까지 당하는 수치를 보고 있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그를 위로하며 억울한 누명을 벗겨 주기 위해 이곳저곳을 알아보셨다.

그러나 아버지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잠업과 전 직원은 의원면직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그러나 심재덕 씨는 잠업과의 총책임자의 위치였으므로 파면을 그대로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공직생활에서의 파면이라는 일생일대의 뼈아픈 상처를 갖게 되셨다. 서정쇄신이란 미명하에 시행된 이 사정의 바람에 희생양이 되셨던 것이다.

아버지는 이때 잠업과에서 면직 당한 사람들을 제사업자들과 공조하여 취직자리를 알선해 주었고 실의에 빠져 있던 심재덕 씨도 대구에 있는 견직 공장에 취직시켜 주셨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이 견직공장 역시 문을 닫게 되자, 아버지가 대구까지 내려가 그를 위로하셨다고 한다. 그때 심재덕 씨는 아버지의 품에 얼굴을 묻고 하염없이 울었다고 하신다.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절 그분 곁에는 아버지가 계셨다. 아버지는 그에게 꼭 훌륭한 일을 할 사람이라며 언제나 자신감을 주며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그분은 다시 맨주먹으로 시작해 열심히 일했고 동서철강이라는 회사를 설립하여 보란 듯이 재기에 성공하셨다. 하지만 지난날의 앙금은 늘 그분 가슴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분은 1995년 초대 민선시장 선거에 뛰어들 결심을 하셨다.

“내, 다 지원해 줄 테니 원 없이 뜻을 펼쳐보라고.”

아버지의 격려에 힘입어 심재덕 씨는 열심히 선거에 임했고, 무소속이라는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시장에 당선되었다. 수원 최초의 민선시장이 된 것이다. 지난날의 오명이 한순간에 씻기는 자리이기도 했다. 억울한 공직생활의 파면과 뒤이은 직장의 파산 등 남모를 아픔을 딛고 일어선 성공이었기에 더욱 빛나고 소중한 것이었다.

초대 민선시장에 당선된 이후 다시 무소속의 재선 당선으로 훌륭히 수원시를 이끌어가고 있는 심재덕 씨는 자신의 오늘이 있기까지 도청시절의 직속 상관이셨던 아버지의 영향을 빼놓지 않으셨다.

지금도 심 시장님은 시청 직원들을 데리고 회식을 할 때는 허름한 술집에 앉아 순대 같은 값싼 안주로 술을 드신다고 한다.

“이게 다 그 양반한테서 배운 거지. 시민들의 세금을 어디 함부로 쓸 수 있나.”

도청시절에 근무하면서 아버지에게 배운 것이라며 심시장님은 소탈하게 웃으신다.

 

 

낡은 농구화 한 켤레

1972년 10월 아버지는 10년 동안 몸담았던 잠업과를 떠나 농정국 농산과장으로 영전된다. 하지만 잠업과를 떠난 것은 그렇게 달가운 일 만은 아니었다. 적어도 잠업은 아버지에게는 모든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농산과는 잠업과와는 달리 구조적인 면에서 차이가 났고 따라서 일하는 방식도 달라져야 했다.

즉 잠업과에서 거칠 것 없이 일하시던 아버지였지만 농산과에서는 그런 당신의 업무추진 방식이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 농가의 발전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으셨다. 논두렁이나 밭두렁에 작물을 심어 농가수익을 올리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추진하곤 하셨다. 아버지는 농산과장으로서 또한 도청 농정국의 수석과장으로서 당신의 행보를 조금도 늦추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앞만 보고 달려온 아버지에게 서서히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는 30여 년 동안 몸담았던 공직을 떠나야만 하셨다. 당신 스스로 사표를 내신 것이다. 아버지는 왜 그만두셨을까. 언제나 가족들에게 직장에 있었던 일을 얘기하는 법이 없어 우리로서는 그 전말을 알기 어려웠다. 단지 어떤 투서가 들어와서 그에 대한 조사가 있었다는 것밖에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뒷날 여러 사람들을 통해 들어보면 그 내막을 짐작하기 어려운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 도청에는 행정고시 출신들과 일류대 출신들이 치고 올라오기 시작했고 또한 잠업은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아버지의 운신의 폭은 그만큼 좁아졌고 아버지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오랜 세월 당신의 열정을 불태웠던 공직의 길을 물러나셨던 것이다.

1974년 3월 아버지는 봄 햇살이 가득한 도청마당에 서 계셨다. 그런 아버지를 도청 사람들이 말없이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어금니를 굳게 다무신 채 주차장에 세워져 있던 지프차에 시선을 고정시키셨다. 그렇게 당신이 항상 타고 다니던 그 지프차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아무런 표정도 없이 천천히 걸어서 도청을 나오셨다.

도청 문 앞에서 문득 발을 내려다보니 당신이 그 순간까지 신고 계셨던 것은 놀랍게도 농구화였다. 아버지는 오지를 누볐던 낡은 농구화 한 켤레와 공직생활의 마지막 순간을 같이 한 것이다.

낡은 농구화를 신고 눈부신 세상 밖으로 나서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조금은 휘청거렸다. 그것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제 4장 농민으로 돌아가다

 

 

 

먹구름은 태양을 가리고

 

광주의 농장을 나선 아버지는 고추를 가득 넣은 부대자루를 메고 터벅터벅 버스터미널로 향하셨다. 정류장 근처 가게에 들어가 맡겨두었던 소주병을 건네받고 남아 있는 소주 반병을 입에 털어 넣으셨다. 버스를 타고 미아리에 있는 집에까지 가려면 꽤 긴 시간이었기 때문에 소주 한잔을 마시고 눈을 붙이는 것이 이미 오랜 버릇처럼 되어 있었다.

이날따라 술맛이 몹시 쓰게 느껴졌던지 아버지는 이맛살을 찌푸리셨다.

“고추농사가 잘 됐나 봐요?”

“······.”

아버지는 가게주인의 말에 대꾸할 힘조차 없으신 것 같았다. 보통 때 같으면 으레 먼저 안부를 묻는 게 당연했지만 이날만은 만나는 그 누구에게도 일체의 말씀이 없으셨다. 아버지는 빈 병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며 “수고하시오” 짤막하게 인사한 뒤 가게를 나와 휘청거리는 걸음을 내딛으셨다.

도청을 그만둔 뒤로 농장일을 하고 계셨지만 30년을 넘게 몸 담았던 공무원 생활에서 쉽게 빠져 나올 수는 없으셨다. 더욱이 임기 말년에 외압으로 공직에서 물러난 것이라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이제 아버지는 누가 봐도 고추가 가득 든 부대자루를 멘 허름한 농부였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이정표를 잃어버린 나그네처럼 버스정류장 앞에 서 계셨다. 차들이 내는 희뿌연 먼지를 뒤로 하고 버스가 온 지도 모른 채 멍하니 서 계시다가 한참만에야 쫓기듯 버스에 오르셨다. 쉰 하고도 셋, 정말 정신없이 달려온 인생이었다. 아버지는 차창을 내다보고 계셨다. 소주 반병을 마시기는 했지만 잠은 쉽사리 올 것 같지 않았다.

창밖으로 가을걷이가 한창인 벌판을 나란히 하고 차들이 국도를 달리고 있었다. 모두들 무슨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지 차량의 속도는 곧고 빨랐다.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음질치던 두려움 없던 시절. 그래 그때가 그랬었지.

아버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두고 고향을 떠나 홀홀단신으로 대처에 나와 온몸으로 부닥치던 시절을 생각했다. 키는 작지만 강인하고 명민한 청년이었다. 그리고 전쟁의 편린이 채 가시지 않던 포천 시절. 들과 산의 폭탄 파편들을 손수 치우고 새벽 별을 보고 눈을 뜨던 노동의 나날. 지지리도 못살던 가난한 생활이었지만 보다 나은 삶의 터전을 가꾸기 위해 희망을 갖고 살던 시절이었기에 피곤함도 몰랐다. 자전거로 선두 인솔하여 지도원들과 함께 달리던 시절. 산간 오지를 누빈 그 거리를 환산하자면 지구를 몇 바퀴 돌고도 남았을 것이다.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탁월한 업무 수행능력을 인정받아 군청에서 도청으로 스카웃이 되었고, 지프차로 경기도 오지산간을 누볐다. 대통령을 수행하며 위풍당당하게 당신의 뽕밭을 누비던 시절, 일밖에 모르는 독일병정 시절이 엊그제 일만 같았다. 그리고 당신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어느새 아버지의 눈에는 보일 듯 말듯 이슬이 맺혔다. 누가 볼 새라 눈을 홉뜬 채 다시 창밖을 내려다 보셨다. 그때 아버지의 눈이 빛났다. 까만 지프 하나가 빠르게 차들 속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물론 아버지가 몰던 차는 아니었지만 그것은 회한에 젖게 하기에 충분했다.

지프차를 타고 경기도 오지의 비포장도로를 헤매다 보면 더러 수렁에 빠질 때도 많았다. 그럴 때면 운전기사도 없이 손수 운전한 아버지는 수렁과 씨름하기 일쑤였다. 간신히 수렁에서 차를 건지고 나면 온몸은 흙투성이였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그 시절은 행복했다. 또한, 산골 농부들과 마주하고 마시던 막걸리 한 잔과 꽁보리밥은 얼마나 달고 맛있었던가. 그 온정 어린 순박한 사람들과는 친형제 이상으로 허물이 없었는데······. 멀리 사라지는 지프의 꽁무니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얼굴에는 쓸쓸함이 가득 배어 있었다.

 

아버지는 공직을 그만두자 그 능력을 아까워하신 주위 사람들의 권유로 무슨 협회회장으로 잠시 앉아 있기도 하셨다. 등받이가 높고 푹신한 회전의자와 좋은 직함, 도청시절 못지않은 보수. 그러나 몸도 마음도 아버지는 편치 않으셨다. 무엇보다 아버지의 체질에 맞지 않았다. 언제나 농구화에 점퍼차림으로 산과 들을 누비던 당신이셨으니 그 불편함이 오죽했으랴. 아버지는 하루를 견디지 못하고 그날로 그 자리를 사양하고 나오셨다.

그리고 아버지는 한동안 집안에서 두문불출 아무 것도 하지 않으셨다. 그저 멍하니 앉아있거나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 아버지의 침묵으로 우리 집은 커다란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래서 언제나 발소리도 숨소리도 조심조심 죽여 가며 살아야 했었다. 그랬다. 1974년 그해, 세상에는 봄이 오고 있었지만 우리 집 정원만은 봄이 비켜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동안 두문불출하던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아버지의 그 힘찬 모습을 보고 누나와 동생과 나는 아버지가 다시 도청에 나가시는 것이라고 좋아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출근하신 곳은 도청이 아니었다.

“엄마, 그게 뭐예요?”

어느 날 아침 어머니는 우리 삼 남매 도시락 말고도 하나를 더 싸고 계셨다.

“아버지 도시락이란다.”

“아버지 도시락요?”

“그래.”

“······.”

아버지는 언제나 밖에서 식사를 하셨기 때문에 나는 그게 아버지의 도시락이라고는 차마 생각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경기도청의 농산과장이 아닌 농민이 되어 도시락을 싸들고 광주의 농장으로 출근을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중학교 2학년이 되었지만 마음은 뒤숭숭했고 학업에 집중하기 어려울 만큼 그늘에 싸여 있었다. 평상시에 우리 집은 엄한 아버지로 인해 아기자기한 단란함은 없었지만 든든한 가장으로 인한 안정감은 있었다. 그러나 그 해에는 아버지의 흔들림으로 인해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었고 나는 사춘기와 맞물려 힘들게 그 시절을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마음 한편으로 혹시 이를 계기로 아버지와 우리 가족 그리고 나와의 관계가 친밀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없지 않았다.

유년시절의 내게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던가? 우리가 잠들고 나서 퇴근을 하시고 일어나기 전에 출근을 하시는 아버지. 그래서 좀처럼 부자간의 따뜻한 대화 한번 나눠 보기 힘들었던 아버지. 어머니와 싸울 때는 그렇게 밉기만 했던 아버지. 평생 일만 하시던 아버지. 그래서 멀리만 보이던 아버지.

아버지는 농장 일을 하면서 일을 제외하곤 잠업과 관계된 사람들을 일체 만나지 않으셨다. 그것은 아마 사람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버린 깊은 상처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말없이 농장 일을 하면서 당신의 상처를 조용히 바라보고 계셨던 것이다.

그해 겨울이 시작되던 무렵 아버지는 나를 부르셨다. 나는 아버지의 입에서 뜻밖의 제안을 들었다.

“상구야, 너 겨울방학 때 시간 있지? 아버지랑 목포나 한번 다녀오자. 모름지기 사내 녀석들은 두루두루 돌아다녀야 세상 물정을 아는 법이란다. 이참에 아버지랑 세상공부도 할 겸 다녀오자꾸나.”

“예······.”

아버지는 당신의 그 긴 나락의 시간에서 헤쳐 나오시려 하는 것일까. 아버지는 서서히 세상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하셨다.

 

 

 

목포의 눈물

 

중학교 2학년 겨울. 나는 난생 처음 아버지와 단둘이서 여행을 가게 되었다. 바쁜 공직생활로 가정에서 한 발짝쯤 비켜서 계시던 아버지는 언제나 멀고 어렵게 느껴졌다. 그렇기에 자라면서 내게 제일 부러운 것은 다름 아닌 아버지의 손을 잡고 놀러 가는 친구를 볼 때였다.

“앗 우리 아빠다!”

어린 시절 골목에서 함께 뛰놀던 아이들은 아무리 재미있는 놀이를 하고 있더라도 퇴근하는 아버지가 나타나면 커다란 자랑거리라도 된 듯 자기 아버지의 손을 잡고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아이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나면 나는 언제나 그 텅 빈 골목에 혼자 남겨졌다.

소풍날이나 운동회 날에도 아버지는 한 번도 오시지 않았다. 물론 어머니가 대신하셨지만 늘 자기 아버지와 함께 있거나 목욕탕에 같이 가는 친구를 보면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공직에서 물러나실 때 이유야 어쨌든 이제 아버지와 같이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기대는 겨울방학을 계기로 현실로 다가왔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목포행 밤 열차를 탔다. 일상을 벗어나 낯선 곳으로 떠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표정은 그렇게 밝지 못하셨다. 열차에서 아버지는 묵묵히 삶은 계란을 까주셨다.

“아버지도 좀 드세요”

“아니다. 너나 많이 먹으렴.”

아버지는 계란을 먹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셨다.

“엇, 추워······.”

열차 실내가 춥다고 하자 아버지는 입고 계신 외투를 말없이 벗어주셨다. 나는 아버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따뜻함을 느끼며 잠들었다.

새벽이 되어 아버지와 나는 목포에 도착했다. 목포의 아침 날씨는 흐렸다. 금방이라도 하늘 한 구석을 손으로 찌르면 떡가루 같은 눈이 올 것 같았다. 그 흐린 아침, 숙소를 정하고 간단한 요기를 한 아버지와 나는 유달산에 올랐다.

한 걸음 한 걸음 아버지와 발걸음을 맞춰 산을 올랐다. 아버지는 걷다가 지치시는지 멈춰 서서 숨을 고르시곤 했다. 어느새 아버지도 50의 중반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제야 아버지의 흰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눈에 띄었다. 아버지도 늙으시는구나.

아버지는 산 중턱 바위에 걸터앉아 아득한 세상을 굽어보셨다. 영산강 멀리 용머리와 다도해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한켠으로 목포 시내도 보였다. 자신의 밥그릇을 차지하기 위해 아득바득 살아가고, 더러 남을 밀어내야 하는 냉혹한 생존의 법칙이 존재하는 세상이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바로 옆에는 ‘이 모든 것을 잊어라.’ 고 말하고 있는 것 같은 시름없는 영산강이 있었다. 아버지는 상반된 이 두 세계를 굽어보며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나는 아무 말 없이 아버지를 바라보다가 다시 발걸음을 옮기시는 당신을 뒤따랐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유달산의 중턱에 있는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있는 곳이었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젖는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아버지는 한참을 서서 움직이지 않으셨다. 가수 이난영의 노래비 앞에서 가사를 마음속으로 따라 부르셨을까······. 그때 내 이마 위로 무엇인가가 닿았다. 눈이었다. 나는 눈이 내려요, 하고 말하려고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눈자위가 붉게 변하더니 주르륵 무엇인가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희끗한 눈발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것은 분명 눈물이었다.

‘아, 아버지가 우시는구나······.’

나는 아버지가 우시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시는 아버지 앞의 노래비에는 ‘살아있는 보석은 눈물입니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말없이 눈물을 훔치는 아버지 머리 위로 눈발이 풀풀 날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걸음이 빨라졌지만 아버지는 노래비 앞에서 한참동안 지난날을 회상하시는 듯했다. 눈이 많이 내려 정상을 둘러보는 둥 마는 둥 하며 분분히 날리는 눈발을 헤치고 우리는 하산을 했다.

인생에 있어서 누구에게나 하산의 시점이 있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도 어느 때가 되면 물러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시기가 자신의 뜻과는 무관한 어떤 외압에 의해 다가온다면 그것은 커다란 상처로 남게 되는 것이다. 15살의 소년이었던 나로서도 그때의 아버지의 아픔을 어렴풋하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날 숙소로 돌아와서 아버지는 말없이 소주를 드셨다. 나는 두 손으로 아버지의 잔에 술을 따라드렸다.

따라드린 술을 한 번에 털어 넣으시며 아버지는 나지막하게 내 이름을 부르셨다.

“상구야!”

“예.”

“넌, 이 아버지처럼 살지 마라”

아버지는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평생을 일밖에 모르고 살아오셨고, 떳떳하고 당당하게 사셨던 아버지였음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당신의 쓸쓸한 감정을 그렇게 드러내셨던 것이다.

여행을 갔다 온 후로 나와 아버지는 조금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고 내 키도 부쩍 자란 것 같았다. 나는 곧 중학교 3학년이 되었고, 학교 공부로 바쁜 나날을 보내야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농장에서 당신 삶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며 바쁘게 지내셨다. 이제 아버지는 본격적으로 농민이 되어 돌아오신 것이다.

 

 

 

좀 더 넓은 뽕밭을 위해

 

아버지가 좋은 회장 자리를 마다하고 다시 시작한 것은 광동잠업사였다. 누에씨 원종을 경기도 잠종장에서 받아 1대 교잡종으로 만들어 경기도와 해외에 수출하는 일이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이란 쪽으로의 수출 길도 열려 있었고, 잠업이 사향의 길로 접어들기는 했지만 판로도 많이 남아 있었다. 아버지는 공직에 계셨을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농장에서도 쉬지 않고 일하셨다.

잠업 외에도 여러 농작물과 돼지들을 길렀기 때문에 아버지 혼자의 힘으로 관리하기 힘드셨다. 그래서 인부들을 그때그때 사곤 했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인부들 중에서는 더러는 적게 일하기 위해 요령을 피우면서 남과 똑같이 임금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공직에 계실 때처럼 아버지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하루 일을 다 마치고 일당을 계산하는 자리에서 아버지는 그날 하루 동안 일하는 것을 눈여겨 보아둔 대로 일일이 그 수고에 맞게 금액을 쳐주셨다. 따라서 그날 요령을 피운 사람은 다른 사람들 보다 적은 임금을 받았다. 반대로 열심히 일한 사람은 남들보다 더 많이 받았다. 이런 처우는 형평에 맞았고 따라서 인부들은 정당한 대우를 받기 위해 열심히 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잠종업으로 들어온 수입은 인부들 급여를 주고 농장을 유지해 나갈 수 있는 정도였다. 아버지 몫의 최소한의 돈조차 아버지는 일체 집으로 가져오지 않으셨다. 그 돈은 다시 잠종업에 재투자되었고 뽕밭을 늘리기 위한 땅을 사는 데 쓰여졌다.

그 당시 아버지는 광주에 많은 부지를 매입했는데 그 땅들은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야산이었다. 그런 황폐한 야산을 개간해 아버지는 뽕나무를 심었던 것이다. 뽕나무는 생존력이 강해서 그저 땅에 꽂아만 놓아도 살 정도라고 한다. 당시 그런 조악한 땅들은 비교적 헐값이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별 어려움 없이 땅을 늘려 가실 수 있었다.

그런데 지역개발에 편승하여 팔기를 권유받던 그 땅을 삶의 일터로 움켜지고 있으셨기에, 세월이 흐르면서 부동산 가치의 증대로 아버지는 재산을 늘릴 수 있었다. 비록 토지였지만 그 토지를 금액으로 환산하면 공직생활로는 평생을 벌어도 못 벌 돈을 만진 셈이 되었다. 일생 동안 당신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일했던 것을 나라는 알아주지 못했지만 하늘은 그렇게 아버지의 인생을 조금이나마 물질로 보상해 준 셈이었다.

 

이런 재산 증식에는 아버지의 철저한 근검절약 정신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가난한 시절의 근검절약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해졌어도 그 근본정신을 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이러한 생활에 많은 영향을 받은 김지식 씨는 아버지의 권유로 가나안 농군 학교를 수료했다고 한다. 비록 일주일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때의 경험들이 김지식 씨 일생에 크나큰 지침이 되었다고 이야기하신다. 아버지는 이러한 근검정신을 온몸으로 실천하며 몸소 보여주셨다.

농장이 조금씩 넓혀지고 땅 값이 올라가며 재산이 늘어났지만, 당신의 생활이 바뀌어 지는 것은 아니었다. 언제나 어머니가 싸주시는 도시락과 허름한 농구화, 그날의 피곤함을 잊게 해 주는 소주 몇 잔이 전부였다. 아버지는 공직에 계셨던 젊은 시절과 마찬가지로 뽕밭을 보다 넓히기 위해 늘 고심하셨고, 새로운 일이 결정되면 계획에 맞춰 쉬지 않고 일 하셨다.

 

 

 

복합영농 - 축산과 잠업

 

1979년 4월 아버지는 여러 인부들을 쓰며 손수 농장을 관리해 오다가 좀 더 전문적인 관리인을 채용하기로 하셨다. 그 사람이 설악잠업고등학교 제1회 졸업생인 김지식 씨다. 김지식님 씨와의 만남은 이미 앞장에 기술한 대로 그분이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었다.

이후 아버지는 됨됨이가 바르고 성실한 김지식 씨에게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고, 고3 졸업시즌에는 어디어디에 실습 가는 것이 좋겠다며 조언도 하셨다. 그런 그분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 제대 후 면서기를 잠깐 지내다가 아버지의 농장에 잠업 기술자로 입사한 것이다.

그분은 농장에 들어오자마자 열심히 일했다. 일 년에 두 번 봄과 가을에만 잠종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축산을 겸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아버지께 제의했다. 아버지는 그 제의를 받아 들여 기존에 있던 돼지 50두를 350두로 늘리고 소 80두, 젖소 15두를 새로 사들여 본격적으로 축산업을 시작하셨다. 이런 시도는 쇠퇴의 기로에 서있던 잠업에 전적으로 매달리지 않고 하나의 돌파구를 찾아보려 했던 자구책의 일환이었다.

축산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밤늦게까지 모든 가축의 사료를 공급하고 우사와 돈사를 치우는 중노동의 나날이었다. 이때 아버지는 처음으로 짐차인 포니픽업을 구입하셨는데, 당신의 발이 되어 경기도 오지를 달렸던 검정색 관용 지프 대신에 버스로 미아리에서 광주까지 출퇴근하신 지 5년만의 일이었다. 최초의 우리 집 승용차는 보다 많은 일을 하기 위해 마련하신 짐차였던 것이다.

아버지가 시도한 것은 복합영농이었다. 즉, 돼지에서 나온 축산 분뇨를 뽕나무의 퇴비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들은 아버지가 잠업 과장시절부터 언제나 시도했던 일 중의 하나였다. 이렇게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열심히 일했지만 축산업은 농장에 큰 수익을 가져다주지는 못했다. 소 값 파동이 이어졌고 구제역도 발생해서 그저 겨우 농장을 유지 할 정도였다.

이런 와중에 아버지가 70년대 초 남한산성에서 씨앗을 따다가 정성껏 키워온 향나무들이 대거 팔려나가는 좋은 일도 있었다. 정부의 도시계획 사업에 의해 향나무가 가로수로 지정되면서 아버지가 수년간 가꿔온 아름다운 향나무들을 비싼 가격으로 팔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잘한 사업들이 펼쳐졌음에도 불구하고 사향 길로 접어드는 잠업으로 인해 아버지는 점점 자신감을 잃어 가셨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국에서 저렴하고 질 좋은 실크가 대거 수입되기 시작되자, 상대적으로 인건비가 비싼 우리나라에서는 경쟁력을 잃게 된 것이다. 결국 잠업의 수출 길도 막히고 말았다. 아버지는 잠업을 더 이상 이어나가지 못한다는 사실에 크게 낙심하셨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79년에 아버지는 수술을 받으셨다. 고된 일로 피로해진 심신을 달래기 위해 아버지는 빈속에 소주를 마시곤 하셨는데, 안주라야 고추장 찍은 멸치나 마늘이 전부였던 것이다. 결국 아버지는 위를 절제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이르게 되셨다.

병원에 누워 계신 아버지를 보기 위해 김창환 씨가 찾아가자 아버지는 불편한 몸을 간신히 움직이셨다.

“힘드시겠어요······.”

사람들이 고개를 저으며 희망이 없을 것 같다며 말했지만, 김창환 씨는 아버지의 눈빛을 보시고 회생할 거라는 믿음을 가지셨다고 한다. 비록 중환자실에 누워 계셨지만 눈을 곧게 뜨고 손을 드는 모습에 삶에 대한 확신이 가득 차 있어 보였다고 한다. 수술 후 한동안 아무 것도 드시지 못해 몸무게가 39킬로그램까지 내려갔지만 아버지는 당신의 강한 생명력으로 다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셨다.

아버지는 주위의 보살핌과 당신의 불같은 의지로 빠르게 치유되셨다. 그리고 보다 넓은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 여행도 다니며 다시 재기의 길을 걷기 위해 충전하셨다. 그러나 이런 아버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 시대를 마감하는 조류가 서서히 밀어닥치고 있었다.

 

 

별밤 아래 소주 17병

 

잠업의 쇠퇴로 인해 할 일이 줄어든 김지식 씨는 1985년 농장에서 퇴사해 아버지가 주선해 주신 축협의 기능직으로 들어가면서 농장을 떠났다. 그러나 그분은 1년여 뒤 가족들과 함께 농장으로 다시 이사 오게 되었는데, 축협에 다니면서 퇴근 후 축산 일을 돌봐달라는 아버지의 부탁 때문이었다. 아버지 역시 당신 혼자만으로는 농장의 모든 일을 돌보기가 힘겨웠고 또 믿을 만한 사람을 구하시기도 쉽지 않았던 것이다.

김지식 씨의 말에 의하면 일 자체보다는 사람을 다루는 일이 더욱 힘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한 달에 7명까지 인부를 바꿔 본 경험이 있다고 하니 그 애로를 짐작할 만하다. 아버지는 김지식 씨의 사람 됨됨이를 일찍부터 알아봤기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그의 가족들과 함께 생활을 하시게 된 것이다.

김지식 씨와 그분의 가족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아버지는 김지식 씨의 아들인 학주를 데리고 나가 한참 만에 돌아오시더니 지나가는 말투로 말씀하셨다.

“학주 수술시켰다”

“예?”

돌도 채 지나지 않은 아기인 학주를 데리고 나가 포경수술을 시켜서 들어오신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포경수술에 대한 인식이 일반화되지 않았던 때여서 수술비용이 적지는 않았다고 한다. 돈과는 상관없이 그저 친손주 같이 귀엽고 사랑스런 아기였기에 사내아이의 건강을 위해 수술을 해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

아버지는 또한 월급 외에도 학주 엄마를 통해 쌀가마니를 들여 주곤 했었다고 한다. 김지식 씨에게 쌀을 가져다 먹으라고 하면 그것이 고정월급처럼 되어 다음 달에도 또 기대려는 모습을 보일까봐 그렇게 부인을 통해 주셨던 것이다. 그리고 주변에 경조사가 있어 봉투를 내밀어야할 때면 김지식 씨 이름도 아버지의 성함과 함께 나란히 봉투에 적으셨다. 또한 기부금을 내야 할 때면 당신의 이름을 숨기거나 다른 사람을 앞세우곤 하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돈의 지출에 있어서 인색하기도 했지만 반드시 필요한 데라고 생각하셨을 때는 아낌없이 봉사하는 마음으로 쓰시곤 했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에게 돈을 빌려주었다거나 어디에 어떤 도움을 주었다는 것을 절대로 말씀하지 않으셨다. 우리 가족조차도 모를 정도였던 것이다. 언제나 당신의 선행을 남에게 드러내지 않으시려는 것이 아버지의 타고난 성품이었던 것 같다.

 

80년대 아버지의 뽕밭은 더 이상 경제적인 효용가치를 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버릴 수 없는 일의 터전이 바로 뽕밭이었다. 뽕나무가 경제성이 없으면 땅 자체만으로 얼마든지 재산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부동산으로서의 재산가치가 얼마가 되든지 아버지에게 그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재산증식을 위해서 그 땅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일의 터전이요 당신의 삶 자체였기 때문에 뽕밭은 아버지에게 소중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더 이상 뽕나무에 목숨 걸며 매달리는 사람은 없었다. 이제 모든 걸 정리해야할 시점임을 아버지도 알고 계셨던 것이다. 보다 못한 아버지는 어느 날 뽕밭을 갈아엎고야 말았다. 한때는 보리밭을 갈아엎어 심어대던 뽕나무였는데······.

아버지는 그 뽕나무를 차마 당신 손으로 직접 갈아엎지는 못하고 인부를 사서 일을 시켰다. 뿌리가 뽑혀져 내팽겨진 뽕나무를 바라보던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하셨을까. 당신의 일생에서 가장 빛나던 시절을 함께 걸어온 나무. 그래서 길가에 방치된 뽕나무 하나라도 그냥 두지 않고 일일이 갈무리를 할 정도로 뽕나무를 다루시던 정성은 지극했다. 뽕나무는 아버지에게 있어서 나무 이상의 그 무엇이었다. 그런 뽕나무가 이제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당신 앞에 내동댕이쳐졌던 것이다.

뽕밭을 갈아엎던 날 밤 아버지는 김지식 씨와 함께 슬픔 이상의 어떤 울분을 달래기 위해 밤새도록 소주를 드셨다. 가난했던 6, 70년대 우리 농가에 적잖은 수입을 올려준 효자 나무-상목(桑木). 그날 있었던 일은 바로 그 뽕나무의 장례식이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위 수술로 인해 건강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별빛 아래서 밤새 소주를 마시며 김지식 씨와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셨던 것이다. ‘이제 그 시절을 마감하는구나. 이제 내가 키우고 또한 나를 키워왔던 뽕나무와는 영영 이별을 하는구나.’ 아버지의 심정은 당신의 삶을 마감하는 것 같은 처절한 기분이셨을 것이다.

두 분이 다음날 아침 술병을 세어보니 자그마치 17병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마신 술만큼이나 그날 밤 아버지의 가슴에서는 피눈물이 흘러내렸을 것이다. 도청을 그만두고 농민으로 돌아와 농민으로서 밤낮없이 뛰던 시절도 그 소주병들과 함께 막을 내리고 있었다.

 

 

 

 

 

제 5장 씨앗이 된 열매

 

 

 

아름다운 열매들

 

L.A.에서 날아온 초청장 - 1984년

“선배님, 이번에 한번 다녀가세요.”

“글쎄, 자네가 미국에서 어떻게 사는지 보고 싶기는 한데······.”

“제가 선배님을 위해서 뭔가를 해드릴 기회도 좀 주셔야죠.”

“허허······.”

아버지는 서기석 씨의 전화를 받고 의외의 제의에 허허 웃기만 하셨다. 그 때가 아버지 회갑이 멀지 않은 시기였다. 나는 막 군대에서 제대해 대학에 복학했었고, 동생 준희는 고등학생이었다. 누나는 결혼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아직 아이가 없었다.

당신께서 늦은 나이에 자식을 두었기 때문에 굳이 회갑잔치를 할 생각도 아니 하셨다. 그렇지만 내 입장에서는 회갑을 치러드리지 못하게 된 나의 상황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결혼한 누나가 외손주라도 일찍 안겨 드렸으면 조금 위안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회갑을 앞둔 아버지의 모습이 내 눈에는 쓸쓸하게만 보였다.

그러던 차에 친형제처럼 지내시던 서기석 씨가 회갑을 기념해 미국으로 놀러오라는 전화를 하신 것이었다.

“허허, 괜찮네. 회갑이 무슨 대단한 잔치거리가 된다고 그러는가. 가까이 있는 식구끼리 한 끼 식사나 하면 되는 거지.”

“아닙니다. 그러시면 너무 섭섭해요. 저에겐 친형님보다 더 소중한 분이시잖아요. 꼭 모시고 싶습니다.”

아버지는 말만이라도 정말 고맙다고 하시며 조용히 전화를 끊으셨다. 옆에서 통화하시는 모습을 보고 있던 나는 아버지께 여행 삼아 한번 다녀오시라고 말씀드렸으나 말없이 웃음만 지으실 뿐이었다.

그렇게 잊고 있던 어느 날 우편함을 살피다가 미국에서 온 편지 하나를 발견했다. 서기석 씨가 보낸 초청장이었다. 나는 한달음에 달려가 아버지께 전해드렸다. 봉투를 뜯어 L.A.행 비행기표 두 장이 들어 있는 것을 본 아버지는 혼잣말로 나지막이 말씀하셨다.

“정말 보냈구나.”

아버지는 보일락말락한 웃음을 지으며 모처럼 편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아버지의 미국여행은 그렇게 해서 이뤄졌다. 서기석 씨는 아버지 어머니를 아주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 친형제 이상으로 서로를 아끼고 염려했던 두 분은 L.A.에서 감격적인 해후를 했고, 서기석 씨가 마련해 준 성대한 회갑잔치로 그 기쁨을 함께 했다. 잔칫날 찍은 여러 장의 사진들을 보면 그분이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얼마나 애쓰셨는지 알 수 있다. 잘 차려진 회갑상 앞에서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사진을 찍으셨는데, 아주 행복한 표정이셨다. L.A.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고 돌아오신 아버지는 그 어느 때 보다 원기가 충만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1984년 즈음이면 아버지께서 많이 지쳐 있을 시기였다. 안 먹고 안 입고 안 쓰면서 조금씩 모아놓은 땅이 재산가치를 갖게 되면서 돈이 많다는 소리는 들었었지만, 생활은 그리 풍족하지 못했다. 더구나 잠업의 급격한 몰락으로 광주의 농장에서 명목상 꾸려나가던 잠종업을 사실상 정리할 수밖에 없으셨으니, 평생 이뤄온 당신의 일들을 놓아야 한다는 상실감은 그 어떤 때보다 컸으리라. 평생 당신이 몸담아 왔고 애정을 쏟았던 일터를 잃어버렸다는 충격에서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 있었던 때에 서기석 씨의 그런 따뜻한 배려는 큰 위로가 되었던 것 같다.

외롭고 힘들 때 정말 위안이 되는 사람이 진정한 친구요, 동료가 아니던가. 아버지는 당신의 마음을 주고자 하실 때는 어떠한 열악한 조건도 불사한 채 아낌없이 베푸셨다. 서기석 씨가 이민 갈 때 아버지는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거금을 만들어 이민자금으로 보태주셨다. 또한 공직생활을 성실히 수행한 공로로 금메달을 도지사가 하사하게끔 세심하게 신경도 써주셨다. 공항에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포옹을 할 때에도 아버지는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사는 게 힘들다 싶으면 당장 짐 싸들고 와. 내가 돌봐줄 테니.”

“······.”

어깨를 다독이는 아버지 앞에서 서기석 씨는 말을 잇지 못하셨다. 그저 포옹한 채 한참을 서 있어야 했다. 그는 아버지의 따뜻한 말씀에 목이 메었지만 가족들 앞에서 차마 눈물을 보이지 못하고 가슴으로 새기고 또 새겼다. ‘언젠가는 이 은혜를 다 보답하리라······.’ 이러한 결심을 갖고 한국을 떠나 타국에서의 낯선 생활을 견디며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아가셨던 것이다.

L.A행 비행기표 두 장은 아버지 생애를 빛나게 해준 아주 소중한 열매들 중 하나였다.

“평생 동안 그 은혜를 다 갚아드려도 모자랄 텐데······. 이제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셨으니······.”

얼마 전 안부전화를 드렸을 때 안타깝게 아버지를 그리워하시며 하신 말씀이다.

젊은 시절 소중하게 뿌려둔 사랑의 씨앗들은 이렇게 알찬 열매들로 맺어졌다. 인생에서 정말 소중한 것이 있다면 아름다운 인간관계의 열매들이 아닐까.

 

환영식장의 박수소리 - 1995년

“심재덕! 심재덕! 심재덕!”

환영식장은 환호의 물결로 가득 차 있었다. 아직도 선거의 열기가 끝나지 않은 듯했다. 사람들은 최초의 민선 수원시장이 된 심재덕 씨의 이름을 부르며 계속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깨끗한 도시, 문화의 도시 수원의 초대 민선시장이신 심재덕 시장님의 시장당선 환영식에 참석해주신 내빈 여러분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환영식을 거행하겠습니다.”

사회자가 식장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 정리하자 장내는 조용해졌다. 식순에 의해 행사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아버지는 제일 앞자리 귀빈석에 모셔져 보좌관들의 시중을 받았다. 여러 프로그램이 끝나고 사회자의 안내 멘트가 있자 심재덕 씨가 단상에 올라서셨다. 사람들의 열화와 같은 박수가 이어졌고 심 시장님은 두 손을 흔들어 답례하셨다.

“시민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 시대가 정말 필요로 하는 일꾼이 되기 위해 늘 깨어있는 젊은 시장이 되겠습니다. 온 힘을 기울여 수원시를 위해 봉사하겠습니다.”

장내는 다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제가 시장에 당선되기까지 많은 분들이 저를 도와 주셨습니다. 그 모든 분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올려드립니다. 이 뜻 깊은 날에 이 자리를 빛내주신 한 분이 계서서 소개시켜드릴까 합니다.”

심재덕 씨가 아버지가 앉아 계신 자리로 시선을 옮기자 보좌관들이 아버지를 부축했다. 아버지는 보좌관들의 안내를 받으며 천천히 단상 위로 올라가셨다. 심재덕 씨는 아버지께 공손히 인사를 드리고는 좌중을 향해 다시 말을 잇기 시작했다.

“제 일생에는 저를 키워주신 세 분의 스승이 계십니다. 한 분은 대학에서 저를 가르쳐주신 교수님이시고 또 한 분은 제가 교편을 잡을 때 모셨던 교장선생님이시지요. 그리고 여기 계신 이 분은 경기도청에서 근무했던 20대부터 지금까지 저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신 분이십니다. 현재 경기도잠업진흥회 회장을 맡고 계신 심계택 선생님을 소개합니다.”

시민들이 박수로 아버지를 환영하자 심재덕 씨는 다시 덧붙였다.

“제가 도청에 입사해서 얼마 안 되었을 때 직원들이 저를 따돌렸던 때가 있었지요. 그 때 저의 능력을 인정해주시고 격려해 주시면서 동료직원들과 하나가 되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게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가장 먼저 위로해주시고 용기를 주신 분이십니다. 심계택 선생님을 모시지 못했다면 아마 오늘 제가 이 자리에 서 있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제 일생에 잊지 못할 소중한 분이십니다. 뜨거운 박수로 환영해 주십시오.”

심재덕 씨는 말을 마치고 아버지를 포옹하며 객석을 향해 환하게 웃으셨다. 환영식장은 다시 커다란 박수소리와 환호의 함성이 가득했다. 고희를 넘긴 아버지는 다소 불편한 몸이었지만 밝게 웃으시며 심 시장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여기저기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고 관중들의 박수소리가 끊이지 않자 웃고 계시던 당신의 얼굴에는 보일 듯 말듯 한 눈물이 고여 있었다.

내가 최근에 수원시청에 들러 아버지를 추모하는 책을 내고 싶다고 말씀드렸을 때 심 시장님은 정말 잘했다며 격려해 주셨다.

“잘 생각했네. 나라도 아버님을 기리는 책을 내드리고 싶다네. 아버님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참 많지. 책을 만들어 그분의 품성과 공덕을 널리 알린다면 저 세상에서라도 고인이 얼마나 뿌듯해 하시겠는가.”

그분은 아버지를 정이 많으신 분이라고 말씀하신다. 근면 성실한 생활습관이나 청렴결백함을 아버지를 통해서 배웠다고 하신다. 실의에 차 있을 때마다 아버지는 이렇게 용기를 주셨다고 한다.

“자네는 꼭 훌륭한 일을 할 사람이네. 이까짓 일로 좌절하면 되겠는가? 정직하고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면 반드시 성공할걸세.”

그러한 아버지의 관심과 사랑이 훗날 이렇게 소중한 열매로 결실을 맺은 것이다. 환영식장의 박수소리는 아버지가 뿌린 사랑의 씨앗이 ‘심재덕’이라는 한 열매를 만들었고, 나아가 더 풍요로운 열매들을 새로이 맺을 것을 예견하는 축복의 소리였던 것이다. 아버지는 심재덕 씨와 포옹하는 그 순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가졌다는 생각에 벅차셨을 것이다. 당신이 주신 사랑과 관심에 몇 배로 감사해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처럼 보람 있는 일도 없을 것이다. 거친 세월을 힘겹게 살아왔던 아버지에게 신이 선물한 뜨거운 격려가 바로 환영식장의 그 박수소리였다.

 

잠사인 백 명과의 마지막 모임 -1999년

60년대부터 70년대 초반까지 경기도 잠업계를 주도했던 분들은 아버지를 잠업계의 대부라고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셨다. 한 결 같이 열심히 일했던 젊은 시절을 생각하면 독일병정 심계택 과장님을 떠올리는 분들이다. 지금은 거의 대부분 5, 60대의 장년이 되셨지만 자신들의 청춘을 바쳐 일했던 젊은 날을 회고하실 때는 모두 흥분과 감동을 감추지 못하셨다.

희수(喜壽)를 몇 달 앞둔 아버지 역시 당신의 황금기였던 그 시절을 늘 가슴에 품고 사신 분이셨다. 아버지의 인생을 정리할 시기가 왔다는 것을 하늘이 예견했던 것일까.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몇 달 전 잠사인 백 명과의 화려한 모임이 있었다.

과거 잠업계의 명성을 잇기 위해 경기도잠업진흥회를 이끌어오던 분들을 주축으로 대대적인 모임이 추진되었다. 그 당시 경기도에서 활동했던 잠업인들의 숫자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각 군의 잠업공무원을 비롯해 잠업지도원들까지 합친다면 백여 명도 넘을 것이다. 이 모임을 추진하던 분들은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과연 얼마나 모일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날 모인 잠업인들은 백여 명에 다다랐다. 한자리에 그 옛날의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다는 사실부터가 참 보기 드문 일이었을 것이다. 그분들이 만나 서로 얼싸안고 그 시절의 땀과 눈물을 되새기며 당신들의 젊은 날을 되돌아보았다는 것은 잠업이 그분들에게 얼마나 소중했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아닐까.

그날 잠업인들이 모여 나눴던 얘기들은 무엇이었을까. 이미 얼굴에는 세월의 무게로 인한 주름이 가득했고 젊은 시절의 패기와 열정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러나 옛 앨범 속에서 누렇게 바랜 채 낡아 가는 흑백사진을 꺼내보듯 자신이 활동하던 옛 시절의 사람들을 만나 회포를 푸는 자리에서 잠업인들은 그 벅찬 감정을 추스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백여 명의 잠업인들이 모인 곳에서 아버지는 77세라는 나이도 잊고 다시 3,40대 시절의 잠업과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다시는 느끼지 못할 것 같은 그 시절의 그 열정을 확인하시고 당신을 따르고 지지해 주었던 지도원들과 호쾌한 술잔을 기울이셨다.

지팡이에 의지해 걸음을 옮기는 힘없는 노인이 되신 아버지였지만 그분들에게 아버지는 여전히 건재하신 독일병정이었고 땡삐였다. 금방이라도 호통 치실 것 같은 카리스마와 당당함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건만 당신의 눈빛에는 너무나 분명한 삶의 철학이 또렷이 살아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마지막 돌아가실 때까지 경기도 잠업진흥회 회장을 맡고 계셨다. 그 자리는 그 어떤 이해관계가 따라오는 감투는 아니었다. 단순한 명예직에 불과 했을지 모르지만 돌아가실 때까지 당신은 오로지 잠업인이었음을 당신 스스로에게 주지시키고 싶으셨던 것이다.

1999년, 세기말의 술렁이던 사회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버지는 당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이러한 아름다운 열매들이 또 다른 씨앗으로 잉태되기를 기원하셨다.

 

 

 

광주문화원 부지 희사 - 1988년

 

피땀으로 이룩된 땅의 사회 환원 - 아버지의 깊은 뜻

“상구야. 자니? 오늘 네게 긴히 할 말이 있구나.”

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 8월의 어느 날 밤. 아버지는 회사 일을 마치고 피곤해 쓰러져 자고 있는 나를 깨우셨다.

“오늘 미사리 조정경기장에서 지역 유지들과 조정경기를 관람하고 왔는데, 임사빈 도지사께서 내게 부탁 하나를 하시더구나.

임사빈 씨는 아버지가 도청 시절 함께 일하셨던 분인데, 아버지가 광주 지역에 땅을 많이 갖고 있는 것으로 알고 계셨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땅 부자도 아니었고 큰 사업가도 아니었다. 단지 공직을 그만 두신 뒤 뽕밭을 개간하기 위해 틈틈이 사 모았던 임야와 밭들이 조금씩 불어났고, 세월이 흘러 재산가치가 생겼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타고난 일꾼이요, 땅을 사랑하는 농부이셨다. 오직 흙과 나무가 좋았고 일터를 사랑하셨기에 늘려놓았던 땅을 노후까지 간직하고 계셨던 것이다.

나는 증권회사를 다니고 있었고, 어느 때보다 격무에 시달려 피로해 있었다. 땅을 희사해 달라는 도지사님의 제의를 받았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듣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표정은 아주 평온한 모습이었다.

“광주에는 군민회관이나 문화원 등이 없는데, 군의 예산도 부족하지만 군의 발전을 위해 희생하고자 하는 분들도 없어서 그 흔한 회관조차 없으니, 심회장이 일이백 평의 땅을 희사해 주시면 다른 유지 분들도 나서서 기금이 모일 거고 그러면 도에서도 적극적으로 예산을 지원하여 그 땅을 모태로 회관을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떠냐고 하시더구나. 너도 알다시피 나는 재산의 일부일지라도 언젠가는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생각해 왔지만 마땅한 기회가 없었는데, 내가 결심을 하면 도지사님도 큰 도움을 준다하니 비로서 광주군민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할 기회라 생각되어 그 자리에서 흔쾌히 승낙했단다.”

아버지는 아주 기쁜 마음으로 내게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뽕나무밭을 넓히기 위해 평생 땅을 가꾸며 땀 흘리셨고, 그것 이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열정을 쏟으신 적이 없으셨다. 이제 그 뿌린 씨앗을 큰 열매로 거두고자 하는 당신의 생각을 펼칠 수 있게 되셨으니 나는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판단으로는 웬만한 건물을 지으려면 일이백 평으로는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되어, 5~6백 평의 땅을 내 놓을 테니 도지사님도 많은 예산을 주셔야한다고 말씀을 드렸단다. 요즘 땅값이 많이 올라서 농장 인근 주택지 경우는 평당 이백만 원 정도라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우리 농장은 주거지역 안에 있어서 언제든지 집을 지을 수 있는 땅인데······. 네가 정히 반대하지 않는다면 그리하려고 하는데, 네 생각을 얘기해보렴”

아버지는 내가 어릴 적부터 재산을 사회에 환원할 것이라고 늘 말씀하셨기 때문에, 잠시 스치는 생각일지라도 나는 아버지의 뜻에 반대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런 결정을 하신 아버지를 가슴 깊이 존경하게 되었다.

“아버지 생각이 그러시다면, 품고 계신 뜻대로 하세요. 그런데 땅을 희사한다면 어디를 생각하고 계신가요? 가운데 땅에 건물이 들어서면 후에 우리가 개발할 때 문제가 될 수도 있을 텐데, 아래편 한쪽으로 들어서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 나도 오면서 여러 가지로 생각해 봤는데, 아래보다는 위 땅 중에서 도로로 예정된 부지 사이에 있는 땅 5~6백 평 정도를 내 놓는 것이 좋겠구나. 거기는 지대가 높아서 광주읍이 훤히 보이고 멀리서도 건물이 보이니 사람들이 쉽게 찾아올 수도 있을 테고, 농장 한쪽에 위치하니 우리가 나중에 개발할 때도 문제가 될 것이 없을 것 같구나.”

“예, 그러면 그리 하세요. 그런데 위쪽에 건물을 짓게 하면 아직 도시계획도로가 없는데, 어떻게 하시려고요?”

“동네와 농장에 있는 우리 길을 좀 더 넓히고 가운데 밭 사이에 흙을 메우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 곳까지 길을 내줄 수 있을 거다”

“그러면 길까지 내 놓으실 건가요?”

“아니야. 지금 길은 도로부지가 아니니까 후에 도시계획도로가 날 때까지 임시로 써야겠지. 도지사가 예산을 많이 지원해 준다지만 아마 건물 짓기에도 넉넉하지 않을 테니, 후에 군 예산이 확보되면 그 때 도로를 낼 테지. 기왕에 큰마음을 먹고 나도 땅을 희사하고 모두 힘을 모아서 큰일을 하려는데 길 문제 때문에 무산시킬 수는 없는 것이니, 우리가 조금 더 희생해서 후에 군에서 길을 낼 때까지 우리 땅을 이용토록 하려고 한단다.”

“예, 아버지께서 평생 힘들게 이루신 것이고 평소 말씀하시던 대로 사회에 환원을 하는 것이니 뜻하시는 대로 하세요. 저도 도울 수 있는 데까지 도와드릴게요.”

“그래, 고맙다.”

당신이 이루신 재산과 관련하여 내게 뜻을 물어보셨던 첫 번째 자리였다. 사회 일반의 시각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집의 여력으로 봐서도 결코 적지 않은 재산을 아무런 대가없이 희사하려 했던 것이기에 쉽사리 실행하기 힘든 결정이셨나 보다. 하지만 당신의 마음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머뭇거림 없이 아버지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한 달에 백만 원이 채 안 되는 봉급을 받아 생활하던 내게는 평생 한 푼 쓰지 않고 모아도 이룰 수 없는 만큼의 재산이었다. 그 재산을 사회에 기증하고 싶은 마음을 비치시면서 최종적으로 결정하실 때에는 내게 물어주신 것이다. 나는 스쳐 지나가는 생각일지라도 손톱만큼도 반대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토지를 희사하려 했던 아버지의 뜻이 이해득실이 아닌 순수한 사회 환원의 마음이셨고, 내가 어릴 때부터 접해왔던 아버지만의 오랜 숙원이셨기 때문이었다.

그날 이후 토지 희사에 대한 상의는 더 이상 없었다. 나는 다시 일상의 샐러리맨으로 돌아와 정신없이 일 속에 빠져 지냈다. 아내는 얄팍한 월급봉투에서 시어머니 용돈을 떼어내고 교육보험과 적금을 붓고 알뜰한 생활을 위하여 가계부에 깨알 같은 글씨를 써내려 가야했다. 환갑이 넘으신 어머니는 젊은 시절부터 그러했듯이 늘 부족한 살림을 꾸려나가셔야 했고, 칠순이 다 된 아버지는 손수 프레스토 소형차를 몰며 당신의 인생의 열매가 알알이 맺혀있는 그 농장으로 향하셨다.

 

 

결코 썩은 열매가 아니었다.

땅 희사 문제가 거론되고 1년여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아버지는 몹시 불쾌한 얼굴로 내게 신문을 내미셨다.

 

[廣州] 개인소유의 땅을 희사 받아 기공식까지 마친 광주문화원 건물 건립사업이 부지 기증자가 돌연 토지증여를 취소하는 바람에 무산 위기에 놓여있다.

24일 광주군과 군 문화원에 따르면 지난해 9월 관내 각급 유관 기관장 및 지역 인사 등이 참여한 가운데 [문화원건립추진위원회]를 발족, 건물 건립사업을 추진하던 중 沈계택 씨(광동잠업사 대표)가 광주읍 경안리 산 9의 1 일대 6백여 평을 부지로 기증, 설계를 마치고 지난 9월 23일 현지에서 기공식까지 성대하게 거행했다는 것.

그러나 부지기증자인 沈씨가 최근 ‘사정이 생겨 6백여 평을 다 내놓을 수 없고 2백여 평만 기증하겠다’고 갑자기 태도를 돌변, 설계 및 기공식까지 거행한 문화원 건물 건립계획이 백지화될 위기를 맞고 있다. 이에 대해 광주군과 문화원 관계자들은 ‘어린아이들의 약속도 아니고 모든 사업이 본격 착수할 시기에 이제 와서 6백 평이 아닌 2백여 평만 희사하겠다니 어처구니가 없다’며 ‘빠른 시일 내에 군유지인 군공설운동장 옆에 설계에 맞는 6백여 평의 부지를 모색, 문화원 건립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89년 10월 24일(화) OO일보

 

토지 희사 문제는 아버지의 의사대로 잘 진행되고 있는 줄만 알았다. 직장생활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나는 느닷없이 불거져 나온 이런 기사로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아버지 어떻게 된 일이죠?”

흥분해서 묻는 내 질문에 아버지는 얼굴이 굳어진 채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미사리 조정경기장에서 아버지의 땅 희사 얘기가 나온 이후로 간간이 사람들 입을 통해 들려오는 말들이 있었다. 땅값을 올리기 위하여 몇 푼 되지 않는 땅을 내 놓았다는 얘기도 있었고, 그 가치를 십분의 일 이하로 평가하여 아버지의 뜻을 폄하하는 말들도 있었다. 하지만 반대급부를 바라지 않은 순수한 사회 환원의 마음이었기에 당신이 생각하셨던 대로 그리고 당신이 도지사와 얘기를 나누었던 그해 8월의 어느 날 밤에 내게 말씀하셨던 대로 그 약조를 지키시며 아버지는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날 그 기사를 내게 건네주며 몹시 불쾌한 표정을 보이셨지만, 그 어떤 비난도 하지 않고 여하한 말씀조차 하지 않으신 아버지의 모습은 지금까지도 내 가슴을 아프게 한다. 평생 당신 자신과 가족들에게조차 인색하게 살아오신 아버지이셨다. 근검절약정신을 몸소 실천하며 애써 가꾸었던 삶의 결실을 대가없이 떼어놓으셨던 마음을 근거 없고 무책임한 rfl사가 훼손시키다니, 나는 이 사회가 이렇게 몰인정할 수 있는가에 대해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훌륭한 일을 하셨기에 칭찬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아니다. 아버지의 뜻을 고운 시선으로 바라 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철없는 어린아이의 무책임한 말로 내몰며 당신 얼굴에 먹칠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여론몰이라는 것은 한 사람을 낙망하게 하고 심지어 생명을 해칠 수도 있는 무서운 것이 아니던가.

아무 말씀이 없으셨지만, 기사에 나온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30년 가르침에 살아 왔던 내게는 분명했다. 당신은 그런 수모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뜻을 하늘만은 알지 않겠느냐며 깊이 인내하셨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아버지께 그 모든 것을 취하하자는 말씀을 드렸다. 땅 희사로 인해 발생한 군의 손실이 있다면 우리가 대신 물어주고, 신문 기사에 나온 대로 모든 것을 없던 것으로 하자고 말씀을 드렸다.

“아무리 열심히 그리고 깨끗이 살아간다 해도 세상 사람들에게서 오해받고 질시 받는 경우도 많은데, 바람결에 따라 뜻을 접고 펼친다면 어찌 곧은길을 갈 수 있겠냐. 내 본 뜻이 그러하지 않으니 언젠가는 그 기사가 거짓이었다는 것이 드러나지 않겠느냐. 마음을 삭이고 네 직장생활에나 충실하렴.”

아버지는 오히려 젊은 혈기로 흥분해 있는 나를 위로해 주셨다. 그러나 그런 오명을 쓴 당신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지는 내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기사의 출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그리고 믿고 있다. 당신의 뜻은 땅 희사 문제를 내게 말씀 하셨던 그 날 밤에 결정이 되어 있었다. 뜻을 세우면 기필코 이루고야 마는 분이시기에, 그날 밤 내게 말씀 하셨던 대로 5~6백 평의 땅을 희사하고, 장소는 현재의 문화원 부지 위치로 하리라 마음을 굳히셨으리라. 처음 땅 희사 이야기가 나온 후 얼마 되지 않아서 나는 문화원 조감도를 보게 되었는데, 처음 도지사가 제안했던 평수로는 도저히 지어질 수 없는 규모였다. 그 조감도에 나와 있는 건물과 놀이마당, 주차장 등을 감안하면 5~6백 평도 모자랄 정도의 큰 규모의 땅이 필요했다.

따라서 일을 추진하던 분들은 그 조감도를 기초로 한 설계도면에 맞춰 토지를 분할하려 했을 것이고, 그에 따른 토지의 면적이 결정되어 아버지에게 통보되었을 것이다. 이를 뒤늦게 알게 된 아버지는 당신이 세상에 공표하셨던 600 평보다 훨씬 상회하는 (아마도 두 배 이상의) 토지의 기증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을 아시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상황이 진전되자, 희사하고자 했던 600 평을 넘는 토지에 대한 대책 수립을 추진위원회에 말씀하셨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나의 왜곡된 추측이 아니고 사실이라는 것을 지금의 문화원 건물과 그 부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문화원의 담으로 둘러싸인 현재의 부지 면적은 721평(2,382㎡)으로 건물이 입지하기 위한 최소의 면적이다. 즉 아버지가 약조했던 600평의 부지로는 현재의 건물을 건축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당초의 조감도 및 설계자의 뜻대로 건물 놀이마당 등이 건축될 경우 현 부지 721평을 훨씬 상회하는 토지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설계도면에 맞춰 기증자의 의사를 무시하고 당초 언약한 토지의 두 배 가량을 무상으로 증여받으려고 했다면 어불성설이 아니겠는가. 이런 문제가 발생된 것이 과연 어느 누구의 책임인가가 명백해지는 것이다. 즉 600평을 희사하기로 약속했는데 나중에 200평만 희사하겠다고 약속을 번복했다는 기사는 분명 허위기사이거나 오보임이 분명하다.

공사에 난항이 생긴 것은 600평의 기증의사를 밝힌 아버지의 뜻이 무시된 채, 최소한 121평 이상의 추가적인 무상증여를 요구했거나 아무런 대책 없이 공사를 강행하고자 했던 측에 원인이 있었고,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다. 결국 아버지는 당초 약속 보다 69평(228㎡)이 증가된 669평의 토지를 희사하셨다.

아버지는 명예를 훼손한 내용의 글이 기사화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생각한 바에 대해 추호의 거리낌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약속했던 것보다 더 넓은 땅을 당당히 희사하셨던 것이다. 아버지가 나고 자란 광주지역의 발전을 위해 아버지는 정말 아무런 대가없이 당신의 소중한 재산을 내놓으신 것이다. 평소에도 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자 했던 당신의 순수한 뜻과 문화원 건립에 대한 광주군민들의 소망에 찬물을 끼얹지 않기 위하여 문화원 건립을 계속 추진시켰던 것이다. 게다가 현재의 문화원부지 721평 중 52평(171㎡)은 아버지가 희사한 토지에 포함되지 않은 부지로서 당신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무상으로 사용하도록 묵인해 준 상태다.

지금도 안타까운 것은 일이 추진될 때 당신께서 희사할 면적이 사전에 분할되고 그것에 기초하여 건물 조감도 등이 이루어졌다면, 큰 베풂을 하고서도 당신과 나의 가슴에 못질을 당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또다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버지가 약조하셨던 부지의 희사를 당신은 결코 번복한 적이 없으며 신문기사에 나왔던 그런 오명을 받아야 할 책임이 당신께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계명장학재단의 설립 -1995년

 

1994년 나는 농장과 관련된 일로 광주 군청을 찾았다. 담당부서의 계장은 한참 동안 공적인 얘기를 하다가 지나가는 말로 넌지시 말을 건넸다.

“부친께서는 지독한 구두쇠라고 소문이 자자하더군요.”

평소 당신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인색하다 싶을 정도로 돈을 아끼시며 오직 절약과 근면만을 실천하여 오신 분이셨기에 그런 말이 오고갈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떤 인간적인 관계도 없는 남에게서 구두쇠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아버지가 무얼 잘못했단 말인가. 당신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지갑에서 쉽사리 돈을 꺼내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구두쇠란 단어의 지독한 뜻을 알고 있는 내게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나는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 궁금해서 되물었다.

“구두쇠라구요?”

“아, 예, 사람들 말이 그렇다는 거지요, 뭐.”

내가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였던 것일까. 어쩌면 그분은 특별한 의미 없이 그런 말을 했는지도 모르지만 마음이 너무나 무거웠다. 불과 몇 년 전에 시가 십억 원이 넘는 토지를 아무런 대가없이 광주지역 주민들을 위해 희사했건만, 작은 베풂이 부족했다고 하여 큰 베풂조차 묻혀버린 채 남들에게서 그런 말을 들어야한다는 것은 젊은 내게 ‘삶의 기준이 뭘까?’를 되돌아보게 했다.

어린 시절부터 전기를 아껴 써라. 수돗물 살살 틀어라. 보리쌀 섞어 먹어라. 함부로 물건을 버리지 말라 등등 아버지로부터 숱한 말씀을 들으며 자라왔다. 남들이 버리는 물건들도 조그만 사용가치가 있으면 들여다가 쌓아놓으시는 모습을 지켜보았던 내게는 단지 명분을 위하여 불필요한 지출을 하거나 내야할 기부금을 남들 보다 적게 냈다고 해서 이런 말을 들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사실상 당신이 공직생활을 마무리하시고 그 퇴직금으로 지금의 농장 부지를 매입하여 산과 밭을 가꾸시게 된 이후 잠종제조와 축산업이 아버지의 유일한 수입원이었다. 잠종업은 70년대 후반부터 이미 사양산업이 되어 그저 명맥만 유지하였던 것이고, 축산 또한 지역 특성상 소규모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축산업도 80년대 중반 농장 옆에 주택단지가 들어서게 되어 소 몇 마리 키우는 정도의 명맥만을 유지하였기에 아버지의 주머니는 풍족하지 못했던 것이다.

92년 중환자실에서 운명의 위기를 넘긴 후, 당신의 인생을 정리해야 할 시기라고 판단하시고 땅의 일부를 팔게 되었던 93년 하반기까지 아버지는 늘 풍족하지 못한 생활을 이어오셨다. 부동산 투기나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은 것이었다면 미련 없이 갖고 있던 땅을 팔아 풍족하게 쓰시고 남들 앞에서도 허세를 부리셨을지 모른다. 그러나 당신 삶이 한 걸음 한 걸음 부지런히 끊임없이 내딛었던 것이었기에, 산과 밭은 재산으로서의 의미보다도 아버지 당신이 직접 일구고 가꾸는 일터의 의미가 컸다. 그래서 팔기를 권유받는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쉽사리 토지를 팔 수 없었고, 더욱이 선심 쓰듯 여러 곳에 의미 없이 돈을 사용할 수는 없으셨다. 그래서 인색하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아버지는 당신 삶의 뿌리였던 땅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당신의 온몸을 혹사시키면서 앞만 바라보고 열심히 살아오신 아버지의 일평생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그날 이후로 또 다시 아버지의 성함이 사회에 남겨질 수 있는 것을 찾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내게 늘 말씀 하셨던 재산의 사회 환원 문제를 떠올렸다.

 

아버지는 평소에도 늘 후학들에 대한 관심이 많으셨고, 당신의 재산을 그들을 위해 내 놓았으면 하는 생각을 하고 계셨다. 학창시절 내가 야학교사로 봉사했을 때도 아버지는 많은 지원을 해주셨고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도청 근무 시절 설악잠업고등학교 설립에 관여했던 것도 그러한 생각에서 연유되었다는 것도 이제야 알았다.

어떤 방법으로 후학들에게 도움이 될 것인가? 결국 어려운 환경에 처한 어린 새싹들을 키우는 것에 나의 생각은 결론 내려졌다. ‘그래, 장학재단을 설립하는 것이다.’ 길거리에서나 주위에서 형편이 무척 어려운 사람들을 대하게 될 때마다, 무심히 지나쳐 버리던 나의 모습이 스스로 부끄러울 때가 많았다. 아버지의 뜻을 받들고, 늘 나의 가슴 속에 드리워져 있던 어려운 이들에 대한 죄의식을 다소간 씻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 놓은 것이 아니라, 마음의 기쁨으로 되돌려 받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껴 써라, 헛되이 낭비하지 말라’는 숱한 말씀 속에서 자랐던 내게는 아버지께 장학재단을 설립하자는 청을 드리는 것 자체가 커다란 고민거리였다. 생활에 별다른 어려움 없이 살아온 나였다. 그런 내가 아버지의 재산을 갖고 세상 사람들에게 선심을 쓰는 척하느라 장학재단이나 만들자고 철없이 떼쓰는 모습으로 비춰질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어느 날 나는 용기를 내어 내 의향을 말씀드렸다. 가만히 듣고만 계시던 아버지는 그렇지 않아도 그 구상을 오래 전부터 하고 있었다고 말씀하시며 꾸중은커녕 오히려 내 의견에 대해 고마워하셨다. 또한 문화원의 이범승 고문님과 학주 엄마(김지식 씨 부인)의 권유도 있었다며 구체적으로 설립을 준비해 보라 하셨다.

이렇게 해서 1995년 2월 형식적인 장학재단의 형식적인 창립총회가 이뤄졌고 3월 31일 재단법인 계명장학회의 설립허가가 나게 되었다. ‘계명’이란 이름은 아버지 함자 중의 ‘啓’자(이끌 계)를, 나의 아들 이름 중에 ‘明’자(밝을 명)를 따서 짓게 되었는데, 할아버지로부터 손자까지 그리고 그 후손까지도 뜻을 이어 밝은 사회를 이끌어갈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다.

계명장학재단에서는 매년 11월이면 가정형편이 어려운 50여명의 중·고등학교 학생들을 선발하여 학자금을 지원해주고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당신과 노년에 우정을 나누셨고 평생 교육계에 일생을 바쳤던 이범승 씨가 몇 번의 고사 끝에 다행스럽게도 후임 이사장직을 맡아 주셨다.

아버지는 당신의 피와 땀이 어우러진 소중한 재산을 그렇게 차곡차곡 사회에 환원시키고 저세상으로 가셨다. 나는 다음에라도 내 아들딸과 후손들에게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다. 심계택 할아버지는 평생 깨끗하게 살다 가신 분이시라고. 그분의 청렴한 삶이 가꾸어낸 재산의 일부는 너희 이웃의 문화발전을 위한 초석을 마련했고, 자라나는 새싹들의 미래를 위해 쓰여 졌다고······.

 

 

 

 

 

 

 

 

 

 

 

 

 

제 6 장 여 행

 

 

 

인생이라는 긴 여정

 

아버지는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가신 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소시민으로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기 위해 열심히 살면서 남보다 부지런히 많은 것들을 이루려고 노력한 분이셨다. 그런 만큼 열심히 모아온 재산으로 소신껏 인덕을 베풀고 소신껏 당신의 삶을 정리한 분이셨다. 나는 아버지의 인생을 정리해 보면서 감히 당신의 삶은 성공적이었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아버지는 당신 인생의 소중한 열쇠를 찾은 분이셨다.

일흔 일곱 해의 생애. 아버지는 그 긴 여정 동안 한 번도 쉰 적이 없으셨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언덕을 넘어가신 지금, 아버지는 이승의 고단함을 다 잊고 편안한 안식을 취하고 계실까. 오직 하나의 목표만을 바라보고 내달렸던 77년간의 당신 인생의 여정에서 미처 못 하고 가신 일들을 생각하며 안타까워하고 계신 것은 아닐까.

어쩌면 아버지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상에서 당신만의 또 다른 삶의 여행을 꿈꾸고 계실지도 모른다. 단 한 순간도 당신의 삶을 헛되이 보내지 않으려 했던 분이셨고 언제나 창조적인 그 무언가를 찾으려고 한 분이셨다.

아버지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명제는 ‘열심히’라는 단어였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생각하고, 열심히 사람과의 관계를 이어나간다면 언젠가는 당신의 근면성실함과 청렴함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인정받게 된다는 걸 아신 분이셨다. 그래서 그때그때 나타나는 주위의 평판이나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서는 꿈쩍도 하지 않으며 당신의 소신대로 밀고 나가셨던 것이다.

모든 것에 심혈을 기울이는 것, 그것만이 성공적인 인생임을 몸소 실천했던 아버지. 그런 당신의 인생 여정을 정리하면서 나는 몇 번씩 고개 숙여 경의를 표했다. 나의 아버지이어서가 아니라 우리 시대를 정직하게 이끌어온 인생의 선배로서 나는 진심으로 존경한다. 당신이 남기고 간 수많은 이야기들을 내 자식들과 자손들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일지 나는 글을 쓰면서 오래도록 생각에 잠겨야만 했다.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며

 

위 절제수술 - 1979년

“오늘 정말 즐거웠네. 그럼 다들 잘 가게······.”

어둑어둑 땅거미가 지는 오후였다. 공직을 떠난 뒤 농장에서 언제나 바쁜 삶을 보내시던 아버지는 잠업인들과 수원 모임을 가진 후 모처럼 흡족한 얼굴로 인사를 나누고 차가 주차되어 있는 곳으로 걸어가시고 있었다. 아버지는 멀리서 또 다시 인사하는 후배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막 포니픽업의 운전석 문을 열었다. 순간 웃음을 짓던 아버지는 가슴을 움켜쥐고 바닥에 쓰러지고 마셨다. 멀리서 아버지를 바라보던 후배들이 깜짝 놀라 뛰어오셨다. 아버지는 말 한마디 못하고 고통스런 얼굴로 고꾸라지더니 그대로 의식을 잃으셨다.

1979년 5월 중순경이었다. 오랫동안 위궤양으로 고생하시던 아버지는 급성 위출혈로 응급실로 실려 가시게 된 것이다. 그나마 하늘의 도움이 있었던 것일까. 운전 중에 그 상황이 닥쳤다면 대형 사고로 이어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버지는 명동 백병원의 중환자실로 옮겨지셨다. 내가 달려갔을 때는 위급한 상황을 넘기고 정신을 회복하신 상태였다. 병상에 누워 계신 아버지의 모습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언제나 아버지의 이미지는 강하고 무서웠는데, 초췌한 모습으로 누워서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내가 어른이 되어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연민을 느꼈던 순간이었다.

아버지는 나를 보더니 볼펜과 종이를 준비하라고 하셨다. 나는 경황이 없는 틈에도 아버지의 말씀대로 얼른 메모지를 찾아들고 서 있었다.

“철물점에 외상값 9만원이 있다······.”

아버지는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내게 받아 적으라 하셨다. 나는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종이 위를 채워 나갔다. 어디에 얼마, 어디에 얼마······. 몇 군데의 외상값을 불러 주셨고, 그 외에 돈 빌린 데는 없으니 그렇게 알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말씀을 받아 적으면서 어쩌면 아버지께서 죽음을 준비하고 계시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검진 결과 급성 위출혈 과다로 위를 절제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이 이어졌고, 나는 그 날 밤늦도록 수술실 앞에서 서성거려야 했다. 의사는 나를 수술실로 불러 넓게 펼쳐진 아버지의 절제된 위를 보여 주었다. 2/3 정도를 잘라 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어릴 때는 한밤중에 우리 방에 오셔서 잠자고 있는 우리들의 얼굴을 살피고 이불을 덮어 주시곤 했던 아버지이셨는데, 이제는 내가 누워 계신 당신을 옆에서 지켜 드려야 하는구나. 그렇게 강직하시고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으셨던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삶을 버리고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실 수도 있는 것이구나. 삶이 이토록 허무한 것이구나······. 나는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의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위 절제수술 이후에 아버지는 내게 자주 말씀 하셨다. 어느 날 갑자기 돌아가시게 되더라도 가장으로서 여러 가지 일들을 처리할 수 있도록 항상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으라고······. 그 후 고생하시던 위궤양은 없어졌고 그 일로 다시 병원에 가시는 일은 없었지만, 일과 더불어 술을 많이 드셨던 분이라 80년대 중반부터는 간경화라는 진단을 받으셨다. 아버지는 대체로 건강한 분이었지만 젊은 시절 너무나 많은 일을 하며 몸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큰 병을 갖게 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곤 한다.

 

 

돌아간 죽음의 사자

간경화로 늘 건강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아버지는 91년 가을 이후로 몇 번의 혼절 기미를 느끼곤 하셨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병원에 입원하여 각종 검진을 받아보셨지만, 그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92년 2월쯤인가 서기석 씨의 어머니가 돌아 가셨다는 전갈을 받았다. 아버지는 친형제처럼 지내던 서기석 씨가 상을 당하자 수원에 있는 장례식장으로 달려가 3일 동안 호상 노릇을 하셨다. 당신의 건강상태가 어떤지도 잊은 채 초상집에서 무리를 하신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직장으로 전화가 왔다. 농장으로 가기 위해 잠실의 아파트 현관문을 나가던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지셨다는 것이었다. 자동차의 비상등을 켠 채 정신없이 아파트로 달려오자, 아버지는 막 구급차에 실려지고 있었다. 다니던 중앙병원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나는 보호자 출입을 통제하며 막아서는 간호사 앞에서 망연히 서 있어야 했다.

중환자실의 그 유리문을 바라보면서 나는 혼돈 속에 빠져 버렸다. 이 급박한 상황을 의논하기 위해 누군가에게 연락을 드리고 그분에게 내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여쭈어야 할 것 같았다. 동전을 꺼내고 공중전화기를 찾으려는 순간, 나는 앞이 캄캄했다. 결코 전화를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찾던 그분은 바로 아버지 당신이기 때문이었다.

가족들이 하나둘 모였다. 모두들 근심 어린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중환자실에서 보호자를 찾았다.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기에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병상 앞으로 걸어갔다. 여러 명의 의사들이 모여 있었고, 아버지의 목에는 구멍이 뚫린 채 호흡기가 꽂혀 있었다. 심장충격기도 보였다. 이 모든 상황들은 운명을 앞두고 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나는 아득하기만 했다. 심장충격기가 당신 가슴에 대어지자 의식을 잃고 침대에 누워 계시던 아버지의 육신은 크게 요동쳤다.

의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마지막 순간이 될지도 모르니 임종을 지키라고 했다. 옆에 모인 식구들이 하나 둘씩 울먹이기 시작했다. 심장충격기로 인해 간신히 되살아났던 심장박동이 다시 멈추었다. 다시 한 번 큰 전류가 당신의 몸에 흐르자 동토에서 싹이 돋아나듯 소생의 숨결이 일어났다. 심장과 연결된 기계의 화면에 자잘한 그래프가 물결치고 있었다. 아버지의 심장이 따뜻한 피로 다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나는 눈물범벅이 된 채 그래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의사의 표정은 어두웠다.

너무 오래 의식을 잃은 상태여서 깨어나더라도 식물인간으로 사셔야할 것 같다고 했다. 심장이 멈추었던 횟수가 많아 이미 뇌신경이 모두 손상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였다. 누나와 동생은 울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었고, 아내와 장모님은 부처님께 빌었다. 이제 이 모든 것은 운명에 맡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며칠 동안 아버지는 의식을 돌이키지 못하셨다. 나는 조심스럽게 아버지의 몸을 주물렀다. 근육이 마비되지 않도록 팔다리 운동을 시켜 드렸다. 수건으로 몸을 닦아 드리며 ‘아버지 깨어나세요. 깨어나시기만 하세요.’ 하면서 가슴 속으로 울부짖었다. 그러길 며칠······. 내 간절한 목소리를 들으셨던가. 아버지는 의식을 회복하고 눈을 뜨셨다. 말씀을 못 하셨지만, 그 눈빛으로라도 무언가 하실 말씀이 있으신 것 같았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기적이라고 했다. 서서히 소생하시자 목에 이어졌던 호흡기가 떼어졌고 얼굴에는 혈색이 돌아왔다. 가족들은 저마다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말을 할 수 있게 되자 아버지는 천천히 내게 말씀 하셨다.

“꿈을 두 개나 꾸었구나······. 네 할아버지 산소 앞에 누워 있었는데, 네가 내 가슴 위에 올라타서 나를 짓누르더구나. 상구야······. 이러다 나 죽겠다, 하고는 소리쳤어. 또 다른 꿈은······. 검은 옷을 입은 6명의 저승사자가 나한테 다가오기에 이제 나는 죽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죽음의 사자가 저희끼리 하는 말을 듣게 되었어. 아직 사자 한 사람이 오지 않았으니 다시 갔다 와야겠다고······. 그러더니 곧 어디론가 사라지더구나.”

나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는 고개만 끄덕였다. 어쩌면 당신의 생은 거기까지였는지도 모르겠다. 노년에 당신이 세상에 베푼 공덕이 있었기에 죽음의 신이 아버지의 삶을 연장해 주었나 보다. 나중에 그 꿈에 대해서 어느 분이 말씀 하셨다. 광주문화원의 땅을 희사한 것이 큰 보시였기에, 삶을 더해 줄 테니 생을 잘 마무리 짓고 다시 오라는 전갈이었다고. 아버지는 그러한 고비를 겪고 나서 당신 인생을 정리하려는 움직임을 보다 구체적으로 보이셨다. 아련한 꿈이었던 장학사업을 추진하시며 당신 말년에 빛나는 공덕 하나를 더 쌓아두셨던 것이다.

 

 

선택의 기로에 서서 (다리 수술)

1996년 4월이었다. 추위가 풀리고 햇살은 완연한 봄빛을 전하고 있었다. 농장의 정원에도 때맞춰 꽃들이 피어났고 새들도 나무 사이를 오가며 봄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찬 기운은 감돌았지만 노년의 아버지에게도 봄 햇살은 찬란하게 비치고 있었다.

머리가 백발이 된 이후로 아버지는 많은 활동을 이전과 같이 하지는 못하셨다. 그래서 겨울은 당신에게 휴식의 시간들을 잠시 안겨주는 계절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지팡이를 짚은 백발의 노인이 되셨어도, 늘 그러했듯이 당신의 부지런한 발걸음을 멈추지 못하셨다. 봄이 되면 일거리를 찾아 무언가를 하겠다며 벼르고 계셨다. 그래서 겨울 내내 광주 집안에 계시면서도, 당신 머릿속은 많은 생각들로 늘 분주했던 것이다.

4월이 되자마자 아버지는 겨우내 가꿔주지 못했던 정원과 농장 주변의 일들을 둘러보시고 집사에게 정원을 손질할 것을 지시한 뒤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해 서울로 향하셨다. 늘 흐트러짐 없이 당당히 걸어왔던 아버지이셨지만, 세월의 흐름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나 보다. 아버지는 자동차에서 내리다가 그만 발을 헛디디어 맥없이 넘어지고 마셨다. 가벼운 낙상임에도 불구하고 큰 통증을 느끼게 되어 아버지는 곧바로 응급실로 향하셔야만 했다. 의사는 허벅지의 뼈가 부러졌다는 진단을 내렸다.

당장 수술을 받지 않으면 통증을 견딜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사는 수술 결정을 쉽게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수술 자체가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부러진 뼈를 금속막대로 잇고 깁스를 하면 되는 크게 어렵지 않은 수술이었지만 워낙 노쇠하셨고 간 기능 또한 현격하게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전신마취 후 깨어나지 않을 확률이 높았던 까닭으로 수술여부를 결정하지 못한 것이다.

깨어나지 못하실 확률은 셋 중 하나라고 한다. 아버지는 전혀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조금만 뒤척여도 엄청난 통증이 당신을 엄습해 오는 모양이었다. 수시로 고통을 호소하시는 아버지를 보며 나는 아무 것도 해드리지 못해 그저 안타까운 눈물만 흘렸다. 좋지 않은 결과에 대한 의사들의 우려는 이해가 갔지만 일종의 책임 회피로 수술 후 깨어나지 않을 위험성을 강조한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삼분의 일의 확률에 맡길 수는 없지 않은가. 재수술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결정 한 뒤 다시 번복할 수도 없는, 단 한번뿐인 선택이었다. 선택의 기로에 선 나는 걱정스런 얼굴로 아버지를 바라보며 초조해할 뿐이었다.

수술을 하지 않고 그 선택을 피하려면, 석고붕대에 전신이 묶인 채 천장만 바라보며 식물인간처럼 사셔야 한다는 얘기였다. 차라리 나의 팔 다리 하나가 떨어져 나가는 결정이라면 편했으리라. 돌아가시는 날까지 그런 고통을 안겨드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니던가. 나는 결정을 해야만 했다. 선택의 기로에 서서 떨리는 손으로 수술 동의서에 서명을 해야 했고, 당신의 삶은 또 한 번 운명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그런 나의 갈등과 가족들의 걱정 속에서 아버지의 수술은 진행되었다. 다행히도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회복도 빠르게 이어졌다. 나는 회복되어 가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감사했고 기뻐했지만 제대로 한숨을 내쉬는 것조차 죄스러웠다. 잠시였지만 아들인 내가 당신을 삶과 죽음의 경계선까지 끌고 갔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제는 저 세상에서 편안하게 나를 내려다보고 계실 아버지께 나는 지금 속으로 조용히 여쭤본다.

“혹시라도 그 결정으로 인해 아버지 서운하지는 않으셨는지요? 그렇다면 아버지 이제는 다 용서해 주시겠지요.”

 

 

 

어머니와의 만남과 이별

 

만남에서 결혼까지

여섯 살 난 어머니는 버드나무 아래서 울고 있었다. 외할아버지의 운구(運柩)가 집밖으로 나서는 것을 몰래 바라보면서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렸던 것이다. 10살 위 오빠와 6살 위 언니 등 삼 남매였던 어머니는 일찍 외할아버지를 여의고 외할머니와 외삼촌의 보살핌 속에서 분원초등학교 아래 나루터 인근에서 자랐다.

원래 외가는 남한산성에서 크게 일가를 이루며 남부럽지 않게 살던 집안이었다. 그러나 일제시대 때 민족성 말살 정책에 따라 이주 당하게 되었고, 결국 분원에 자리를 잡게 되었던 것이다.

외할아버지를 일찍 여읜 어머니는 언제나 수줍음을 타는 말없는 소녀였다고 한다. 가장 역할을 했던 외삼촌은 가게를 꾸리고 나의 어머니인 여동생에게 가게 일을 맡겼다. 버스 정거장근처에 있던 그 가게는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는데, 아버지의 누나인 고모님도 그 길을 오가며 참하게 일을 하고 있는 어머니를 보게 되셨다. 분원을 몇 번 오가며 조용하고 차분한 어머니를 눈여겨보았던 고모님은 동생인 아버지에게 어머니를 소개시켜 주시기로 마음먹고, 서울 남대문 근처에서 장사를 하시던 어머니의 언니에게 매파를 전하게 되셨다.

당시 아버지는 소사(현 부천)에서 잠종 교육을 맡고 계셨는데, 매파가 중매의사를 전하자 외가에서는 광주 천현골에서 오랜 세월 전통을 이으며 살던 심 씨 집안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었고,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를 좋게 봐서 결국 맞선을 승낙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남대문 이모님 댁에서 어색한 첫 만남을 이루게 되셨다.

“처음 뵙습니다. 심계택이라고 합니다.”

“네······. 안녕하세요.”

유난히 수줍음을 탔던 어머니는 겨우 인사만 나누고는 아버지 앞에서 아무 말씀을 하지 못한 채 고개만 숙이고 계셨다. 그런 어머니를 찬찬히 바라보시던 아버지는 더 이상 긴 이야기 없이 이모님께 말씀을 드렸다.

“며칠 후 반지를 해서 보내겠습니다.”

말을 끝내자마자 아버지는 직장 일로 가봐야 한다면서 일어섰다. 적극적이고 활달했던 아버지는 어머니를 딱 한번 보시고 몇 마디 얘기도 나누지 않고 바로 당신의 결혼을 결정하셨다.

50년을 넘게 살아오신 두 분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이때가 1948년 초가을, 아버지는 25살이었고 어머니는 22살이었다. 고향에서 혼례를 치르신 두 분은 아버지의 직장인 소사의 잠종제조소 근처 단칸 셋방에 보금자리를 마련하셨다.

두 분은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빈손으로 모든 걸 시작하셨다. 오직 젊음과 미래에 대한 꿈 하나만 갖고 당신들의 인생을 개척해 나가기로 마음을 다지신 것이다. 그 춥고 배고픈 시절 안 해 본 것이 없을 정도로 부지런하셨던 두 분은 6.25의 비극을 거쳤고, 전쟁 중에 운명적인 이별과 해후의 순간도 있었다.

모든 것이 척박했던 50년대에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하며 매사에 성실로 임하셨던 아버지는 잠업을 통한 경제부흥에 큰 뜻을 세우고 공직생활에 매진하셨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내조하며 늘 부지런하고 검소한 생활 속에서 1남 2녀를 키워 오신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 아버지 어머니의 금실이 안 좋다는 생각을 하며 자랐다. 두 분의 살아온 인생 여정이 애틋한 감정을 키우기에 어려운 탓도 있었겠지만 성격이 맞지 않아 자주 싸우시는 모습도 많이 보며 자라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늘 아버지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오신 한국의 전통적인 어머니상을 가진 분이셨고, 아버지는 가부장으로서의 엄격함과 완고함을 보이며 가정을 이끄셨다. 어머니가 차마 겉으로 표현 못하시는 아버지에 대한 섭섭함을 난 잘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렇게 미운 정 고운 정이 쌓여 부부만의 깊은 사랑이 완성되는 것이 아닌가.

어머니에게 잔정을 베풀지 못하고 늘 완고하셨던 아버지는 말년에 어머니를 먼저 보내신 이후에는 당신이 평생 함께 했던 아내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많이 드러내셨다. 부부란 인연은 하늘만 아는 아주 특별한 관계이다. 하늘이 주신 섭리대로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오셨던 두 분이었기에 하늘나라에서도 다시 만나 해로하실 거라고 생각한다. 평생 동안 너무나 많은 고생을 하셨던 두 분, 저 세상에서는 정말 편안하고 행복하시겠지······.

 

 

인연의 마지막 고리

아버지의 회갑 여행 이후, 노년이 되신 두 분은 자주 여행을 하셨다. 또한 두 분 뿐만 아니라 가족들과의 여행도 자주 이어졌다. 그 옛날 오로지 일만을 삶의 전부로 알고 지내시느라 가정을 등한히 했던 것을 미안해하시는 듯, 여름철이면 어머니 그리고 아들딸과 손주 등 가족 모두를 이끌고 휴가를 떠나곤 하셨다.

이렇게 국내 여행은 자주 있었지만 남들은 쉽게도 떠나는 해외여행을 함께 할 기회는 오지 않았다. 땅을 팔아 여유자금도 있었지만 아무도 쉽게 해외여행을 꿈꾸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저 아버지의 뜻에 따라 매년 속초의 콘도에 숙박을 정했던 것이다. 그래도 그런 연중행사가 이어짐으로 해서 우리는 가족 간의 화합과 사랑을 확인할 수 있어서 늘 행복했다.

어느 날 공휴일이면 찾아뵙던 아버지께서 가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말씀하셨다.

“우리 이번 겨울에는 바다 건너에 한번 다녀올까?”

“바다 건너요?”

아버지의 입에서 해외여행 얘기가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기에 가족들은 모두 놀라고 있었다. 한 번도 해외여행을 가보지 못한 누나와 조카들에게 세상 구경 시켜주는 의미로 가족 모두 동남아 가까운 어디라도 다녀오자고 하신 것이다. 가족들은 모두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좋아했다.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계획을 세웠고, 동남아 중 가장 비용이 적게 드는 태국을 다녀오기로 하고 모든 여행비용을 지불했다. 처음 비행기를 타보는 조카와 우리 아이들 모두 기쁨에 가득 차 그 날을 손꼽았다. 연로하신 부모님에 대한 걱정에 누나와 아내는 처음부터 여행을 반대했지만 아버지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그대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비행기를 탈 날짜를 며칠 앞두고 아버지의 복수가 또다시 차올랐다. 90년대 초 이후 종종 있던 일이라 가벼운 입원으로 치유할 수 있는 병환이었지만, 여행을 강행하기는 무리가 있었다. 때문에 가족들은 여행을 취소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러나 아버지의 반대가 완강하셔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아버지, 그러면 제가 남아 있겠습니다.”

내가 남아 아버지를 돌보고 다른 가족들은 계획대로 여행을 하는 게 좋겠다고 하자 아버지는 여전히 고개를 저으셨다.

“그래도 상구 네가 가야 가족들이 해외여행에서 우왕좌왕하지 않을 거다. 네 엄마만 옆에 있으면 되니 네가 가서 가족들과 잘 놀다 오거라.”

아버지의 말씀은 불문율이었다. 우리는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야 했다. 우리들끼리 여행을 떠나는 대신 간병인을 부르겠다며 안심을 시키셨기 때문에 우리는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공항을 떠났다. 처음 갖는 가족끼리의 해외여행은 즐겁게 이어졌다. 부모님과 함께 하지 못함이 애석하기는 했지만 모두들 행복하게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수 있었다.

돌아와서 안 사실이지만 아버지는 처음부터 간병인은 부르시지도 않았고 홀로 큰 병실에 있는 것은 낭비라며 1인실에서 2인실로 입원실을 옮기셨다. 아버지 성화가 오죽했으랴. 항상 말씀이 없으시던 어머니는 불만이 있어도 당신 가슴 속에 그 모든 것을 묻으시고 아버지의 의사를 따라 그 곁에서 순종하셨으리라. 그렇게 두 분은 병원에서 며칠 동안 두 분만의 시간을 보내셨다. 안타깝게도 그 며칠 동안이 미운 정 고운 정으로 살아오신 두 분만의, 이별을 위한 마지막 시간이었던 것이다.

여행을 마치고 비행기에서 내린 우리들은 각기 짐을 풀고 저녁 식사를 함께 하기 위해 병실로 모이기로 했기에 동생과 나의 가족들이 먼저 병실로 찾아갔다.

아버지는 밝은 모습으로 우리를 반기셨다.

“여행은 재미있었니?”

“예, 아버지 덕분에 아주 좋은 여행을 하고 왔어요.”

2인실이라 옆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더 이상 다른 얘기를 나누지는 못했다. 저녁 식사를 하러 나가기 위해 어머니는 서둘러 아버지 외출복을 챙기시고 옷을 입혀 주셨다. 옷을 갈아입으신 아버지와 며칠 동안 간병을 하시느라 피곤해 보이시는 어머니를 모시고 우리는 10층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어갔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병원 주차장에 막 도착했다는 매형의 전갈이었다. 모두들 어디로 가서 맛있는 저녁을 먹을까 대화를 나누며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누나 식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어머니는 엘리베이터 옆에 있는 간이 휴게실로 천천히 발길을 옮기고 계셨다. 휴게실의 텔레비전에서는 소음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나는 여행에서 돌아온 나른함에 잠시 눈을 감았다. 그때였다.

“어머니, 왜 그러세요!”

아내의 외마디 소리가 들려 왔고 나는 어머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머니는 쓰러지며 몹시 떨고 계셨다.

“뭐하고 있어요!”

아내의 외마디 소리가 또 들렸다. 나는 마치 꿈결인양 느린 동작으로 쓰러져 뒤로 누우시는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내의 목소리에 나는 재빨리 달려갔고, 인공호흡이 필요한 위급한 상황임을 느끼고 나서야 어머니에게 큰 숨을 불어넣었다. 당황한 아내는 서투른 손길로 가슴을 눌러댔다.

간호사와 의사들이 달려 왔다. 단지 몇 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어머니는 이동침대에 실려 옮겨졌고, 당황한 가족들은 모두 어쩔 줄 몰라 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데도 아버지의 모습은 그저 담담한 듯 보였다. 모두들 나가 있으라는 의사들 말에 나는 홀로 멀찌감치 서서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다. 몇 번인가 아버지의 얼굴이 보인다. 훌쩍거리는 가족들의 모습도 보인다. 야속하도록 어머니의 가슴을 눌러대는 의사들의 모습이 보인다. 전기 충격기에 몸이 들썩거리는 어머니의 모습도 보인다. 나는 이 모든 상황들이 여행의 피로힘 속에서 펼쳐지는 한편의 꿈은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 저녁 7시부터 시작되었던 이 슬픈 꿈은 4시간여 만에 그만 막을 내리고야 말았다.

그렇게 어머니는 더 이상 우리를 바라볼 수 없게 되셨다. 우리가 찾아가 뵙고 돌아올 때면 우리의 그림자가 다 사라질 때까지 계단 끝에서 한없이 우리를 바라보시던 어머니······. 이제는 당신이 발걸음을 옮기시어 짧은 그림자도 없이 가버리고 마셨다. 한 마디 유언조차 못하시고 그저 자식들이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모습에 큰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던 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어머니는 가셨다. 그 시간은 자정이 가까운 11시 50분이었다.

지금 어떤 일이 내게 닥친 것인가? 그렇게도 당당하시던 아버지 당신은 오늘 왜 이리도 안절부절못하시는가? 어머니 앞에서는 늘 커다란 나무이셨던 아버지, 당신은 오늘 왜 이리도 작은 모습이신가? 나는 어머니를 갑자기 잃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아버지의 허탈하신 모습에 반추된 어머니의 모습을 바라보며 깊은 슬픔에 잠기고 말았다.

 

 

이별 - 순결한 흰 눈처럼 떠나신 어머니

그래 누구나 한번쯤 겪는 일이다. 이미 가신 분은 어디로 가신 건지 알 수 없지만 혹시라도 하늘에서 보시고 계신다면 이렇게 안타깝게 울며 슬퍼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조금 더 보여 드리고 싶었다. 시간상으로 보자면 이틀밖에 안 되는 삼일장······.

“아버지 오일장으로 해요.”

그러나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난 나의 어머니와 이승에서 단 하루라도 더 곁에 머물고 싶었다. 이 갑작스런 슬픔을 당신 육신에 뿌리고 싶었다.

의사가 끊어준 어머니의 사망진단서에는 ‘사망시간 1999년 1월 27일 0시 1분’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버지는 한없는 눈물을 쏟아 내셨다. 어머니 당신이 떠나고 싶었던 날에 떠난 것일 텐데 그 뜻에 따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우리는 삼일장으로 치렀다. 단 10분을 남겼던 첫째 날은 지나가고 이틀째 날이 밝아 오면서 겨울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루해가 저물면서 마지막 이별의 밤을 맞이해야 했다.

어머니의 운구를 실은 장례차는 누나와 동생이 사는 잠실을 거쳐 아들이 사는 문정동을 지나쳤다. 당신이 머무시던 광주 그 안방 그 부엌을 바라 보셨다. 어머니가 처녀 시절 살아오셨던 분원, 그 마을을 팔당호수 건너로 바라보며 그렇게 이승의 마지막 여정을 돌고 돌아 떠나 가셨다.

팔당 예봉산을 오르실 때는 겨울 하늘답지 않게 하늘은 깊고 푸르렀다. 아버지는 지난 가을에도 당신이 영면하실 그곳을 찾아 흙 한줌 더하셨건만 차가운 어머니의 운구를 따라 함께 오르실 생각은 차마 못하시고, 산 아랫마을 선술집에서 소주 한잔을 기울이셨다. 그날 저녁 어머니의 영가는 당신이 태어나셨던 남한산성에 있는 오래된 절에 모셔졌다.

굽이진 길을 따라 절을 내려 올 때는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다음날 또 다시 날이 밝아 왔을 때는 세상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어머니 당신의 영혼처럼 순결한 흰 빛으로······. 그래, 그랬었다. 어머니 당신은 떠나는 날까지 오직 자식들 생각뿐이었다. 전날은 이별의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는 자식들의 마음을 헤아리듯 빗물을 내리셨다. 예봉산 중턱에 모신 다음날에는 당신의 순결하고 평온한 마음을 닮은 흰 눈으로 그 산길을 하얗게 덮으셨다.

‘얘들아, 걱정하지 말거라. 엄마가 저 위에서 너희를 지켜보마. 이제는 이 슬픔을 빨리 잊고 아버지를 보살펴야지······.’

이제는 잊어라 잊으라 하시며 하얀 눈으로 세상을 덮으신 어머니, 어머니는 그렇게 당신의 삶을 마무리하셨다. 가시는 날까지도 너무나 고결하게 가신 어머니······.

‘엄마, 나의 엄마! 엄마 몫까지 아버지를 열심히 모실게요. 부디 그곳에서는 평안하세요.’

어머니의 장례를 마치고 아버지는 다시 광주로 가셨다. 당신을 모시고자 하는 자식들의 간곡한 청도 완강히 거절하며 아버지 당신은 혼자 지내기를 고집하셨다. 어머니가 기거하시던 안방에는 매일 촛불이 켜져 있었고 향이 피워져 있었다. 으레 아침에 깨어나시면 틀곤 하시던 TV 소리는 그 후로 들을 수 없었고 대신 어머니의 성화를 대신하려는 듯 불경테이프만 카세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엇이 아버지 당신의 가슴을 그리도 도려내었던 것일까? 언제나 큰 소리로 싸우기만 하시던 두 분이었는데······.

그해 그 겨울은 그렇게 쓸쓸하게 지나갔다. 40년간 살아온 내 삶에서 처음, 그리고 마지막으로 맞이한 어머니와의 이별이었다.

 

 

 

아들과의 마지막 일본 여행

 

농장에 봄꽃이 피기 시작하면서 아버지는 아내를 잃은 슬픔을 조금씩 추스르시는 것 같았다. 서울 아들집에 새로 마련해 놓은 당신의 방을 마다하시고, 극구 홀로 농장에 계시겠다고 하셨다. 두 명의 딸과 며느리는 매일 돌아가며 찾아가 뵈었지만, 자식들의 보살핌이 아내를 잃은 슬픔을 달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하셨나보다.

오직 당신은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젊은 시절 당신의 땀방울을 남기셨던 시골 구석구석을 다니셨고, 당신 평생을 몸담아 온 잠업 일로 알게 된 아름다운 인연들을 만나 회포를 푸는 것으로 소일을 하셨다. 그렇게 어머니의 빈자리는 조금씩 채워지는 듯 했고 시간은 흘러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어느 날 아버지는 나를 부르시더니 일본 오끼나와에 가보고 싶다며 여행사에 알아보라고 하셨다. 알아볼 것도 없이 여행은 무리였다. 더욱이 낯선 여행객들 틈에 끼여 해외로 나가시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몸도 성치 않으신 분이 일본 여행을 가고 싶어 내게 부탁까지 하시다니······. 아버지를 보며 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때 마침 내가 속한 어떤 모임에서 4박5일 동안 일본여행을 가자는 얘기가 오고갔다. 나와는 아주 절친한 분들과 가는 여행이었기에, 아버지와 함께 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봤다. 거동이 쉽지 않으신 아버지를 모시고 가더라도 큰 폐를 끼치지 않을 것 같기에, 그리고 아마도 운명하시는 그 날까지도 어디든 다니셔야만 할 분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나는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저의 모임에서 일본 여행을 가는데, 함께 가시겠어요?”

“그래? 가고말고······.”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여행 소식에 기뻐하며 좋아하셨다. 얼마나 더 사신다고 소원하는 여행을 못하실까. 내가 직접 모시고 다니면 되겠다 싶어서 만반의 준비를 하여 여행 일정을 잡았다.

아버지로서는 젊은 시절부터 몇 차례 다녀오셨던 일본여행이었다. 우리는 교토에 도착했다. 나는 당신의 추억이 어린 교토의 이곳저곳을 함께 다녀보고 싶었다. 노인이 되어 버린 아버지께 조금이라도 젊은 시절의 추억을 되새겨 드리고 싶어서 교토의 기생집에 모시고 가겠다고 말씀 드렸더니 아버지는 다른 일행들을 생각하여 삼가자며 반대를 하셨다.

식사를 끝내고 이동하기 위해 식당문을 나섰다. 반주로 드신 술과 여독 때문인지 아버지는 걷기에 힘이 부치시는 것 같았다. 버스가 세워진 곳까지 노인의 걸음으로는 꽤 멀었다. 한쪽에서 부축해 드리고 지팡이를 짚으며 걸으셨지만 몇 걸음 못 가서 아버지는 멈추고 마셨다.

“아버지, 제 등에 업히실래요?”

비록 당신이 생명을 주었던 자식들이지만, 결코 자식들에게 기대지 않으시려던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있었기에, 등에 업히시라는 말을 꺼내기가 송구스러웠다. 그런데 의외로 아버지는 내 말씀에 순순히 응하셨다.

“그래······. 좀 업혀 가자!”

그 말씀에 나는 가슴 저 밑바닥에서 밀려오는 슬픔으로 가슴을 저며야만 했다. 어느덧 자식의 등에 업혀야만 될 만큼 당신의 기력이 쇠했단 말인가? 당신의 몸은 너무나도 가벼웠다. 그만 내려놓으라는 말씀은 허공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우리의 모임은 미하라시의 어느 단체와 자매결연이 되어 있었다. 그 단체의 창립기념일 행사에 부친도 몇 번 참석했고, 10년이란 세월의 흐름 속에서 세대교체가 되었지만 당신의 지인도 제법 있었다. 비록 거동은 불편했지만, 그들의 환영 속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축사라도 하고 많은 이들의 박수도 받게 해 드리고 싶었는데, 처음의 내 여행 계획과는 어긋났다. 제한된 초청장 때문에 아버지와 나 그리고 몇몇 일행은 미하라시에 머물지 못하고 바로 히로시마로 와야 했다.

행사에 참석하러간 사람들 때문에 히로시마에서는 비교적 자유로운 시간이었다. 오히려 잘되었다 싶어 여유롭게 백화점을 들러 쇼핑을 하기로 했다. 매장을 돌아보시던 아버지가 지팡이 파는 점포 앞에서 이것저것 살펴보고 계신 것을 보니, 다음에는 대만으로 여행을 가자던 아버지의 말씀이 스쳐지나갔고, 또한 쿄토에서 내 등에 업히셨던 모습도 떠올랐다. 차라리 이 기회에 편히 여행을 다니실 수 있도록 휠체어를 사는 건 어떨까 생각했다.

“아버지, 지팡이보다는 휠체어를 사는 게 어떨까요?”

‘휠체어 타고 다닐 내가 아니다!’ 라고 버럭 화를 내실 것 같았기에 차마 휠체어를 사자는 말씀을 드리기 어려웠다. 하지만, 돌아가실 때까지 어디든 가고 싶은 곳을 가셔야 직성이 풀릴 분이 아니던가. 당신이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는 날까지 맘껏 여행을 다니시도록 해드리려는 생각에 조심스레 말씀을 드렸던 것이다.

“음, 그래······. 한번 보자구나.”

정말 이젠 많이 늙으셨구나. 다리 수술 후 휠체어 이야기를 꺼냈다가 혼났던 기억이 엊그제 같건만······. 여러 휠체어들을 차근차근 둘러보신 아버지는 종업원과 가격을 흥정하기 시작하셨다. 도저히 할인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아버지는 에누리 없는 장사가 어디 있느냐며 판매원과 실랑이를 하셨다. 일본의 백화점까지 와서 아버지는 돈 한 푼 아끼겠노라고 그렇게 애를 쓰셨던 것이다. 얼마 후 매니저가 오고 다시 한 번 긴 흥정 끝에 기어코 20퍼센트 할인을 해서 사시고야 말았다. 돈을 지불하자마다 당장 그 휠체어에 앉으시더니 내게 말씀하신다.

“얘야, 밀어 봐라!”

일본에서 어렵게 할인해서 산 휠체어는 그 백화점 매장에서 버스 승강장까지 단 한번 타고 더 이상 소용없게 되었다. 휠체어는 지금도 광주의 아버지 집에 있다. 결코 다시는 그 주인을 맞이할 수 없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휠체어는 아버지가 주무시던 그 방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일본에서의 마지막 밤. 나는 여행사에서 준비한 식사 일정을 취소하고 단촐해진 일행과 함께 고급 일식집으로 갔다. 아버지 옆에 기생을 앉혀 식사와 술시중을 들게 할 수 있는 곳은 아니었지만, 일본인 여주인과 종업원의 깍듯한 대우와 정갈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곳이었다. 며칠의 여독에 피곤해 하시던 아버지의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피었다. 아버지의 유창한 일본어와 나 어릴 적 손님 술상에 항상 놓여 있던 중탕으로 따뜻해진 정종. 아버지와의 일본여행은 그렇게 정겨웠다. 무릎 꿇고 따라 드린 정종 한 잔에 흐뭇해하시며 당신은 평화로운 추억에 잠겨 일본의 밤풍경을 바라보고 계셨다. 아버지의 가장 편안한 표정을 나는 그곳에서 보았다. 이것이 아버지와 나 단 둘만의 마지막 추억이었다.

 

 

 

언덕 넘어 가시던 날

 

병상에 누워 맞은 희수(喜壽)

고희를 지나신 후 아버지는 몇 번인가 삶의 고비를 넘기셨고 그 후로도 일상처럼 병원을 왕래하시고 입·퇴원 하셨다. 1999년 12월 20일. 그 날도 늘 있었던 입원으로 생각하고 그리 무겁지 않은 마음으로 응급실을 거치게 되었다. 아내는 수속을 밟기 위해 뛰어다녔고 누나와 동생은 교대하기 위해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매형과 나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걱정스레 서 있었다.

아버지께서 지나간 이야기를 꺼내신다. 당신이 군대 가실 때 동네 사람들이 우마차에 당신을 태우고 광주 천현골(현 하남시)에서 용산까지 배웅 나왔다는 말씀이셨다. 생전 처음 들려주시는 것이라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당신 병세가 걱정스러웠으므로 그저 흘려들었다. 어쩌면 아버지는 무의식 속에서나마 지난 일들을 되짚으며 생을 마감할 준비를 하고 계셨는지도 모르겠다.

잦은 병원출입으로 입원 수속에 익숙해 있던 아내가 당일로 어렵다는 입원 승낙을 받아냈다.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당신의 상태는 예전과 다른 증상들을 보이기 시작했다. 목이 쉬어 말씀을 하기 힘들게 되셨고, 정신도 몇 번인가 혼미해졌다. 가족들은 아무래도 이번 입원이 심상치 않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모두들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의사들은 위험한 증상은 아니고 조만간 회복이 되실 거라며 우리를 안심시켰다. 나는 의사의 말과 함께 그 동안 아버지의 병력을 생각하면 별거 아니리라는 생각에 안도의 숨을 쉬기도 했다. 이 보다도 더 무섭고 힘들었던 고비가 얼마나 많았던가. 그 때마다 오뚝이처럼 일어서셨던 분이 아니던가.

입원하신 지 일주일쯤 뒤인 성탄절 다음 날 아버지는 77세 희수(喜壽)를 맞이하셨다. 크게 잔치를 베풀어드려야만 하는 기쁜 날이었다. 환갑잔치도 칠순 잔치도 거르고 맞이하신 날이었기에 우리로서는 당연히 여러 친지와 지인들을 모시고 축하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입원 전에 당신께서는 어머니의 1주기도 지나지 않았는데 무슨 잔치냐며 마다하셨다.

환갑 때는 내 나이가 어렸다는 핑계로 지나칠 수 있었지만, 칠순 때는 손주도 보셨으니 남들처럼 술잔 받으시고 오랜 벗들과 어우러져 한바탕 잔치를 벌렸어도 되셨을 텐데 끝내 마다하고 가까운 친구 분들과의 만남만을 나누셨다. 그러고는 여러 어려운 고비들을 넘기시고 희수를 맞이하셨는데 이제는 병실에 누워 계실 뿐이다.

도저히 꺾을 수 없는 당신 고집 때문에 희수 생신상도 집에서 가까운 이들만 식사를 하기로 계획하고 있었던 터였다. 병실에 계신 아버지는 아들과 며느리에게 성화를 내신다. 빨리 가서 손님을 접대하고 고생하는 친척들에게 차비도 건네주라고 하신다. 노랭이 소리를 들을 만큼 차가우시던 분이······. 여러 가지 미련이 남아 그러신 걸까? 아니면 이전처럼 가성(假性) 혼수상태이신가? 의사들은 아버지 상태가 곧 호전될 것이라고만 말한다. 하기야 칠팔년 전에도 이 보다 더한 혼수상태도 많았지만 세상을 향해 건재하심을 보이지 않으셨던가. 나는 이번 병환도 그리 걱정할 것 없으리라는 쪽으로 생각하고 싶었다.

결국 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아내와 나는 농장으로 향했다. 사전에 미리 연락을 드렸기에 손님은 한 분도 오시지 않았고, 우리는 몇 시간 동안 집안 청소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는 다시 병원을 찾았다.

“심 시장도 왔냐? 친척들에게 차비는 주었지? 그래 그래······. 잘했다. 아가도 수고했다!"

우리는 거짓말로 손님을 맞이했다고 아버지께 말씀 드려야했다. 여전히 목은 쉬었지만 당신의 정신은 맑아지신 것 같았다.

‘아······. 이제 당신의 기력도 많이 쇠하셨구나. 어쩌면 이렇게 병실을 집 삼아 오래도록 계셔야 할지도 모르겠구나. 언젠가는 원치 않는 그 날이 오겠지만, 비록 병원일지라도 불편한 것 없이 편히 지내실 수 있도록 해야겠구나.!’

나는 점점 쇠약해 가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그렇게 혼자 생각하고 있었다.

 

 

8일 후에

막혔던 목은 깨끗이 낫지 않았지만 기력은 곧 회복하셨다. 자꾸 밖으로 침대를 끌고 나가 보고 싶다하셨다. 몸을 일으켜 세워보라고 하신다. 한번 발걸음 내딛어보겠다고 하신다. 그러나 당신 마음대로 움직여 드릴 수는 없는 상태였고, 맑은 정신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혼미해지시길 몇 번······.

연말이었고 거리는 가는 해를 아쉬워하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특히 세기말에다 또한 뉴밀레니엄이라고 해서 어느 곳에서든 기대와 희망으로 부풀어 있었다. 그런 세상일들은 이미 남의 이야기가 되었고 그날 누나와 아내는 우울한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 누나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아내는 아버지 곁에서 손을 잡고 앉아 있었다.

“아가야······. 나······ 8일 후에······ 잘······ 준비······ 하려므나!"

“예? 아버지 뭐라고요?"

아버지는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없을 정도로 기력이 약해지셨고 정신마저 혼미해지셨다. 아내는 아버지가 전하는 그 이야기를 다 알아듣지 못한 채 안타까워했다. 아버지는 더 이상 말씀하지 않으셨다. 아내가 손을 내밀자 알 듯 말 듯 8일이라는 글자를 희미하게 쓰셨고 아내는 무슨 뜻일까 고개만 갸웃거렸다.

1999년이 저물었다. 한 세기가 바뀌는 시점이었다.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어 모두들 분주히 미래를 준비하는 그런 때였다. 새해가 되자 4명밖에 되지 않는 손주들을 병실로 데리고 와 새해 인사를 시키고,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 왔다. 아침과 저녁 두 차례 문안 인사를 드리며 며칠이 지났다.

1월 4일, 문안을 마치고 막 병실 문을 나서려는 순간 아버지가 찾으신다.

“좀 더 있다 가거라.”

전에 입원해 계실 때는 아침에 잠시 얼굴을 뵙고 나면, 사무실에 빨리 나가라고 채근하곤 하셨다. 하지만 그날은 좀 더 있으라고 하신다. 아버지와 단 둘이 함께 한 시간들이 떠올랐다. 어릴 적 “상구야!" 부르시며 다리 주물러 달라고 하시던 때가 있었다. 대학 실패의 좌절을 안은 아들에게 걱정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격려의 말씀을 전해주시던 때도 있었다. 술에 잔뜩 취해서 서울에 미처 오지 못하고 부모님 곁에서 잠자기 위해 농장을 찾았을 때 잠 못 이루고 계시다가 “뭐하다가 이제 왔냐?”고 버럭 화내며 물으시던 때······. 그렇게 당신과 나, 단 둘만의 짧은 기억들이 떠올랐다.

병실에 계시며 갑자기 나와 단둘이 있고 싶은 아버지······. 무엇을 생각하고 계신 걸까? 나는 지금 무엇을 해 드려야 하는가? 나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며 가던 걸음을 멈추고 의자에 앉았다. 아버지는 나를 한참 바라보시더니 당신을 일으켜 세워 걷게 해 달라고 하신다. 걷고 싶어하신 당신께 나는 순간 짜증을 부리고 말았다. 당신도 이제는 누워 계신 걸 익숙하게 생각하셔만 하기에 나는 부축해도 걷지 못할 아버지를 일으켜 드릴 수 없었다. 짜증 섞인 내 모습에 더 이상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왜 그 때 조금 더 살갑게 해드리지 못했을까. 그 생각을 하면 나는 지금도 명치끝이 너무나 저리기만 하다.

1월 5일이었다. 사무실 근처에 있는 차 정비소에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 아버지 상태가 좋지 않으니 빨리 병원으로 오세요!"

전화를 끊고 서둘러 병원으로 가는데 다시 또 울리는 전화벨소리······.

“여보! 빨리 와!"

아내의 울음소리는 이미 모든 걸 말해 주고 있었다. 병실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이미 정신을 잃으신 상태였다. 아버지 귀에 입을 바짝 대고 “상구 왔어요!” 큰소리를 쳤다. 그러나 아버지는 감은 눈을 다시 뜨시지 않는다. 아버지······. 아버지······.

 

 

기나긴 여행의 마지막 길

아무리 눈길을 맞추고 싶어도 꼭 감긴 눈은 떠지지 않았고 “상구야!” 하며 부르시던 입술은 굳게 다물어 있었다. 아버지는 바로 처치실로 옮겨졌고, 의사들이 모였다. 일 년 전 우리 곁을 떠나시려는 어머니를 그저 멀리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던 그 자리였다.

언제나 오뚝이처럼 일어나 환하게 웃으시던 당신이었기에 또다시 생사의 기로에서 죽음을 떨치시고 식구 모두의 기둥으로 일어나 앉으시리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게 아니었다. 나에겐 아직 먼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의식을 잃은 아버지를 뵙자 나는 마지막임을 실감하고 두려워 떨게 되었다.

몇 시간이 흘러가도 아버지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다리를 꼬집어도 더 큰 자극을 해봐도 반응이 없으시다. 이제 감각조차 잃어 버리셨다. 또다시 전기 충격기가 당신의 육신을 뒤흔들면서 꺼져가는 심장의 박동을 되살렸다. 산소 호흡기는 여전히 당신의 가슴 언저리를 부풀렸다가는 오므리게 하고 있었다.

내과, 심장과, 중환자실 등등의 많은 의사들이 오고 갔지만 더 이상은 다른 방법이 없다고 말할 뿐이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다시 깨어나시기를 기대하며 간절히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가능성은 없지만, 가족들이 굳이 원한다면 중환자실로 옮기자고 말한다.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아내가 울먹이며 말한다. 어제와 오늘 낮에 집에 빨리 가자고 보채셨단다.

“아가야······. 집에 가자······. 나 빨리······ 집에······ 데려다······ 주려므나······. 빨리······.”

아내는 아버지가 집으로 가자고 하셨다는 말을 되새기며 울고 있었다.

언젠가 사촌형이 내게 한 말이 생각났다.

“작은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상구 네가 집에서 모신다고 했다며? 작은아버지가 그 말씀을 하시며 많이 좋아하시더구나.” 그래 그랬다. 어느 날 우연찮게 아버지 임종에 대해 말씀을 나누게 되었을 때 “아버지는 집에서 꼭 모실 거예요.” 라고 아버지께 무뚝뚝하게 한마디 말씀을 드렸었다. 그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겉으로 비록 말씀은 없으셨지만 속으로 무척 좋아하셨던 당신의 마음을······.

어머니는 병원에서 장례를 치렀다. 자식들 고생하는 것을 원치 않아 하실 어머니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그때 아버지 당신이 말씀 하셨다. “내가 죽으면 집에서 큰 일 치르는 것은 너무 고생이니 병원에서 치르고 하룻밤만 농장 집에서 머물다 가게 해 주렴.”

중환자실로 옮기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병원에서 임종을 맞이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당신이 원하시던 대로 당신의 정이 가득 쌓여 있는 당신 집에서 마지막을 보내셔야 했다. 영혼이 육신에서 떠나는 그 순간 당신의 손때가 묻은 그곳을 내려 보시면서 하늘로 향하게 해 드리고 싶었다.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나는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중환자실로 모실 것인가? 더 이상 의식도 감각도 회복 못하시는 당신을 농장 집으로 모셔야 하는 것인가?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말고 중환자실로 모시길 원하는 가족들의 희망이 있었다. 그래, 아직 살아 계신다. 지금 집으로 모신다면 마지막 숨결을 내가 빼앗아가 버리는 것은 아닐까? 어찌할 것인가?

‘아, 아버지 당신께 여쭙습니다. 아버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합니까?’

나는 속으로 울부짖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결심했고 아버지께 다시 아뢰었다.

‘아버지 저의 섣부른 판단일지라도, 당신의 마음을 헤아려 모시겠습니다. 아버지 인생의 고운 숨결과 열매가 알알이 담겨 있는 농장 집으로 모시겠습니다.’

퇴원절차를 밟고 응급차를 대기시켜 놓은 뒤 처치실에서 당신의 몸을 추스려 막 옮기려던 때였다. 두 시간여 심한 자극에도 어떤 반응조차 없으시던 당신의 다리가 움찔거린다. 당신의 몸을 잡고 있던 나의 손을 통해서 다른 이들은 모르게 살며시 말씀하신다. 아무 말씀 없으시던 당신이 단 한번 다리를 움찔거리며 내게 말씀하신다.

아, 아직 아닌가 보다. 떠나실 때가 아닌가 보다. ‘상구야, 나 더 살다 갈 거야.’ 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아······. 알 수 없다.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 살아나신 거다. 그래 오뚝이처럼 일어나시던 분이 아닌가? 그래 다시 일어나실 거야. 다가왔던 죽음의 사자들이 다시 돌아간 거야. 이전처럼······.‘

나는 다시 정신을 추스리고 중환자실로 아버지를 모시기로 결정했다. 나를 비롯한 모든 가족들은 밖에서 동이 터 오기만을 기다렸다. 다시 햇살이 비추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러한 우리들의 간절한 소망에도 불구하고 중환자실에서 가족들을 불러들인다. 또 다른 곳에서 혈관이 터져 버렸고, 이제는 더 이상 손 쓸 방법이 없단다. 마치 봇물 터지듯 아버지의 육체 곳곳이 터져 버리고 있는 것이다.

쇠할 대로 쇠한 당신의 몸, 한 평생 온몸을 바쳐 쉼 없이 살아오셨던 아버지, 이제 당신의 육체가 터져버리고 계신 것이다. 재 한 줌조차 남기지 않을 열정으로 자신을 불태우며 마지막 기력까지 모두 소진하여 살아오신 당신이었던 것이다.

그 마지막 말씀······. 다리의 움찔거림은 빨리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신 말씀이었다. 그걸 알아채지 못한 나는 너무나도 어리석었다.

‘예······. 아버지 모시고 갑니다. 조금만조금만 참아 주세요. 곧 집에 도착합니다.’

나 어릴 적 장 보러 가는 길에 잡고 가시던 당신의 손을 꼭 잡고 길을 재촉하며 광주 집으로 가기를 서둘렀다.

2000년 1월 6일 새벽 4시 30분. 아버지는 기거하시던 광주의 농장 집 안방에 눕혀졌다. 당신의 발자국이 또렷이 남아 있는 그곳 그 집을 한번 둘러보시고는 당신의 영혼은 또 다른 길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고 마셨다. 그날 새벽 4시 50분 음력 1999년 11월 30일 아버지는 편안한 모습으로 운명하셨다.

77세 희수 생일상을 병상에서 받으시고 12일째 되는 날, 며느리 손바닥에 잘 준비하라고 쓰셨던 8일 후에, 어머니 돌아가신 1주기를 채 9일도 남겨놓지 않았던 그 날에······. 아버지는 가셨다.

격동의 세월로 점철되었던 일흔일곱 당신의 고단한 삶은 모두 막을 내렸다. 젊은 날의 그 화려했던 기상과 눈물과 감동은 살아남은 자의 기억 속에 또렷이 새겨두고 떠나셨다. 당신에게 주어진 기나긴 인생 여정을 정갈하게 마무리하고 가셨다. 평화롭게 가셨다.

 

 

 

 

 

 

 

 

 

 

 

 

 

 

 

 

 

 

 

 

 

 

 

 

 

 

제 7장 추억의 저편

 

 

 

 

 

인정 많은 사람

- 김창환 님 (안성)

 

 

나는 심계택 씨보다 열 살이 많습니다. 그를 안지도 벌써 50여 년이 흘렀는데, 열심히 일하며 살아온 인정 많던 그 사람이 돌연 저 세상으로 갔다고 하니 나로서는 애석하기가 그지없네요. 사람들은 흔히 심계택 씨의 강직한 면만을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나 그는 내가 아는 그 어떤 공직자보다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심계택씨를 처음 만난 것은 그가 포천군에 있을 때였지요. 나는 장돌뱅이로 8.15 해방 이후부터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내는 제사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답니다. 그 때문에 잠업공무원인 심계택 씨를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는 양주군의 잠업계장으로 있으면서 뽕나무 식재에 대해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잠업계에서는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소문이 자자했지요. 그러다 박태원 도지사에 의해 양주군에서 경기도청으로 스카웃되었고, 그는 더욱 고무되어 뽕나무밭 개간을 위해 더 열심히 매진했다고 하더군요.

그 당시 경기도에는 제사공장이 단 두 군데뿐이었고, 내가 그 중 하나인 해성제사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관할 공무원이었던 심계택 씨와 접할 기회가 많이 있었는데, 그는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관리가 아니라 제 아무리 높은 사람이라도 나는 내 기준에 합당하지 못하면 절대로 굽히는 일이 없었고 그 자리에서 입바른 소리를 잘했었기 때문이지요. 심계택 씨도 성격이 워낙 대쪽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그런 내가 못 마땅할 수도 있었을 거예요. 잘 따지고 덤비는 사람을 좋아할 사람은 없겠지요. 그렇다고 심계택 씨와 특별히 껄끄러운 관계였다는 것은 아니구요. 별다른 인간적인 유대 관계를 이어나가지 못했었다는 겁니다. 그러던 중에 내가 심계택 씨의 새로운 면모를 알게 된 사건이 몇 개 있었지요.

직장 후배 서기석 씨가 브라질로 이민 갈 때, 당시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이민자금을 건네주었다는 얘기를 들었지요. 과장 월급이 얼마나 됐겠어요. 그런데도 여기저기서 돈을 모아 350만원이라는 거금을 마련해 주더군요. 오랫동안 함께 고생했던 후배를 위해 마지막까지 심혈을 기울여 의리를 지켜주는 일은 말이 쉽지 아무나 못하지요. ‘아, 이 사람은 정말 훌륭한 사람이다.’라는 걸 그 때 깨달았지요.

그 일 이후로 주위 공무원과 업계 사람들로부터 심과장에 대한 많은 칭찬이 오고가는 걸 듣게 되었습니다. 심 과장은 농정과로 옮겨가면서 도청의 모든 과를 대표하는 수석과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도청에서는 그 사람만큼 일 잘하고 인품이 훌륭한 사람도 없었어요.

심 과장을 다시 보게 되었던 사건이 또 하나 있다면 수원시장 심재덕 씨에 대한 얘기지요. 유신 이후 국민들의 불만이 폭발 직전에 이르자 박정희 정권은 공무원들을 희생양 삼은 서정쇄신이란 명목으로 공무원들의 대대적인 물갈이를 시작했는데, 그때 심재덕 씨가 맡고 있던 경기도청 잠업과 전 직원 13명 모두가 그 대상이 되어버렸지요. 당시에 나도 제사공장을 하고 있어서 알고 있는데, 부정한 일 때문이라기보다 쇠퇴하기 시작한 잠업과의 인원도 줄이기 위해 서정쇄신을 가장한 의도적인 감원 정책이었지요.

그때 심재덕 씨는 자신뿐만 아니라 억울한 부하직원들의 파면을 막아 보고자 상사였던 심계택 씨를 찾아 갔었나 봅니다. 심 과장은 심재덕 씨와 그 직원들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동분서주 애를 썼지요. 결국 나한테까지 찾아와서 억울함을 호소하기에 도지사와 친한 내가 도청으로 찾아가 오해를 풀어주었고, 심재덕 씨 이하 전 직원을 파면에서 구해내 의원면직으로 사건을 마무리하여 퇴직금이라도 받을 수 있게 했지요.

잠업과 직원들이 사표를 쓰고 도청을 떠난 후에도 심 과장은 심재덕 씨와 그 밑의 직원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취직자리를 알아보는 등 그의 후배들을 위해 무척 신경 써주는 모습을 봤어요. 단순한 직장 선후배의 의리를 떠나 진정한 인간적인 사랑이 아니고서는 힘든 일이었다고 생각했지요.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안 후로 나는 심계택 씨를 다시 보게 되었고, 자주 만나게 되면서 아주 친해졌지요. 서로 성격도 비슷했고 인간적으로 신뢰하게 되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기 때문에 오랜 시간동안 친분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50여 년 동안 심계택 씨를 알고 지냈었는데, 참 훌륭한 인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이 오랫동안 서로 알고 지내다보면 “이 사람은 된 사람이다 아니다.” 라고 말하게 되곤 하지요. 난 성격이 직선적이어서 사람이 옳지 못하다고 판단되면 그대로 싫다고 담백하게 말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심계택 씨와 그 어떤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다 늙은 사람이 쓸데없는 말을 해서 뭐하겠어요. 내 90평생 심계택 씨만한 사람은 보질 못했어요. 참 훌륭한 삶을 살다가 떠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그 사람이 불쌍하게 생각되는 것이 하나 있어요. 돌아가기 얼마 전 나한테 전화해서 즐거운 목소리로 말하더라구요.

“77살 생일을 자식들이 성대하게 치러준다고 하네요.”

그래서 내가 맞장구를 쳤지요.

“그럼, 자식들이 마련해준 희수잔치 잘 보내야지요.”

그렇게 좋아하더니, 희수 생일상도 못 받고 병상에 누워 있었으니······. 생일날에 인사차 집에 전화를 했는데도 계속 안 받아서 희수잔치에 가셨나 보다고 생각했는데, 병원에 입원했다고 하더라고요. 얼마나 안 돼 보였는지 몰라요. 마지막 생일 밥이라도 제대로 먹고 갔더라면 남아있는 사람들이 조금은 덜 미안할 텐데······.

지금의 공무원들이 젊은 시절의 심계택 씨 정도만 되었더라면 어땠을까요. 그 사람 같이 철저한 국가관으로 나랏일을 본다면 우리나라 공무원들의 비리가 어디 발붙일 수 있겠어요? 그는 참 깨끗하게 공직에 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일 앞에서는 단호한 사람이었어요. 비위에 거슬리는 행동을 보기라도 하면 그 자리에서 호통을 치며 지적하는 사람이었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지요. 뿐만 아니라, 그 많은 잠업예산을 받아내고도 개인적으로 돈을 유용했다거나 헛되이 썼던 적은 한 번도 없었고, 누구로부터 단돈 얼마조차도 받아본 적이 없을 정도로 청렴결백한 사람이었지요.

겉으로는 인색해 보이고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사람처럼 차가워 보였지만 그 사람만큼 인정이 많은 사람을 내가 보질 못했어요. 지금도 젊은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답니다. 우리나라의 그 어려운 시기를 잘 견뎌왔을 정도의 강한 생활력도 꼭 배워야 하지만 그의 참된 인간성은 돈 주고도 못사는 것이라고요. 그는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될 정도로 참 착하게 살다가 간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좋은 곳으로 갔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강직한 성품의 따뜻하신 분

- 김원기 님 (평택)

 

 

심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1948년 내 나이 18살 때였습니다. 그 때 그 양반은 경기도 원잠종 제조소 (현 경기도 잠업시험장)에서 기숙사 사감 겸 선생님으로 계셨고, 나는 그곳의 강습생이었지요. 올백으로 머리를 올린 깔끔하신 첫인상이 새삼스럽게 기억되네요.

원잠종 제조소는 1년 과정이었고 1기에 60명 정도의 강습생이 있었는데, 선생님은 그 많은 학생들 중에서 나를 제일 아껴 주셨습니다. 그래서 강습기간을 마친 후 나는 연구생으로 1년 더 그곳에서 지낼 수 있었지요.

그 후 나는 광주 군청에서 10여 년간 공무원으로 일했고, 후에 경기제사로 옮겨 오래도록 잠업 관련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일평생을 잠업과 관련한 일들을 해 오신 심 선생님과는 계속 인연을 다져올 수 있었지요.

선생님은 원잠종제조소의 1회 출신으로 잠업을 체계적으로 배우신 분으로서는 최초였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평생 동안 뽕나무와 관련된 그 많은 일들을 화려하게 해내신 것이겠지요. 워낙 부지런하셨기 때문에 총각시절에도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기숙사 한 쪽에 양계장을 만들어 닭을 키우곤 했습니다. 여름에 아카시아 나무를 잘라서 모아두었다가 겨울에 닭 사료로 쓰시던 모습이 기억에 남아요.

선생님은 평생 잠업장려정책의 일선에서 일하셨는데, 그 중에서도 뽕나무 식재에 대해서는 전문가였습니다. 1950년대는 잠업장려가 무척 힘들었지요. 일제 때도 잠시 잠업을 권장하던 시기가 있었지요. 그러나 일제의 착취로 인해 사람들이 고생만 하고 돈을 벌지 못한다고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잠업 자체를 무척 꺼려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설득해서 뽕밭을 늘리고 잠업을 부흥시키려는 노력은 정말 대단했어요.

전국에서 제일 먼저 잠업 장려 구호를 바위와 큰 길 등지에 써놓고 사람들을 계몽하기 시작했어요. 박 대통령의 잠업 장려에 맞춰 특수단지가 만들어지고 엄청나게 뽕밭을 확산시켰답니다. 그래서 1974년에는 광화문에 잠사 1억불 수출 탑이 세워지게 되었지요. 그 당시 2억불 수출만 된다면 우리도 이제 최악의 극빈국에서 벗어나 자립할 수 있다고 말할 정도였는데, 그 목표량의 반을 잠업이 해냈던 거였으니,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겠어요?

심 선생님은 전국에서 잠업지도원 제도를 최초로 만들어 대규모로 확산시키기도 했지요. 한때에는 시, 군의 잠업지도원이 칠십여 명을 넘었는데, 그 많은 사람들의 신상파악은 물론 집안의 그릇이 몇 개라는 것도 다 파악하고 계실 정도였어요.

많은 잠업지도원들과 경기도 전역을 돌아다니시며 출장을 나가시느라 몇 날 며칠을 여관방에서 보내기 일쑤였지요. 그 때 나도 같이 있을 때였는데, 한 방에서 잠을 자다가 뒤척이는 소리에 눈을 떠보면 선생님은 늘 뭔가를 적고 계셨어요. 고된 일로 그 누구보다 피곤한 상태인데도 노트에 그날 진행되었던 일들을 기록하고 내일의 계획표를 작성하는 등 일에 있어서는 언제나 치밀함을 보여주셨습니다.

훗날 내가 경기제사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관직에 계신 선생님과는 업자와 공직자 관계에 있어야만 했지요. 개인적으로 나를 보통 아껴주시지 않았던 사이였지만 공과 사는 그 누구보다 분명하신 분이셨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하든지 그 대쪽 같은 성격으로 깔끔히 마무리하곤 했습니다. 개인적인 친분과는 별도로 일에 있어서는 손톱만큼의 여지가 없었던 거예요. 그만큼 일을 소중히 여기신 분이셨습니다.

공과 사를 분명히 하시는 분이셨기 때문에 내가 그분을 더 오래오래 존경할 수 있었던 거지요. 내가 경기제사를 그만두고 집도 정리한 뒤 평택으로 내려왔을 때의 일입니다. 철강회사를 차리면서 자금이 부족해서 발을 동동거리다가 선생님께 찾아가 어렵게 말을 꺼냈는데, “그냥 갖다 써!”하시며 흔쾌히 돈을 빌려 주셨지요. 이자 얘기 꺼냈다가 오히려 야단만 맞았다니까요.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해 그 양반 도움을 크게 받은 분들은 주위에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누구에게 얼마만큼 도와주었다는 말을 한 번도 하신 적이 없어요. 선행을 베풀 때는 늘 남모르게 하셨지요.

돌아가실 때까지 내가 참 안타깝게 생각하던 게 있습니다. 소주를 워낙 좋아하시기는 했지만 안주로 고추장에 고추를 찍어 드시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늘 화가 났지요. “아니 왜 그렇게 사세요? 돈이 없으세요?” 핀잔 섞인 목소리로 말씀드리면 “그냥, 좋잖아.” 하고 허허 웃으실 뿐이었습니다. 결코 당신 자신을 위해 돈 쓸 줄 모르는 양반이셨어요. 지금 생각하면 위 절제 수술을 하신 것도 다 그렇게 몸을 돌보지 않아서 그랬던 거예요.

보통 돈이 있으면 주색잡기에 관심을 돌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그러나 그 양반은 오직 일이 애인이었어요. 노년에도 뭔가 새로운 것을 개발해서 일을 벌여놓곤 했지요. 그러고는 열심히 그 벌린 일에만 매달렸어요. 건강을 위해서 골프라도 하시라고 하면 낭비라고 생각하시고 전혀 관심 갖지 않았어요.

내가 고인을 마지막 뵌 것은 돌아가시기 이틀 전 문병을 갔던 때였습니다. 그날은 많이 좋아지신 것 같았어요. 일본여행 얘기도 하시고 휠체어 사셨다는 말씀도 하셔서 나는 곧 일어나실 줄 알았지요. 그런데 65만원에 사신 휠체어를 650만원에 사셨다고 하시면서도 아주 싸게 샀다고 자랑하시고 내일 온천에도 가자고 하시는 거예요. 나는 속으로 눈물이 마구 흘러나왔어요. 어쩌면 곧 돌아가실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고요. 36킬로그램밖에 안 되는 몸을 침대에 뉘이신 모습이 얼마나 안쓰러웠는지 모릅니다. 결국 이틀 후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안성의 김창환 회장님과 연락이 되어 장지에서 마지막 가시는 모습을 지켜보았는데, 김창환 회장님이 많이 우시더군요.

내가 아는 심계택 선생님은 열심히 일하시고 주위 사람들을 위해 늘 정을 베푸신 분이십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일생을 정확하게 사신 분이시지요. 사람이 살다보면 구부러진 길을 가기도 하고 잘못 길을 갔다가 다시 걸어 나오는 법도 있을 텐데, 그분은 절대로 그러지 못했어요. 한결 같으신 강직한 양반이셨습니다.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당신의 강직함을 보이시더니 결국 이렇게 먼저 가버리고 마셨군요.

인생이 뭔지 잘 몰랐던 18살부터 72살이 된 지금까지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꾸준히 선생님과 친분을 이어왔는데, 그 어떤 분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직한 분이셨고 또한 따뜻한 분이셨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일하기 위해서 태어난 심과장님

- 서기석 님 (L.A.)

 

 

나는 지금 현재 미국에 살고 있습니다. 심 과장님을 가까이서 모셨던 때는 도청에 계실 때였지요. 이민을 오게 되면서 심 과장님과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서 살고 있었지만 마음은 늘 선배님과 함께 있었지요. 심 과장님은 정신적, 물질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셨습니다. 내 일생을 통틀어 정말 좋은 인간관계를 맺었던 분을 꼽는다면 단연 심계택 과장님이십니다. 멀리 있었지만 과장님을 내 형님처럼 모시고 싶어 했지요.

심 과장님을 처음 뵙게 된 것은 도청의 잠업과 계장으로 오셨을 때예요. 그때 나는 과장님 밑의 차석으로 근무했었고 72년도에 이민을 떠나기 전까지 심 과장님의 모든 일을 보조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내가 보아온 심 과장님은 정말 엄청나게 일만 하신 분이셨습니다.

오로지 일을 하기 위해서 태어나신 분 같았어요. 양주군 계장에서 도의 계장으로 스카웃되어서 오실 때부터 이분은 굉장한 분이시라는 걸 알았지요. 잠업은 그 당시에 국가 정책으로 장려했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 일들이 주어졌습니다. 나중에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잠업에 생계를 걸었습니다. 그래서 과장님은 도청에 잠업과를 신설해야겠다는 판단을 하셨고 그 일을 추진하기 위해 애쓰셨지요. 결국 내무부에 근무하던 고건 행정계장을 직접 만나 잠업과 신설에 대한 중앙정부 측에서의 동의를 끌어내는데 성공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심 과장님의 노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그만큼 잠업을 사랑하시고 뽕나무를 사랑하셨던 거지요.

과장님은 언제나 현장 위주의 활동을 펼치셨기 때문에 몸소 농민들을 만나며 동분서주 뛰셨고 그래서 사무실에 계신 적이 별로 없을 정도였습니다. 결재가 필요할 때마다 내가 대신 해줄 정도였고 과장님은 아예 인감을 내게 맡겨서 결재를 대행하도록 지시하실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나를 믿어 주었고, 나에게 많은 일들을 맡겨주셨지요.

여주, 이천 잠업단지에서의 활약은 정말 눈부셨습니다. 뽕나무밭을 넓히기 위해 밤낮없이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경진대회에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지요. 수많은 잠업지도원들과 동고동락하면서 결국 전국대회에서 일등을 하게 되는 영광을 안게 되었습니다. 그때 상금으로 2백만 원을 받았는데, 그 돈으로 군 계장들 금반지를 사서 돌리고 함께 고생했던 수많은 지도원들을 위해 쓰셨지요.

또한 상금의 일부는 모수원을 만들어 보다 좋은 뽕나무 식재를 위해 재투자하는데 쓰였습니다. 도청 직원들은 그 상금을 구경도 못했고 밥 한끼도 못 얻어먹었지요. 군에서 밤낮으로 잠 못 이루며 일해서 얻어진 결과라는 걸 도 직원들에게 강조하셨답니다. 나는 그런 과장님의 투명한 처리가 마음에 들었고 그래서 더러 불만이 있을 법한 부하직원들을 위로하곤 했습니다. 과장님의 생각은 철저하게 옳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다른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과장님은 그 많은 잠업지도원들을 하나하나 잘 다루셨고, 모든 면에서 공평하게 처리하셨어요. 때로는 지도원들에게 공개석상에서 너무 혹독하게 꾸지람을 해서 보는 사람들이 민망해 했지만 언제나 뒤로는 따스한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취직자리가 생기거나 승진시켜야 할 시기가 오면 당신이 늘 가까이에 두었던 잠업지도원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거나 소개시켜 주곤 했지요.

꾸지람을 받으면서도 늘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다 헤아리고 돌봐주었던 거예요. 그 당시 지도원들 그 누구에게 물어봐도 인정 많은 분이라는 소리는 공통으로 할 겁니다. 그렇게 엄하고 혹독하게 했으면서도 인간적인 따뜻한 면모를 많이 보이셨습니다. 그러니 과장님을 존경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지요.

내가 공직을 그만두고 새로운 인생을 펼치기 위해 브라질로 이민을 가겠노라고 결정했을 때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신 분이 또한 우리 과장님이셨습니다. 여기저기에서 돈을 추렴해 미화 오천 불을 마련해 주셨어요. 그 당시에 저로서는 너무나 과분한 돈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민 가서 살기 힘들면 당장 짐 싸들고 오라시며 모든 걸 다 챙겨주겠노라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나는 평생 이 은혜를 갚겠노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습니다.

과장님은 나의 직속상관이기도 했었고, 무엇보다 소신을 가진 강직하신 분이셨기 때문에 나는 존경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모셨고 과장님은 그런 나의 마음을 잘 알아주셨던 것 같아요. 이민 가서 과장님의 그 깊은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겠노라고 이를 악물었지요. 그래서 브라질에서 미국으로 다시 옮겨갈 때 역시 그 어떤 이민자들 보다 열심히 생활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심 과장님이 내게 보내주신 사랑이 아니었다면 그 힘든 이민생활에서 매번 좌절했을지도 모릅니다.

형님과도 같은 과장님께 그간의 감사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전하고 싶어서 회갑을 즈음해서 미국으로 모셨습니다. 처음에는 사양하셨지만 미국에 초청되어서는 기뻐하시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셨습니다. 회갑상을 앞에 두고 환하게 웃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개인적으로 내가 그분께 많은 은혜를 입었었기 때문이 아니라 심 과장님은 누군가로부터 충분히 감사의 잔칫상을 받으실만한 분이셨다고 생각됩니다.

21세기가 도래했고 모든 문화와 생활여건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삶에 대한 근본정신은 시간이 흘러도 변해서는 안 되겠지요. 특히 전문가로서 과장님이 보여주신 철저한 직업의식은 오늘날 젊은이들에게도 분명 귀감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심 과장님을 만나게 된 내 젊은 날은 정말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내 인생의 지침을 똑바로 세우게 해주신 정말 소중한 분을 만났기 때문이지요. 내 젊은 시절을 회상할 때면 과장님이 잠업지도원들에게 호통을 치며 뽕밭에 서 계시는 모습이 함께 연상됩니다. 당신의 젊음을 다 바쳐 열심히 일했던 과장님의 모습은 언제나 내 가슴에 살아 있습니다. 이제 와서 얘기하지만 젊은 시절 조금만이라도 당신 자신의 몸을 위해 신경을 쓰셨더라면 말년을 더 오래 건강하게 보내시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가져봅니다. 고인은 분명 더 좋은 세상으로 가셨으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원칙론자이면서도 정이 많았던 분

- 심재덕 님 (수원)

 

 

내 인생에 큰 영향을 주신 세분 중에 한 분이 바로 심계택 과장님이십니다. 심 과장님을 처음 뵌 것은 1966년경이었습니다. 나는 그때 수원에서 고등학교 교사를 하고 있었는데, 대학교 선배이셨던 서기석 씨의 소개로 경기도청 기사보(현 7급 공무원)로 발령을 받아 근무를 시작했지요. 도청에 잠업과가 신설되고 특채로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당시 나이 27세였지요.

처음 도청에 들어와서는 동료 직원들과 잘 융합하지 못하고 따돌림을 당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공무원 채용시험에 합격해서 입사한 것이 아니고 특채로 들어왔다는 것 때문에 일종의 시기를 받았던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잘 어울리지 못하고 있는 나를 며칠 동안 바라보고 계시던 과장님이 어느 날 퇴근 무렵, 나를 부르셨습니다. 서류뭉치들을 한 아름 건네주시더니 하룻밤에는 도저히 해 낼 수 없는 차트를 작성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때가 12월 하순이었는데, 나는 추위를 무릅쓰고 밤새서 차트를 작성했고, 날이 밝아 와서야 과장님 의자에 쓰러져 잠이 들었지요.

내가 완벽하게 일을 처리한 것을 보자 과장님은 여러 직원들 앞에서 나를 칭찬하셨습니다. 특채로 들어온 내가 기존의 직원 못지않게 유능하고 일 잘하는 직원이라는 것을 다른 직원들에게 주지시키시면서 나의 위상을 높여주신 것이었습니다.

과장님의 근면, 성실, 청렴한 자세는 부하직원들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특히 나는 과장님의 그 철두철미한 생활철학을 닮고 싶어 했지요 그래서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결과 도청 근무 8년 만에 과장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때 내 나이 35세였지요.

그렇게 열심히 일하던 나는 어느 날 서정쇄신이라는 명목 하에 대대적인 공무원 숙청의 희생양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나를 비롯한 잠업과 전 직원이 파면 당할 위기에 봉착했을 때 심 과장님이 백방으로 다니시며 억울함을 호소하셔서 겨우 의원면직으로 구해주셨지요. 나는 책임자의 위치였기에 그대로 파면을 받아들였습니다. 나중에는 소청위원회에서 내가 이의를 제기한다면 나의 파면 처분도 취하할 수 있다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부하직원들이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게 된 것이 내 탓인 것만 같아 너무 가슴아팠기 때문에 책임을 지고 싶었습니다. 그때 그런 나의 마음을 위로하시며 가장 마음 아파 해주신 분이 심 장님이셨던 거예요. 이렇게 후배를 위해 음으로 양으로 늘 격려와 용기를 주신 분이셨어요.

우여곡절 끝에 심 과장님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대구의 견직공장에 취직하게 되었으나 얼마 못 가 그 공장마저 문을 닫게 되어 객지에서 크게 낙담을 하고 망연자실하게 되었지요. 그때 과장님은 대구까지 내려 오셔서 내게 고향 수원으로 되돌아 올 수 있는 용기와 격려를 주셨어요. 밤기차를 타고 와 수원역에서 내려 서문 앞을 지나려니 설움이 복받쳐서 펑펑 눈물을 흘렸습니다. 심 과장님이 나를 끌어안고 함께 뜨거운 눈물을 흘려주셨지요. 이렇게 내가 가장 힘들었던 시절 진심으로 당신의 사랑을 전해주신 분이셨습니다.

그때 과장님이 다시 수원으로 나를 이끌어주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수원에서 터전을 잡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과장님의 격려와 믿음 속에서 나는 열심히 일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자립할 수 있었고, 훗날 동서철강을 일으켜 사업에도 성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사업가로 성공해 삶의 보람을 갖고 열심히 생활하면서도 내 의사와 관계없이 공무원에서 퇴직한 것에 대해 늘 마음의 한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수원시장에 출마할 결심을 하게 되었지요. 내가 출마 의사를 비치자 그 누구보다 반가워하시며 용기를 주신 분이 바로 심 과장님이셨지요. 시장으로 당선할 수 있게 되기까지 음으로 양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를 많이 도와주셨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심계택 과장님은 내 인생의 중요한 고비 때마다 격려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훌륭한 스승이셨던 것이지요.

과장님은 탁상행정이 아닌 실무적인 면에서 너무나 완벽하고 확실하신 분이셨지요. 누에 키우기의 혁신적인 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 공동집하장을 만들어 보다 많은 농가에 누에를 보급했고, 뽕나무 심는 법을 개량하고 일본 시찰을 통해서 늘 새로운 기술보급에 힘써 왔습니다.

일을 추진하시고 사람들을 부릴 때는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대부로서의 카리스마가 그분을 압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큰 일들을 처리하시며 겉으로는 매우 차갑고 매몰차게 보이실 정도로 사람들을 대하셨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독일병정처럼 무섭게 일하셨지요. 과장님이 잠업계에 끼친 영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노년에는 당신이 평생 아끼며 모아온 재산을 사회에 환원시키기 위해 노력하셨지요. 광주문화원 건립에 많은 재산을 내놓으셨고, 평생 당신 삶의 철학이셨던 장학사업들을 추진하시면서 아낌없이 당신의 생을 소진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민선 수원시장으로 취임했을 때 심계택 과장님을 초대해서 내 인생을 빛내주신 분임을 공개석상에서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내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내 이름으로 심계택 과장님에 대한 책을 내서 훌륭하신 성품을 널리 알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요.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엄격한 원칙론자이시지만 내가 알고 있는 그 어떤 분보다 정이 많은 분이셨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반추해 볼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장점과 단점들을 두루 살피면서 그분을 평가하고는 하지요. 내가 감히 심 과장님을 평가한다면 수많은 단점들조차도 장점으로 얘기 할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일을 많이 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과장님은 이 시대가 요구하는 청렴한 공직자상을 보여주신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노년까지도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기에 충분한 훌륭한 일들을 많이 이루시고 가신 분이셨습니다. 그분 살아 생전에 내가 받은 사랑만큼 다 돌려드리지 못함이 이제 와서 후회가 되는군요. 삼가 심계택 과장님의 명복을 빕니다.

 

 

 

 

 

뽕나무와 함께 이어온 우정

- 잠우회 (김진길 님, 심만식 님, 이병학 님, 한재수 님)

 

아버님의 공직생활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야 했기에 그 당시 함께 활동했던 분들께 연락을 드렸고 2000년 11월 2일 수원 잠우회 사무실에서 네 분의 어르신들을 찾아뵈었다. 이 분들은 당시 군과 도에서 고락을 같이 하셨고 아버지와 함께 우리나라 잠업 부흥을 위해 온몸으로 6,70년대를 살아오신 분들이다. 그 시절을 회상하시면서 그분들은 상기된 얼굴로 생전의 아버지를 회상하시며 웃음을 지으시거나 먼저 떠나신 분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눈시울을 붉히셨다.

자연스럽게 주고받는 말씀들 속에는 직장 상사였던 아버지에 대한 애정과 젊음을 불살랐던 지난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했다. 잠우회 어르신들과 아버지와의 관계는 단순한 직장 상사와 부하직원 사이의 의례적인 관계가 아니라 생사를 건 전장에서나 볼 수 있는 전우애 같은 것이었다. 여기 이 네 분들의 대화를 정리해 본다.

 

 

일밖에 모르셨던 소신 있는 공무원

김진길: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심계택 회장님을 직접 모시고 다녔는데 ······. 벌써 1주기가 다 되어가는군. 열심히 활약하던 그 젊은 시절로 돌아가자면 거의 반세기가 된다네. 그때 심회장님은 양주군의 잠업계장으로 계셨다가 도청으로 옮겨가셨지. 당시 군의 계장은 도의 계장이 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심 회장님은 아주 특수한 케이스야. 그야말로 특진이었지.

심 회장님은 우리나라 잠업 전성기에 도(道)의 과장을 하셨지. 그후 농산과장을 역임하기도 하셨지만 당시 도에서 이 분의 역할은 엄청났거든. 경기도 시·군 내의 모든 잠업인의 인사가 이분의 손에 의해서 좌지우지 됐을 정도였어. 그야말로 아주 강력한 행정 책임자였지. 도지사에게 가장 신망을 받으신 분이야. 그렇게 역할이 컸어. 잠업에 뿌리를 둔 사람은 누구든지 끌어다가 좋은 자리에 앉혀놓곤 했지.

그 양반이 높은 분들께 신망을 받은 이유는 바로 소신 때문이었지. 오직 잠업을 위해서 목숨을 걸겠다는 의지가 분명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야. 그 해 목표가 정해지면 바로 그 목표달성을 위해 온 몸으로 뛰었던 거야. 자신의 모든 걸 던지고 일한 분이셨으니 신망이 두터울 수밖에 없었지.

한재수: 심회장님의 행적 중 가장 뚜렷한 것이 있다면 여천잠업특설단지를 이끌었던 것일 게야. 민간 재원뿐만 아니라 군 병력까지 동원할 정도로 그 잠업단지에는 많은 재원을 모았지. 또한 이 사업을 위해 마장동에서 여주·이천까지 엄청난 거름을 실어다 날랐어. 정말 대단했어. 그런 열정으로 일했기 때문에 그분은 인정받을 수밖에 없었던 게지.

이병학: 여천단지 특일사업이 결과적으로는 큰 성공을 보지는 못했었지만 그때부터 여주군에는 누에치는 집들이 쭉쭉 늘었어. 그 전에는 양주군이 경기도에서 일등이었는데 특일사업 이후부터는 여주군이 일등이야. 여주군이 그 넓은 땅에 뽕나무를 참 많이도 심었기 때문에 그랬지.

각 군에는 뽕밭을 관리하는 도청 직원 분들이 있었는데, 여주군은 심 과장님이 담당하셨어. 과장님이 내가 일하는 것을 보면서 맘에 드셨던지 “너는 내가 좀 데리고 있어야겠다.” 하고 나를 도청으로 부르셨지. 그래서 내가 도청에서 2년 근무한 적이 있다네. 1968년부터 70년도까지 도에서 일했다가 다시 여주군으로 갔는데, 처음에는 말단이었지만 도청에 2년 근무한 다음에는 여주군 계장으로 승진되어 옮겨갔던 거지. 그 이후로 과장님이 여주군 담당과장으로 내려오시더라고.

우리 입장에서는 잘 아시는 분이 내려오시면 일하기가 좋은 면도 있지만 워낙 대쪽 같은 분이시기에 겁이 나기도 하고 그랬지. 과장님이 계신 동안에는 꼼짝 못하고 죽어라 일만 해야 되니까. 그렇게 여주지역을 일등 군을 만들려고 심 과장님을 비롯해 우리 모두 참 많이 노력했어. 전국 시범단지로 지정되어 농산부에서 심사가 나오면 여주군이 전부 일등을 맡아 했지. 그때 도에서 우승기를 다 만들었는데 그걸 타다가 여주군에 갔다 놨지. 여주군 일반 농가에서도 웬만한 사람들은 다 심계택 씨를 알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부지런하게 돌아다녔다구.

김진길: 심회장님이 도청에서 퇴임을 하시고 난 후에도 경기도잠업진흥회 회장을 맡아하시면서 노년에까지 잠업 일을 놓지 않으셨어. 내가 잠종장장을 오랫동안 했지만 심 회장님도 잠종업자의 한사람이셨고 우량 잠종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세심히 애쓰셨는데······. 과거에 경기도 내에는 어디 할 것 없이 방방곡곡 다니셨어. 퇴임하시고 잠업진흥회 회장을 하시면서 그런 말씀을 다 하셨어. 지도원 누구는 어디에 살고, 잠업관계 골수분자 누구는 어디 있고, 누구는 어디 있고 하면서 모두 만나보고 싶어 했고, 그 시절을 그리워하셨지. 말로는 모이자고 많이들 했지만 정작 잘 모여지지 않았어. 연락처를 만들기도 방대해서 잘 추진하기 조차 어려웠는데 1999년 9월 수원에서 한재수 상무하고 내가 회장님의 뜻을 받들어서 군마다 돌아다니면서 일일이 사전조사를 했어. 그리고 대대적으로 모임을 강행했지.

경기도내에는 그때 그 시절의 사람들이 100여명이 되더군. 최고 원로에서부터 가장 골수분자까지 다 모였지. 그때 심 회장님도 참석하셨는데 그게 회장님으로서는 마지막 잠우회 모임이었어. 아주 의미 있는 자리였지. 심재덕 수원시장도 왔었어. 다음에는 심시 장이 사회를 보면 좋겠다고 모두들 그랬지. 참 즐거운 시간이었는데······. 심 회장님이 작고하고 나니 아쉬움이 많아. 돌아가신 후 장지도 다 같이 갔었는데 지금도 ‘잠우회’라고 모임을 만들어서 이렇게 한 달에 한 번씩 모이곤 하지.

그 젊은 시절 심 회장님은 자신도 정말 부지런하게 일하셨지만 아랫사람에게도 일을 엄청 시키셨어. 그렇게 일을 시키면 반작용이 있을 법도하지. 안 그래? 그러나 그걸 표현하지 못했어. 지금이라면 더러 불만을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에는 그게 당연한 일이었던 것으로 알았지. 강한 지도력이라고 말할 수 있었지. 그래, 그랬어. 군말 없이 열심히 일하다 보면 그 대가가 있고 보람도 있었던 거지.

이병학: 각 시·군의 잠업관계 직원들은 과장님에게 철저하게 교육을 받았지. 다들 진지하게 배우곤 했지. 이론적인 것들도 많았지만 새끼를 꼬기도 하고 섶도 만들고 별거 다 하는데, 그걸 시·군 별로 경쟁도 붙이고 해서 상도 주고 그랬지. 늘 철저하게 교육을 하니 우리는 잠업에 대해 다 박사가 될 정도였어. 그러니 눈을 감고 시험을 봐도 훤히 알 정도였어. 그때 참 대단했지. 도지사도 나와서 우리를 격려했으니까. 나중에는 잠업이 시들해졌지만 그땐 잠업이 참으로 대단한 분야였지.

누구나 과장님을 ‘독일병정’이라고 그랬어. 그 양반이 나타나면 당해낼 사람이 없었지. 어느 동네든지 누에를 치는 집은 중학교 학생복이 있고 누에를 안치고 다른 농사를 짓는 집은 학생복이 없어. 또 어떤 집에 가면 누에 아니었으면 큰 일 날 뻔했다고 말하기도 했지. 누에 때문에 애들 두 명이나 대학에 보낼 수 있었다는 집도 있었지. 대학등록금을 내야 하는 날이 누에쳐서 돈 받는 날하고 딱 들어맞았다고 하는 거야. 허허. 그렇게 일선 농가에서는 누에가 효자 품목이었다구.

심만식: 나도 여주군에서 공무원 생활을 30년 정도 했지만 지도원들은 각 면을 돌아 전 부락을 순회를 하곤 했어. 매일 올 때도 있고 일주일에 한 번 올 때도 있는데 심 회장님이 오면 마을 구석구석 다 돌아다녀요. 그러면서 이것저것 지적을 많이 하셨는데 다음에 올 때는 지적한 것들을 다 해 놓아야 해. 그렇게 추진력이 강했고 무서웠어.

그때 여주군에 잠업지도원이 36명이 있었는데 아마 전국에서 상주가 1위, 전주가 2위, 그리고 여주가 3위였던 것 같아. 어쨌든 경기도에서는 제일 많았을 거야. 그 양반에게 배운 것은 철저하게 책임을 완수하는 거였지. 또 그 분은 사리사욕이 전혀 없었어. 일에만 몰두했고 그래서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은 심 과장님에게서 많은 것들을 배우려고 했어. 그래서인지 그때 잠업지도원 일을 한 사람들 중에서 면장까지 하는 사람이 가장 많았어.

이병학: 그럼 제일 많았지! 왜냐하면 그 양반에게서 생활의 모든 면들을 철저하게 배웠기 때문이지. 성실함과 전문적인 능력을 고루 갖추어야 그 분 아래서 버틸 수 있었으니까. 길을 지나다가도 뽕나무가 좀 거칠게 자랐다 싶으면 전정가위를 가지고 잘라주었어. 교목 상식으로 이렇게 하는 거다 하면서, 데리고 다니는 지도원들에게 몸소 보여주셨지. 그 양반이 지나가면 “독일병정 온다.”하고 그랬을 정도야. 아무튼 대단했어요.

심만식: 내가 생각해도 그런 엄격한 지도력을 가진 사람 밑에서 배웠기 때문에 군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었고 면장까지 했다고 생각해요. 내가 면장을 7년하고 퇴임을 했는데 사람들은 내가 일하는 것을 보고 정말 심계택 과장님에게서 배우면 틀림이 없다고들 했지요.

김진길: 한 마디로 말해서 그 당시 심계택의 조직들은 무섭습니다. 암, 무서운 조직이야. 강한 정신력을 키우도록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그 시절 잠업 관계 사람들 다 면장까지 할 수 있었으니까. 그 사람 밑에서 배웠기 때문에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지. 죽으라고 하면 죽는 시늉까지 했으니. 내가 마지막까지 회장님을 모셨는데, 가평·여주 어디 할 것 없이 다 잠업과 관련된 사람이 면장하구 그랬어요.

이병학: 과장님은 잠업이 잘 안 되는 곳이 있으면 나를 거기로 보냈어요. 파주·안산 등등 경기도 전역 안 가 본 데가 없었어. 그렇게 다른 지역에 흘러가서 과장님에게서 교육받은 대로 열심히 일했지. 그렇게 하니까 이건 일도 아니야. 그저 누워서 떡 먹는 것처럼 쉬웠어요. 그렇게 심 과장님은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훈련을 시켰던 것이고 다른데서 일할 땐 그만큼 쉽게 느껴져서 일의 성과가 몇 배 이상 컸던 거지.

그 정도로 사람들을 키워주고 또 일을 많이 한 분이야. 일선 농가에 나가면 그냥 다니는 게 아니라 노인네들한테도 뽕나무가 뭔지 누에가 뭔지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지. 일일이 출장을 다니면서도 직접 모든 걸 다 하셨다구. 그리고 어디 가서 우리끼리 앉아 식사나 술을 할 때도 서슴없이 같이 어울려주셨어. 남들은 과장님이니까 따로 상을 차려 고급으로 모셔야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분은 우리와 같이 앉아서 같은 밥 먹고 같이 술 취하고 그랬어요.

일 년에 한번 정도는 3박4일 정도 날을 잡아 30명씩 놀러 가게도 해주었지. 이번에 여주가 1등 군으로 상도 탔으니까 지도원들과 휴양차 며칠 다녀오겠습니다.” 그러면 군수한테 연락해줘요. 그러면 군수한테 승낙 받고 떠나는데 과장님이 잘 다녀오라며 여비로 쓰라고 봉투를 주곤 하지. 그런데 우리는 그걸 받으면서 부담을 가졌어. 왜냐하면 선물을 받았으니 답례로 뭔가를 사 갖고 가야하는데 과장님이 무얼 좋아하시는지 알 수 있어야지. 허허, 그렇게 우리에게 신경을 많이 써 주신 분이셨다구.

 

 

투철한 국가관

심만식: 그 양반은 국가관이 아주 투철한 분이야. 그때 60년대에는 수출 분야가 별로 없었어. 그러니 누에고치가 아니면 안 됐던 거지. 집집마다 강제로 경지면적의 얼마만큼을 지정해서 뽕나무 묘목을 배분을 해요. 그때는 밭에 보리나 밀을 전부 심었거든. 봄이면 거기에 보리가 이만큼 커요. 그런데 그걸 갈아엎고 뽕나무를 심으라고 하니 영문을 모르는 밭주인은 반대하지. 하지만 그 양반이 직접 쟁기를 잡고 보리밭을 갈아. 보리를 키우는 것보다 뽕나무 심어 얻는 이익이 훨씬 많다는 걸 설득시키고 말거든. 안 그래?

또, 뽕밭에는 유난히 거름이 많이 들어갔어요. 그때는 새마을 사업 전이었으니 지붕이 전부 초가지붕이었지. 거름이 없으니깐 그 초가지붕 두꺼운 것을 한두 겹 벗겨 구덩이를 파서 넣고 뽕나무를 심었어요. 그렇게 뽕나무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해내는 대단한 양반이었어요. ‘우리나라 살 길은 이거다!’라고 판단했던 거지. 그 때 우리의 수출 항목이 저 부산에 있는 동명합판하고 생사수출 이렇게 둘 밖에 없었어요. 그렇게 국가관이 투철한 분이셨어요.

김진길: 양주군에 잠업계장으로 있을 적에 보통 자전거를 타고 일일이 다니셨지. 지금은 다들 작고했지만 헌병상사출신, 이북을 넘나들던 케일러(북파공작원) 출신 등 참 대단한 지도원들이 많았었지. 그런 지도원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이 양반은 제일 좋은 걸 타. 기어 있는 자전거로. 뒤에 졸병들은 이보다 낮은 자전거를 타고 쭈욱 따라가는 거야. 마치 기러기 떼처럼 자전거부대가 이동하는 거야. 그 모습은 참 멋진 광경이었지.

심 과장님이 나타났다 하면 말이야, 하, 그거 말할 것도 없어. 웬만한 밭들은 다 갈아엎어! 농민들이 불평할 수도 있잖아. 아, 그런데 아무도 말 안 해! 아니 말 못했지. 심 과장님이 어떤 분이란 걸 잘 아니까. 허허, 그렇게 뽕나무를 심어 엄청나게 뽕밭을 늘린 거야. 엊그제 면장 출신들 모임이 있어 참석했는데 거기서 심계택 씨 돌아가셨다고 하니까 다들 깜짝 놀라더군. 그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어. 면 직원은 물론 까마득한 말단 직원까지. 그 분은 일선까지 다니면서 고생 참 많이 하신 분이야. 사생활도 없이 당신의 몸도 돌보지 않고······. 그렇게 국가관이 투철했고, 소신이 뚜렷했지.

 

아낌없는 사랑

한재수: 그 양반으로 말할 거 같으면 우선 욕심이 아주 많은 분이셨어. 남에게 지고는 못 견디지요. 자그마한 체구여서 겉으로 보기엔 약해 보일지 모르지만 전국에 잠업과 관련해 어떤 대회를 한다 하면 꼭 일등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분이야. 도청 내에서 무엇을 하면 이기고 싶은 욕심은 대단했지. 일등의 욕심이 너무 지나치다고 느낀 사람도 많았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분이 가르쳤던 사람들은 모두 훌륭한 일꾼들이 되었지. 지금 여기 모인 네 사람은 나중에 모두 좋은 자리를 지내고 나왔을 만큼 열심히 일을 했어. 그 시절 그 양반 밑에서 활동할 적에는 그렇게 앞만 보고 열심히 사는 게 삶의 기본으로 알았어요.

그 분은 아랫사람에게 그렇게 호되게 일을 시키면서도 인간적으로 참 많은 감동을 주고는 했지. 그래서 잘하는 놈은 어떻게 해서든지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주려고 애쓰셨어. 일 시킬 때는 심하게 말해서 소 돼지마냥 부려먹었지만 애정을 갖고 끝까지 돌보아주었지. 사람 하나 희생시키는 데는 절대 반대였어.

이병학: 그리고 그 양반은 늘 철저해서 신발은 꼭 농구화를 신어야 했지요. 구두는 어디 갈 때나 회의할 때 신는 거고 일 년에 농구화를 몇 켤레가 해질 정도로 일하는 사람이 진짜 일꾼이라는 거야. 그런 정도인데 얘기할 게 뭐 있어. 복장도 잠바를 입어야 한다는 거야. 왜냐하면 남을 지도하려면 지나다가도 전정가위를 빼들어 직접 보여주고 자기가 일을 해보라는 거야. 그 양반 앞에서 넥타이를 맨다든지 깔끔하게 입으면 저거 뭐 하는 놈이냐 하고 단박에 호통 치신단 말이야.

김진길: 심계택 회장님 조직의 권한은 대단했어요. 시·군 계장뿐 아니라 일선 지도원 하나 자리 옮기는 것까지 아주 세심했어. 그런데 시장 군수들이 다 그분 말씀을 그대로 들어줘. 예를 하나 들자면 내가 가평군 잠업계장으로 가는 거야. 그런데 내가 발령을 받은 것은 가평군청이 아니라 경기도청이었지. 그러니깐 그만큼 심 과장님의 위력이 있었던 거지. 군의 계장 자리도 도의 잠업과장 손을 거치지 않으면 군수가 못 움직였어.

이병학: 그래. 그땐 그렇게 눌러놨어. 허허, 대단한 파워였지.

김진길: 그런데 심 과장님이 농산과장으로 가시고 다른 분이 잠업과장으로 오신 다음에는 판도가 바뀌었지. 인사 문제는 더 이상 어림도 없었지. 시장, 군수가 다 맘대로 했으니까.

한재수: 그 당시 우리 잠업계통의 직원들은 행정상으로 농업직이 아니라 잠업직이었지. 그래서 갈 수 있는 행정 계통의 승급 티오가 없었어요. 이걸 그 양반이 알고 계셨기 때문에 적재적소에 자리를 만들어 유능한 사람을 앉히곤 했지. 안되면 시장·군수에게 압력을 넣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밤중에 쫓아 내려가서까지 인사 처리를 했어. 앉아서 하는 게 아니라 발로 뛰어서 해요. 어느 시·군에 자리가 하나 있다 하면 직접 뛰어가서 “그 자리에 이 사람을 올려다오.” 이렇게 했던 분이지. 그리고 예전에는 잠업직에 없던 자리였다면 그걸 농업직으로 바꿔서까지 그 자리에 앉혀두고야 말았어.

김진길: 한마디로 요약을 하면 일을 시킬 때는 아주 엄격하고 무서웠지. 그렇지만 그 뒤를 돌봐주기 위해서는 누구보다 열심이셨어. 앞장서서 감싸주고 챙겨주고 했던 거지. 좌우간 우리들에게 인간적으로 너무나 잘하셨어요.

 

 

토사구팽

김진길: 심회장님이 공직을 그만두게 된 것은 토사구팽식이었어. 정권이 바뀌면 제도가 바뀌잖아. 어느 정권이 들어서면 공무원의 자질을 운운하면서 물갈이를 하지. 고인도 당시 공무원들 중에 한 분으로서 희생이 되신 거야.

한재수: 글쎄, 내 생각에는 그분이 그만두게 된 것은 바로 퇴비증산 때문이야. 아, 퇴비는 농산과가 주로 맡았던 거 아니여. 퇴비증산에 너무 과격하게 일을 시키셔서 그렇게 됐다구. 퇴비를 많이 만들어야 하는데 성과가 적게 나타나잖아. 그래서 시·군의 사람들을 독려하는데 이전의 잠업과 사람들과는 달리 좀처럼 말을 듣지 않았겠지. 그걸 채근하는 과정에서 부작용이 왔던 거야. 원인은 거기에 있어.

김진길: 한상무가 말 한 것은 표면적인 것이고 그 내막으론 말이지 다른 이유가 있었어. 심회장님이 그만두신 후에 광주 농장을 몇 번 찾아뵈었는데 약주만 잡숫고 계시더라고. 그 억울한 심정을 내가 알지. 한 사람을 몰아내기 위해 어떻게나 샅샅이 뒷조사를 해서 꼬투리를 잡는지 모른다고 그러시더라구. 당신의 쓰임새가 다 되었기에 당신에게 더 높은 자리를 내어 줄 수는 없고, 또 밑에서는 행정고시 출신이 줄줄이 들어서기 시작했기에 그들의 자리를 만들어줘야 했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70년대 중반 서서히 잠업이 하향의 조짐을 나타내기 시작한 거였어. 그런 시대적인 조류와 정책적인 것이 겹쳤던 거지. 한마디로 직무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며 30년의 공직생활을 해 오셨던 과장님을 퇴직금 몇 푼 안겨 주고 토사구팽 했던 거야. 결국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 그만두게 되신 거야.

일동: 그래 맞아. 그렇게 된 거야.

 

탁월한 유머감각

김진길: 대폿집에 가면 이 양반은 마담들에게 우스갯소리를 잘했지. 들어가자마자 시작하면 이야기가 끝이 없어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그 유머감각은 알아줘야 했지. 사람은 그런 재미에 사는 거 아니겠어. 사람이 항상 깐깐하고 말쑥하면 안 되잖아.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한 상무하고 심 회장님을 모시고 영광에 가서 하룻밤 자고 왔는데 그 장사치 아줌마들하고 얼마나 웃기는 얘길 잘 하는지. 우린 못 따라가. 이 양반이 하도 말을 잘하니까 그 아줌마들이 저 노인네 몇 살이냐고 묻는 거야. 그래, 저 노인네 아직 정정하시다구 했더니, 언제 들었는지 그 양반이 불쑥 나서서 “나랑 연애하시려우?” 하는 거야! (일동웃음) 하하, 그렇게 농담을 주고받으실 정도로 정정하시던 양반이셨는데 그렇게 갑작스레 돌아가실 줄 몰랐지. 허무해.

한재수: 음식점을 가면요, 그 양반 아주 특이한 습관이 있어. 나이 잡순 사람들의 유머가 뭡니까? 여자 상대로 하는 얘기가 많지요. 어느 음식점을 가든 주인아주머니에게 아주 재미있는 농담을 꼭 해서 자신의 인상을 남기고 가는 버릇이 있지. 그러고는 다음에 그 집에 또 갑니다. 다시 한 번 가서 “나 왔어요.”하면 주인이 빨리 알아보게끔 재확인을 해. 사람들이 음식점에 가면 음식만 먹고 그냥 가지 않습니까, 근데 이 양반은 그게 아니야. 다음에 와서 “또 오셨군요.”하고 인사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인상을 반드시 남겨 놔.

김진길: 하하하, 그게 그 분 특기예요, 특기.

이병학: 그 양반은 자신의 발자국을 남겨놓고 다니라고 했어. 그렇게 안 다니면 뭐하러 다니느냐는 거여! 또 그 양반은 대단히 세심한 분이기도 하지. 내가 면장을 할 때도 늘 나를 챙기셨지. 도의 과장하시던 분이 면장이 뭐 그리 대단해! 그래도 나한테 전화를 하신다구 이른 아침에. “이 영감이야? 나야, 계택이야.” 하시면 “아이구, 우짠 일이세요?” 놀라서 전화를 받지. “뭐가 우짠 일이야. 니들이 전화 걸어? 내가 걸어야지. 내가 오늘 거기 내려가면 되나?” “아이구, 어떻게 오시는데요?” “쌀도 준비해 줘. 장호원 우리 가던데 있지? 거기서 술 한 잔 해야지. 내가 오늘 살게. 너 돈 내지 말어. 절대 돈 내지 말어.” 그렇게 아침에 통화하시고 오시지. 내가 태양쌀로 좋은 걸 준비해두면 그 쌀을 사시는 거야. “이건 아들 주고 저건 딸 주고.” 하시면서······. 한번은 차에 다 실을 수가 없어 그걸 내가 차로 실어다 줄 테니깐 술이나 한잔 사시라고 하면 허허 웃으며 좋아하셨지. 그랬어. 그렇게 잊을만하면 아침에 전화가 걸려오곤 했어요. 아, 그렇잖아. 아무리 가까워도 세월이 지나면 다 잊어버리기 마련인데 그 양반은 그렇게 잊을만하면 꼬박꼬박 전화 걸어 오셨다구.

김진길: 아주 치밀하고 부지런한 것. 그 것이 그분의 성공비결이야. 아침 새벽전화의 대부분은 바로 심 회장님 전화야. 그렇게 부지런했어. 그리고 아주 서민적이셨지. 농촌에 가면 막걸리 받아 놓고, “아, 할머니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이 막걸리 한번 잡숴보세요. 기가 막혀요.” 넉살좋게 말씀하셨지. 소리소리 지르며 보리밭 갈아엎었다고 화가 나서 작대기 들고 나오던 노친네들이 그 술 한 잔 받고 웃음을 지으신다니까. 술 한 잔에 좋아서 “아, 갈아엎어야지!”하며 작대기를 던져버리는 거야.

한재수: 그 분은 노랭이 소리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도에서 과장했을 때나 노년에 진흥회장 하실 때도 그랬습니다마는 그 양반이 늘 그런 얘길 하세요. 당신은 자수성가를 했다고. “나는 내 힘으로 오늘날 정부기관까지 진출을 했고 생산도 내가 내 노력으로 했다. 누구한테 돈 받은 일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걸 자식한테 물려주기 위해 돈 번 것도 아니다. 그렇게 살아오는 게 몸에 배어 그렇게 한다.”고 하시지. 그래서 남한테 노랭이 소리 들어도 할 수 없다 하는 게 그 양반 얘기지. 그만큼 자신의 노력으로 재산을 늘리시고 늘 절약하는 게 생활이 되셨어. 그것이 기본이 되어 공직생활도 그렇게 해 오셨던 거지.

김진길: 하여튼 밤을 세워 얘기해도 모자랄 정도로 한 시대를 주름잡던 대단한 양반입니다. 그 시절 경기도 잠업인들 중 이 양반의 영향을 안 받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지요. 열심히 사시고 이웃을 위해 많히 베푸시며 인생을 마감하신 분이지요. 우리 잠우회도 그분의 가르침이나 영향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오랜 우정을 나누며 지낼 수 없었을지도 모르지요. 우리들에게는 정말 잊을 수 없는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생각의 전환을 꾀했던 치밀한 분

- 최해동 님 (광주)

 

 

나는 1970년부터 과장님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광주의 잠업지도원으로서 처음 과장님을 뵈었지요. 그때는 너무나 많은 일들을 했기 때문에 공무원 순직이 많았던 시절이었어요. 정말 눈만 뜨면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당시에는 경기도 각 지방도로는 다 비포장 도로였습니다. 그래서 여주에서 수원에 오다가 차가 전복되어 죽을 뻔한 순간도 있었어요. 그런 밤중에 과장님이 비포장도로를 달려 오시면서도 당장 담당계장을 불러내라는 거예요. 밤이든 새벽이든 가리지 않고 책임자를 나오라고 할 정도로 현장에서 채근을 많이 하셨어요.

주로 우리가 하는 일이 여주군, 양평군 등지에 뽕나무 심는 것이었습니다. 춘궁기 때 우리 농촌이 돈을 만질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바로 누에 양잠이었습니다. 특히 오지를 중심으로 일반 농작물을 심지 못하는 곳에는 전부 뽕나무밭으로 개간한 겁니다. 그래서 당시 농민들이 조금이나마 물질적으로 풍요를 누리게 됐지요.

가평군·광주군·여주군·이천군·양평군 등지에는 오지도 많았고 황폐한 땅이 많았습니다. 전혀 쓸모없을 것 같은 땅에다 뽕나무를 심는 거예요. 그게 성공을 거두었어요. 지금은 세상이 변해서 저마다 어려운 일을 하려들지 않고 인건비도 비싸져서 잠업이 몰락하게 됐지만 그때 당시에는 그게 아주 큰 수입원이 될 수 있었지요. 고생을 고생으로 생각하지 않고 일했던 때였으니. 그 양반의 인솔 하에 우리는 정말 죽을 고생을 한 겁니다. 시대상황이 그렇게 만들었어요. 아, 그것이 벌써 30십여 년 전의 일이 되었군요.

심 과장님은 “생각하면 달라진다.”는 말씀을 늘 강조하셨습니다. 이 얘기를 떠올리면 너무 많은 일이 생각납니다. 이 말씀 때문에 밑에 있는 사람들이 곤혹스러운 일이 많았지요. 한 예를 들지요. 어디에서 사업계획이 추진되면 보고서를 작성해야 합니다. 그 시절에는 차트를 주로 사용했는데, 행정보고에 관한 것은 무조건 차트로 하는 것이 유행이었지요. 그래서 그때 당시 내 동료였던 김창호 씨가 사업내용을 전부 글씨로 써서 슬라이드를 찍은 뒤 사업계획을 설명하곤 했습니다. 국장이고 도지사고 대통령이고 다 똑같았어요.

그런데 이 차트를 완성해 마지막 결재를 받으려고 하면 과장님이 브레이크를 걸었지요. ‘생각하면 달라진다.’를 강조하시며 차트가 그 양반 맘에 안 든다는 거지요. 종일 뽕나무 식재로 힘들게 일하는 것도 모자라 차트 작성으로 또 밤을 새는 거였어요. 이유는 차트의 글귀가 그 양반 맘에 안 든다는 것입니다. 차트를 만드는 목적은 상대방이 빨리 파악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며 일목요연하게 만들지 못한다고 계속 퇴짜를 놓는 겁니다. 너무 화가 나서 결재서류를 내팽개치고 나온 기억도 납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머리를 쓰게 하니 우리 입장에서는 늘 불만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혹독한 다그침이 없었다면 그 많은 일들을 철저하게 이뤄내지 못했을 거예요.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 뭔가가 달라진다는 말은 곱씹을수록 옳은 말이었거든요.

그러니 우리는 밤낮 일에만 매달릴 수밖에 없었지요. 그렇게 하다가도 과장님은 수하에 있는 우리들 수고를 알아주고 때때로 풀어주려고 노력하셨지요. 사무실 근처에는 니나노 술집이 있었어요. 그곳에서 젓가락 두드리면서 막걸리 한잔 먹고 풀든지 아니면 탁구를 치러갔습니다. 탁구를 치면 이기는 쪽에서 저녁식사 값 내고 지는 쪽에서는 목욕비 내는 걸로 결정을 하기도 했구요. 바쁜 나날 속에서도 그런 자잘한 재미도 있었답니다.

어쩌다 높은 분이 술값이라도 주시면 요정에 가게 될 때가 있지요. 그때 과장님하고 같이 가면 우리 총각들은 재미가 없는 거예요. 왜냐면 여자 종업원들을 하나도 못 들어오게 했거든요. 여자만 들어오면 안주도 많이 없어져서 술값이 더 들기도 하지만 술맛이 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총각들은 따로 자리를 만들어서 다른데서 술을 마시기도 했답니다.

그런데 사실 심 과장님은 농담을 아주 잘합니다. “나, 애인 하나 소개해 줘.”라며 은근슬쩍 농담을 잘하시는데 실지로 과장님 옆에 여자가 앉으면 그렇게 냉담할 수가 없어요. 그게 그 분의 생활방식인 거 같아요. 사내들끼리 모여 앉으면 여자들에 대한 농담들은 많이 했어도 과장님은 오직 사모님 한 분밖에 몰랐습니다.

그리고 술자리에서 또 곤혹스러운 것은 처음에 한 잔 두 잔 하다가 나중에는 대접에 정종을 한가득 따라주시는 거예요. 그걸 안 먹을 수도 없고 눈 딱 감고 다 마시면 그날은 그냥 다 자빠져 곯아떨어지는 거예요. 그 술 먹고 내가 집에 기어들어 간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답니다. 그런데 과장님은 그렇게 술을 많이 마셔도 전혀 흔들림이 없으신 거 보면 참 신기하더군요. 여주에 보신탕을 아주 잘하시는 할머니가 계셨는데, 우린 고된 일과를 마치고 일부러 그곳까지 갔지요. 그 비포장도로를 달려서 도착하면 들깨를 듬뿍 넣은 보신탕에 술 한 잔 먹고 피곤함을 달랬지요. 과장님은 그렇게 고된 일의 뒤에는 한잔 술로 우리를 풀어주기도 했던 분이었습니다.

과장님은 언제나 쉬지 않고 일하시고 또 그러기 위해서 쉬지 않고 생각하셨던 분이셨지요. 인생이라는 거 그냥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지만 그렇게 모든 걸 놓아두고 떠나신 분을 생각하면 인생이 참 허망해집니다. 그래도 그 분처럼 참되게 살다가 가신 분도 참 드물다는 생각입니다.

 

 

 

 

 

 

부모님과 같은 사랑으로

- 박영남 님 (시흥)

 

 

심계택 과장님이 경기도청에 계실 때 잠업과의 급사로 일을 하게 되면서 나는 그분을 처음 뵙게 되었습니다. 13살 고학생으로 그 당시 매우 어려운 처지에 있었는데, 과장님은 그런 나를 아버지와도 같이 보살펴주셨습니다. 내 인생의 가치관이 형성될 가장 중요한 시기였기 때문에 나의 삶은 거의 그분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나는 객지생활을 오래 했기 때문에 과장님은 나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어린 내게 참으로 많은 것들을 베푸셨지요. 어느 날은 음식점에 무조건 끌고 가서 맛있는 것이라고 먹게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보신탕이었더군요. 어린 사람에게 몸에 좋다는 음식을 먹여주고 싶으시면서 혹시 거부감을 가질까봐 세심하게 배려하셨던 거지요.

내가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이 되자 어느 날 사복을 입고 나오라고 하시더니 무교동의 요정으로 데려갔습니다. 사내는 어른에게 제대로 술을 배워야 한다며 술을 따라 주셨고,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 어느 날은 함께 갈 데가 있다며 나를 부르시더니 금은방으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남자는 항시 위급할 때를 대비해야 한다면서 금반지 하나를 사서 내 손에 끼워 주시더군요. 고학생으로 늘 어렵게 살고 있는 저를 과장님은 그렇게 뜨거운 가슴으로 안아주셨던 것입니다. 일할 때는 정말 서러울 정도로 혹독하게 시키면서도 인간적인 관계로 돌아오면 언제나 개방적이고 멋스러운 면이 있으셨습니다.

친인척에게는 혹시라도 당신의 재산을 보고 의지하려는 마음을 가질까봐 우려하셨는지 유난히 엄격하신 편이었고, 돈에 대해서도 인색하다 싶을 정도로 깔끔하게 처리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나 그 밖의 인간관계에서는 상당히 우호적으로 대하셨습니다.

사모님 역시 과장님 못지않게 매우 다정하신 분이셨습니다. 주말이면 미아리 집으로 나를 부르셔서 나를 거의 친자식처럼 먹을 것 입을 것을 모두 챙겨주셨지요.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며 늘 외로워했던 내게 과장님과 사모님은 부모님을 대신한 깊은 사랑을 전해 주셨던 것입니다. 특히 사모님은 엄하신 가장 아래서 늘 순종하며 과장님을 위해 헌신하셨고 나에게도 정말 따뜻하게 잘 대해주셨습니다.

제 기억으로 과장님은 사진에도 일가견이 있으셨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카메라 들고 출장을 떠나시는 것을 좋아하셨지요. 당신이 늘 현장에 투입되어 실무 위주로 일을 하셨던 탓에 각종 뽕나무와 잠업관련 자료들을 직접 만들어 두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늘 하셨습니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항상 학구적인 모습을 보이셨어요. 어린 나이에도 그런 과장님의 모습은 아주 감동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러한 모든 모습들은 알게 모르게 내 생활 전반을 지배했고 나는 많은 것들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무엇보다 어린 내게 과장님의 존재는 부모님 같이 자상하신 분이셨습니다. 당신이 젊은 시절 가난 때문에 정규교육을 제 때에 받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셨기 때문에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에게 늘 도움이 되려고 애쓰셨어요. 특히 생각이 곧고 열심히 일하는 젊은이들에게 투자하는 돈은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장래성이 보이는 사람은 끝까지 밀어주었고 자생력 없고 게으른 사람은 가차 없이 잘라 버리셨지요.

내가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이 되자 장사를 할 것인지 진학을 할 것인지 물으시며, 일류대에 붙으면 학비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어요. 일류대에는 차마 못 미치는 실력이기도 했지만 빨리 독립해서 사회에 뛰어들고 싶어서 사업을 하겠다고 했더니 의정부에 가게를 내라고 하시더군요. “네 가게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일해라.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사업밑천을 빌려주시면서 공짜로 주는 것이 아니니, 성공하면 갚으라고 말씀하시며 부담감을 덜어 주셨어요.

의지할 곳 없는 나를 친부모님 이상으로 격려해 주시고 자립을 위해 도우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밀어줘야 할 부분에 대해서는 당신이 가진 것을 다 주시는 화끈함을 보이셨지만 돈을 낭비하거나 기분파로 흥청망청 하는 일은 절대 있을 수가 없었지요. 늘 절약과 검소함을 생활화하셨고 매우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분이어서 주위에서 구두쇠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했습니다.

집안에는 잠업지도원을 비롯해 과장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수시로 들끓었는데, 단 한번도 공직자로서의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된 적이 없는 깨끗하신 분이셨습니다. 공직자로서의 청렴·강직함·의리, 겉으로 보이지 않는 깊은 속사랑은 리더로서의 훌륭한 자질을 가진 분이었음을 증명하고도 남습니다.

과장님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후배들에게 솔선수범해서 보여준 사랑은 변치 않는 인간관계를 오래도록 형성해 오시기에 충분하셨지요. 나는 내 성장기의 모든 것을 지켜봐 주시며 격려와 용기를 심어주신 심 과장님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분처럼 훌륭하신 분은 없다고 나는 내 자식들에게 자랑스럽게 말해 줄 수 있습니다.

 

 

 

 

숨어서 베풀어 주시는 분

- 김지식 님 (광주)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잠업과 인연이 돼서 사장님을 알게 됐습니다. 그때 당시 설악중학교 2개 학급 120명이 졸업을 했는데 설악면에는 진학할 고등학교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고등학교를 가려면 청평까지 나가서 청평공고를 다녀야하는데 가정 형편상 타지에서 공부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지요. 그 뒷바라지하기가 힘들어 대부분 진학을 포기하는 게 그때의 우리네 실정이었습니다.

우리 설악면에 오신 심계택 사장님이 우연히 이런 사정을 아셨고 염두에 두었다가 오치성 국회의원하고 상의해서 잠업고등학교를 설립하게 된 거예요. 그때 당시 잠업이 상당히 부흥을 했고 많은 사람들이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이라고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나는 설악잠업고등학교에 입학했던 거지요. 내가 제1회 졸업생이었는데, 그때 졸업했던 동기들이 60명이 되지요. 사장님이 아니었으면 그 때 그 60명의 학생들은 고등학교 졸업장 없이 사회에 뛰어 들었겠지요. 그랬다면 지금의 자리까지 올 수 없었을 거예요.

설악잠업고등학교를 나온 많은 사람들이 경찰공무원이나 육군 삼사군 학교 같은 곳으로 진학을 했어요. 성실하고 열심히 공부했던 친구들이었지요. 모두들 심계택 사장님과 오의 원을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나는 심 사장님이 도청생활을 마감하고 광주의 농장에서 광동 잠종장을 운영하고 계실 때 그분 밑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군대 갔다 와서 잠깐 면서기로 있는데 심 사장님이 부르셨고 그때 사장님과 뜻을 같이 해서 한번 일을 해보자 결심해서 일을 시작했던 겁니다.

내가 사장님 밑에서 처음 일하게 된 건 1979년도 4월 19일 날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일 년에 봄과 가을 두 차례 잠종일을 하고 매달 봉급 받기가 굉장히 미안했지요. 그래서 제안을 했어요.

“사장님, 농장 한쪽에 우사를 짓고 거기에다 축산을 시작하면 어떨까요?”

그랬더니 사장님이 흔쾌히 응해주셔서 축산까지 시작하게 되었던 겁니다. 그렇게 광주의 농장시절 동안 잠종과 축산을 겸하게 되었지요. 한 때는 제법 가축들이 많았지요.

그런데, 그 후로 중국산 실크 수입에 의해 국내 잠업이 큰 타격을 받게되자 뽕나무를 다 뽑아버리는 아픔을 겪게 되었답니다. 그렇게 되자 잠업과 축산 모두 줄여야만 했지요. 내가 할 일이 없어지니까 할 수 없이 사장님께 말씀 드렸습니다.

“저 떠나야겠습니다. 제가 더 이상 있어 도와드릴 게 없습니다." 하고 짐을 꾸렸는데, 사장님이 다른 일자리를 알아봐 주셨습니다.

“광주 축협에 자리가 하나 있는데, 거기서 꾹 참고 한 3년만 있어 봐라.”

그래서 축협에서 근무하게 되었는데, 허허, 지금까지 못 가고 이렇게 근무하고 있지 뭡니까. 그때 기능직으로 들어와 잡일들을 거들다가 지금의 이 자리(유통부장)까지 올라오게 되었지요. 그게 다 사장님의 세심한 도움 때문이었던 거죠.

사장님과 헤어져 농장을 나온 것은 1985년 11월이었어요. 내가 성남에서 살림을 차리고 한 1년 반쯤 있으니까 사장님이 다시 나를 부르셨지요.

“너 가정 형편이 어려우니 농장에 와서 지내라. 축협에서 일하면서 퇴근 후 시간 나는 대로 농장 일을 조금씩 도와주면 안 되겠니?”

하시더군요. 그래서 다시 농장으로 들어가게 됐지요.

 

사장님은 우리 가족에게 참 잘하셨어요. 지금도 잊지 못할 일이 있는데, 아들 학주를 낳아 1년도 안되었을 때였지요. 어느 날 학주를 데리고 나갔다가 포경수술을 해 가지고 오셨어요. 그 양반은 사시면서 앞날을 내다보시는 통찰력이 있으셨나 봐요. 아, 누가 그때 포경 수술할 생각을 할 수 있겠어요. 아이들이 자라면서도 용돈도 챙겨주시고 정말 친손자처럼 잘 해주셨죠. 그리고 이따금 아내를 통해 쌀을 한 가마니씩 주시곤 했어요. 그때 쌀 한 가마니는 적은 돈이 아니지요. 그렇게 몰래 은근히 베푸는 게 그 분의 특성이셨어요.

그 당시 사장님은 알게 모르게 이웃에게도 많은 도움을 주셨어요. 그런데, 그 분은 좋은 일을 할 때에도 앞에 나서서 자신을 드러 내놓는 분이 아니에요. 기부를 해도 다른 사람 이름으로 했고, 그냥 은밀히 남에게 도움을 주시는 점잖은 분이셨죠. 비록 땡삐나 독일병정이라는 지독한 의미의 별명을 듣기도 했지만 속으로는 따뜻한 분이셨죠.

그리고 그 양반은 허튼 곳에 돈을 절대 쓰지 않았고 언제나 근검 절약만이 우리 삶의 중요한 미덕이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래서 사장님의 권유로 가나안 농군학교까지 갔다 왔습니다. 거기서 깨우친 것들은 제 일생에 두고두고 큰 지침이 되고 있어요. 아니 심 사장님이 보여주신 모든 생활철학은 저의 삶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도 가슴 아프게 기억나는 것은 잠업의 나아갈 길이 더 이상 보이지 않자 뽕나무를 다 뽑아 버리고 울던 날이지요. 그날 밤새워 소주를 열일곱 병을 마시고 사장님과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던 일이 이젠 아련한 추억이 됐네요.

심 사장님은 저와 우리 가족들에게 참 소중한 기억들을 많이 남겨주신 분이십니다. 숨어서 남모르게 베풀어주시던 그 분의 따뜻한 손길을 우리 가족들은 늘 잊지 못할 겁니다.

 

 

 

 

 

 

 

 

 

 

 

제 8장 나의 아버지

 

 

 

 

추억의 집

 

준희가 태어나던 날

“여보, 오늘만 출근을 좀 늦추면 안될까요?”

“......?”

“아무래도······ 오늘 아이가······.”

어머니가 무거운 몸을 가누지 못하고 막 출근하려는 아버지를 불러 세우셨다. 아버지는 서류봉투를 내려놓고 어머니를 부축하셨다. 아버지는 누나와 내가 태어날 때 옆에서 어머니를 지켜주지 못했다. 부부라는 인연 속에서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애틋한 표현 한번 해보지 않은 아주 무뚝뚝한 분이셨다. 그렇지만 어찌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겠는가. 배가 부른 가운데서도 힘겹게 집안일을 하는 아내를 바라보는 안쓰러움이 어찌 없었겠는가.

아버지는 출산기미를 보이는 어머니를 부축해서 집 근처 산부인과로 가셨고 나는 엄마가 아프다는 사실에 겁이 나서 훌쩍이며 아버지를 따라갔다. 그날이 바로 하나뿐인 내 여동생 준희가 태어난 날이었다. 분만실에서 나온 아버지는 상기된 얼굴로 예쁜 여동생이 태어났다고 내게 말씀 하셨다. 나는 병원복도에 앉아 동생이 어떻게 생겼을까 혼자 상상했다. 얼마 후 나는 아버지를 따라 어머니가 누워 계신 방으로 들어가 준희를 처음 보았다.

“상구야, 봐라. 네 동생이란다.”

“와, 아버지. 저 아기가 내 동생이에요?”

이상하게 생긴 조그만 아기가 내 동생이라니, 나는 신기해하며 준희를 바라보고 또 바라봤다. 어린 나이에 동생이 생겼다는 것이 신나서 깡총깡총 뛰었던 것 같다. 누나와 내가 태어날 때는 밤낮없이 직장일로 뛰셨기 때문에 아버지는 출산하는 어머니 곁에 없었다. 그러나 막내 준희만은 아버지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 세상에 태어나는 축복을 누린 셈이었다.

 

 

세뱃돈 이야기

아버지 생신이면 우리 집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늘 무엇인가 재미있는 일을 찾곤 했던 우리들은 집안에 사람이 붐비는 것 자체가 그저 신나는 일이었다. 그런 날은 우리 집은 잔칫집이 되어 어머니는 늘 분주하게 움직이셨다. 우리가 좋아하는 잡채를 비롯해 평소에는 꿈도 꾸지 못한 많은 음식들을 맛볼 수 있었다. 어머니는 그 많은 음식들을 일일이 당신이 직접 만드셨다. 먼저 남의 손맛이 미덥지 않은 까닭도 있었고 남에게 일손을 맡기면 품값을 줘야하기 때문에 가능한 한 모든 일을 당신이 혼자 도맡아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가 이렇게 힘들여 손님상을 치르고 나면 아버지는 음식 문제로 언성을 높이곤 했다.

어머니는 음식을 차릴 때 언제나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를 정도로 한 상 푸짐하게 차려내야 흡족해 하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모든 것을 알맞게 준비하고 다 떨어지면 다시 내오라는 식이었다. 싸움은 언제나 어머니가 참는 것으로 끝이 났지만 당신 뜻을 완전히 굽힌 것은 아니어서 잔칫날이면 벌어지는 이런 두 분의 사소한 다툼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다른 것은 절약할 수 있지만 먹거리마저 야박하게 굴면 안 된다는 주장이셨고, 아버지는 모든 것을 절약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는 이상 먹는 것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다고 하셨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런 사소한 마찰이 있긴 했지만 손님이 오는 날은 언제나 우리에게 가슴 설레는 날이었다. 특히 아버지의 동료직원들이 한푼 두푼씩 집어주는 용돈은 늘 우리 삼남매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했다. 어린 우리들에게 일 년 중 우리의 수입이 제일 좋은 것은 다름 아닌 설날과 아버지 생신날이었다. 이런 날에는 그야말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우리 집을 다녀가셨다.

설날 아버지를 찾아오신 손님들에게 세배를 드리고 나면 언제나 우리 삼남매의 주머니는 두둑하게 지폐가 쌓였다. 그런 날은 음식마저 너무 많이 먹어 종종 배탈이 나기도 했지만, 마음만은 세뱃돈으로 즐거웠다. 그러나 이런 즐거움은 잠시뿐이었다. 손님이 다 돌아간 뒤에는 우리 삼 남매의 세뱃돈은 어머니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어린 우리로서는 엄마에게 빼앗겨도 군말 없이 있어야 했다.

어머니는 그 돈으로 쌀이 떨어지면 봉지쌀을 사거나 모아 두었다가 가정에 급한 일이 있을 때 쓰시곤 했다. 어머니가 세뱃돈을 강탈할 때마다 우리가 칭얼대면 아버지는 당연하다며 오히려 우리를 나무라셨다. 돈이라는 것은 언제나 땀을 흘려 벌어야 그 값어치를 안다고 교육시킨 아버지이셨다. 공짜로 얻은 돈이나 사행심에 의해서 운 좋게 번 돈은 언제나 허망하게 쓰이게 마련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억울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아빠

어린 시절 제일 신나는 일은 뭐니뭐니 해도 아버지의 멋진 지프를 타고 달리는 것이었다. 아이들 세계에 있어서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상은 곧 자신의 미래이기도 한 법이다. 즉 아이는 아버지라는 거울을 통해 꿈을 꾸고 세상 밖으로 나아가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둔 아이들은 언제나 당당히 자신의 아버지를 자랑하는 법이다.

내가 어렸을 적에도 언제나 내 주위에는 아버지의 재력에 대해 자랑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멋진 선물을 받았거나 아버지와 같이 동물원에라도 다녀왔다는 말을 들으면 언제나 기가 죽었다. 그런 아버지를 가진 친구가 부럽기만 했고, 우리 아버지는 왜 그렇게 멋지지 못할까 불만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 집 골목에 아버지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던 때가 있었다. 많은 아이들이 골목에 세워진 아버지의 지프를 보기 위해 빙 둘러서 있었다. 나는 그 지프가 우리 아버지의 것임을 늘 자랑스러워했다. 더군다나 그 지프의 조수석에 내가 앉기라도 하는 날이면 언제나 아이들의 부러운 시선을 한 몸에 받고 한껏 들뜨곤 했다. 차에 오르면 모든 것들이 신기했다. 핸들과 와이퍼, 그리고 백미러와 가속기 등 내가 모르는 것을 물으면 아버지는 언제나 자상하게 명칭과 그 쓰임새를 일러주셨다. 그리고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서 핸들을 잡아 보기라도 하는 날이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이가 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일요일이면 종종 당신의 지프에 나를 태우고 오지를 다니셨다. 그 산간 오지를 달릴 때면 처음 보는 시골사람들이 아버지를 향해 몸을 굽혀 인사를 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언제나 깍듯하게 인사를 받으셨다. 그럴 적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우리 아빠가 대통령 다음으로 높은 줄 알았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돌아가서 이 엄청난 무용담을 어떻게 이야기 할 것인가 고심하기도 했다. 그랬다. 작은 체구의 아버지였지만 나에게 있어서 그 어떤 아버지보다 크게 보였던 것이다.

이것 말고도 내가 아직도 아련한 향수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아버지와 같이 장을 보던 일이었다. 아버지는 시장 다니시는 것을 매우 좋아하셨다. 시장에 가야지 사람 사는 냄새를 맡을 수 있다고 하셨다. 그 시끌벅적하고 어수선한 곳, 흥정과 싸움과 이야기가 있는 곳, 인생의 단면이 여실히 드러나는 장소가 시장이었다.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일일이 시장을 돌아다니며 그날 장거리를 직접 구입하시거나 각종 물건들 값을 물어보곤 하셨다.

뭐라 해도 잊을 수 없는 것은 아버지와 함께 시장통에서 순대나 떡볶이 같은 걸 군것질하던 때였다. 어른이 된 지금 추억이 그리워 짐짓 그런 것들을 사먹어 보기는 하지만 그 시절의 그 맛을 다시 느끼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눈코 뜰 새 없는 공직생활 탓에 아버지와 단란하게 보낸 기억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어린 시절을 반추하며 이런 저런 에피소드들을 적다 보니 어린 나에게 아버지는 세상 그 누구보다 멋진 분이셨다. 나는 아버지를 늘 자랑스러워했고, 그렇게 멋진 아버지를 가진 나는 행복한 아이라고 생각하며 자랐던 것이다.

 

 

 

 

바른 교육 산 교육

 

 

근검절약

아버지의 삶 전체는 근검절약으로 일관되었다. 직장에서 공로로 받은 상금조차 밥 한 끼 사드시지 않고 공익을 위해 재투자하시거나, 회식자리 같은 곳에서조차 유별날 만큼 근검절약을 몸소 보여주셨다. 이런 아버지의 절약정신은 집 안에서도 예외가 없었다. 공무원 가족은 먼저 솔선수범 하여야 한다고 우리들에게 누누이 강조하셨다.

그 한 예로 우리는 5,6학년 때까지 겨울철이면 온 가족이 안방에서 겨울을 나곤 했다. 조금이나마 연탄 값을 절약하기 위해서였다. 각자 자기의 방을 쓰던 나와 누나는 한방에서 지내려니 좁고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좁은 방에서 겨울방학 숙제를 하고 봄이 올 때까지 참고 견뎌야 했다.

또한 아버지는 우리들이 가만히 노는 걸 보지 못하고 자주 일을 시키곤 하셨다. 그 중의 하나가 정원에 거름을 주는 일이었다. 화장실의 인분을 직접 퍼다가 마당에 있는 나무 곁에 구덩이를 파고 넣어주는 것이었는데, 나는 이 일이 정말 싫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거름을 줄 적마다 한 손으로 코를 싸쥐고 지독한 인분냄새를 참고 견뎌야 했다. 일이 다 끝나고 한바탕 소란을 떨며 몸 구석구석을 씻어도 쉽게 인분냄새는 빠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어린 나에게 노동의 신성함을 가르쳐 주려고 하셨지만 그 뜻을 헤아리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흘러야 했다. 나는 몸에서 인분냄새가 배어 친구들이 옆에 왔다가 도망가지나 않을까 걱정하곤 했을 뿐이었다.

정원을 가꾸는 일에 아버지는 큰 정성을 들였다. 그래서 미아리의 우리 집은 정원이 아름답기로 동네에서도 소문이 자자했다.

“주인아저씨가 대체 뭐하시는 분이시기에 이렇게 예쁘게 정원을 꾸며 놓으셨어요?"

“아유, 정말 예쁘다. 언제 시간 나시면 우리 집 정원도 좀 봐줘요"

우리 집에 놀러 왔다가 산뜻하게 꾸며놓은 정원을 보며 이웃주민들은 다들 경탄해마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아름다운 정원이 만들어지기까지 누나와 내가 거름을 주었던 그 숨은 노력이 있다는 것은 몰랐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소리를 듣는 날이면 우리는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그때 나는 ‘열심히 일을 하면 좋은 결과가 따르는구나.’라고 생각하곤 했다.

우리가 맡은 정원을 꾸미는 일에는 인분 주기 외에도 볏짚 싸기와 가지치기가 있었다. 늦가을이면 월동준비를 하느라 볏짚을 관상수 밑동에 둘러주었고 봄이면 전정가위를 잡고 어설프게나마 가지치기를 했다. 그 중에서도 가지치기는 숙련된 기술을 필요로 했다.

“좀 더 생각하면서 나무를 자르거라."

항상 하시는 말씀이셨다. 그게 초등학생인 나로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늘 엉뚱한 가지를 자르거나 생가지를 잘라서 아버지에게 꾸지람을 듣곤 했다. 나무를 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잘 자라지 않는 나무가 있으면 햇빛을 풍성하게 받을 수 있도록 나무 심는 위치도 생각을 해서 심으라 하셨다.

월동준비를 할 때면 볏짚을 마당에 늘어놓고 언 손을 비벼가며 일일이 나무의 둥치를 싸매어주는 것은 하나의 행사가 되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우리 집 정원에 대한 소문은 금세 퍼져갔고 아버지는 직장상사나 이웃들의 정원 일을 해주기도 하셨다. 나 역시 어른이 된 지금 길을 가다가도 가지가 엉망인 관상수를 보면 전정가위를 들고 가지를 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리고 그 나무 곁에 아버지의 꾸지람을 듣고 있는 시무룩한 소년의 얼굴을 떠올리며 빙긋 웃음을 짓기도 한다.

 

 

봉사하는 생활

내가 어린 시절에는 겨울에 눈이 참 많이 왔다. 아이들과 어울려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을 하고 눈썰매를 타는 등 겨울철에도 밖에서 뛰놀 수 있는 것들은 참 많았다. 그러나 조금씩 학년이 높아지기 시작하면서 눈이 내리면 나는 기쁘기보다는 한숨이 절로 나오곤 했다. 왜냐하면 그 많은 눈을 내가 다 치워야했기 때문이다. 동네 아이들은 눈이 오면 온 동네를 달리며 신나서 뛰곤 하는데, 나는 마당에 쌓인 눈을 쓸고 길을 내느라 땀을 흘리며 일해야 했다.

“일을 하려거든 확실히 해라. 그저 하는 둥 마는 둥 하면 아예 하지 말던지. 알았니?"

가끔은 꾀를 부리느라 겨우 우리 집 마당과 대문 앞만 쓸고 집으로 돌아오면 아버지는 크게 나무라셨다. 눈을 치우려면 우리 집 앞만 치우지 말고 골목이 끝나는 곳까지 치우라고 하셨다. 사내가 한번 일을 시작하면 화끈하게 뿌리를 뽑아야지 않느냐며 호되게 야단치시곤 했다. 나는 그렇게 혼나고 나서야 다시 빗자루를 들고 골목 끝까지 치우곤 했는데, 어느새 눈이 다시 내리고 치웠던 길에 새로 눈이 쌓이기라도 하면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하이고, 녀석 참 부지런하기도 하지.”

내가 골목을 치우는 것을 보고 이웃 아주머니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왜 아버지는 우리 집 앞만이 아니라 골목 끝까지 치우라고 하셨을까? 그것은 아마도 공직에 있던 당신이셨기에 늘 남에게 봉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은연중에 가르쳐 주시고 싶었던 것이었을 게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눈밭을 뛰며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하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치워도 치워도 눈 쓸기는 끝이 없었다. 어쩌면 아버지는 이런 고된 눈 쓸기를 통해 인내와 끈기를 심어 주려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랬다. 그런 유년시절 나의 아버지를 떠올리면 늘 우리에게 다그치던 모습들이 떠오른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런 모습 중에 공부하라고 말씀하신 적은 한 번도 없으셨다. 공부하는 것보다도 남에게 봉사하고 성실한 가치관과 습성을 심어주는 것이 아버지는 바른 교육, 산 교육이라고 생각하셨던 것이다. 그 덕분에 우리 형제들은 공부하라거나 좋은 대학에 가라는 부모님 등살에 시달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까만 도시락

도시락에 관한 잊을 수 없는 일이 하나 있다. 국민 대부분이 풍족하지 못했던 70년대였다. 쌀 자급자족이 이뤄지지 않았던 시기라 혼식을 위한 캠페인을 많이 했다. 쌀에다 보리를 적당히 섞는 것이 당시의 정부시책이었는데 아버지는 보리쌀에다 쌀을 조금 섞는 식으로 혼식을 강조하셨다. 때문에 언제나 학교에 가서 도시락 뚜껑을 열면 시커먼 밥알들이 빼곡하게 나를 쳐다보고 있어서 나는 늘 창피하여 밥뚜껑을 다시 닫아버리곤 했다.

아이들이 나의 까만 도시락을 보고 우리 집이 쌀도 못살 정도로 가난하다고 생각할 거 같아서 그저 점심시간이 싫었다. 이런 어려움을 어머니께 말씀드려도 아버지의 엄명이라 어찌할 수가 없었다. 혼식도 솔선수범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점심시간이었다. 그날도 도시락을 반쯤 열고 간신히 한 손으로 가린 채 밥을 먹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일일이 각 분단을 돌아보시면서 혼식을 점검하고 계셨다. 혼식을 하지 않는 학생들은 선생님의 호된 꾸지람을 들어야했다.

어느덧 내 차례가 왔다.

“상구야, 넌 왜 도시락을 가리고 먹니? 혼식을 안 했니??

“그게 아니라······.?

“자 어디 좀 보자??

“······.?

선생님은 나의 팔을 치우고 도시락을 바라보셨다. 나는 창피하여 고개를 떨구었다.

“하, 상구가 혼식의 모범을 보이는구나.?

“······!”

선생님은 그날 나의 도시락을 하나의 본보기로 하여 우리나라가 왜 혼식을 해야 하는 지 일일이 설명하셨다. 아이들도 우르르 내 자리로 벌떼처럼 몰려들어 보리가 훨씬 많은 까만 도시락을 구경했고 선생님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물론 나는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 날 이후 나는 전과는 달리 도시락 뚜껑을 활짝 열고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

아버지의 절약정신은 우리 집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길을 가다가 쓸 만한 폐품이나 남이 버린 물건을 죄다 집안으로 끌어들이셨기 때문이었다. 정원과 다락, 창고 등 집안 구석구석마다 아버지가 주워 오신 물건들로 늘 그득하였다. 그러면 언제나 어머니가 한마디 잊지 않으셨다.

“아니 집안이 무슨 고물상이에요? 너무 많이 쌓여서 집 안 꼴이 말이 아니라구요······.?

“잔말 말고 주워온 것 정리나 하라고!?

어머니는 늘 어머니대로 집안 일로 바쁘셨기 때문에 아버지가 주워온 것을 정리하는 것은 결국 누나와 나의 몫이었다. 병은 병대로 신문은 신문대로 모아 놓으면 아버지는 고물상을 불러 현금으로 바꾸셨다. 그리고 그날 돈을 어머니에게 드리면 어머니의 잔소리는 쏙 들어가고 어머니 역시 우리들에게 함부로 물건을 버리지 말 것을 강조하셨다. 이런 부모님의 성화에 우리 삼 남매는 길을 가다가도 쓸 만한 것들이 보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 집은 없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아버지는 왜 이렇게 구질구질할 만큼 절약하고 살아야 했을까. 돈에 욕심이 생겨서 이렇게 지독할 정도로 절약을 하신 것은 아니셨다. 그것은 훗날 당신이 고백하셨던 것처럼 단지 이렇게 사는 게 몸에 배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아버지가 돈에 욕심이 있고 정말 십 원 한 장에 부들부들 떠는 지독한 구두쇠라면 일체 경제적으로 손해 보는 일은 하지 않았으리라.

예전에 친척 형님 중 한 분이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한 적이 있었다. 중동에 건설노동자로 일을 하러가게 됐는데 부족한 비행기 값을 보태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매정하게 일언지하에 거절하셨다. 당시 자세한 상황은 모르지만 훗날 아버지 말씀으로는 와신상담하는 마음으로 더 열심히 돈을 벌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하셨다.

이런 매몰차고 가혹한 교육방식은 당신의 아들이라고 해서 예외가 없었다. 내가 조금씩 씀씀이가 커지기 시작하던 중학교 때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손을 내밀어 용돈을 달라고 하는 내 모습이 영 탐탁치 않으셨던지 나를 부르셨다.

“이제 네 녀석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나이가 됐으니 용돈 정도는 네가 스스로 벌도록 해라. 알겠니??

“예, 근데······. 저, 뭘 하고 벌어야 할지······.?

“신문배달을 해 보거라.”

아버지의 뜻대로 나는 신문배달을 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가정 형편이 어려운 내 또래 아이 중에서도 몇몇은 스스로 신문을 돌려 자기 용돈을 벌곤 했던 것이다. 나도 그 정도 일은 할 수 있겠거니 하고 며칠 후 동네 근처 신문보급소를 찾아갔다. 이런저런 신상을 물어보시던 보급소장님은 아버지가 뭐 하는 분이냐고 물었다.

“저, 도청에 다니시는데요. 과장이십니다.?

“아버지가 도청에 다니시는데 왜 이런 일을 하려하지??

“그게······.?

하지만 내가 우리 집 아버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도 그는 잘 모를 것이었다. 그날 집에 돌아와 내가 도청 과장의 아들이라서 거절당했다는 말씀을 드리자 아버지는 하는 수없이 메추라기를 키워 보라고 하셨다. 마당 한편에 메추라기장을 짓고 메추라기 수십 마리들을 돌보며 알을 까게 하는 일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방학 내내 그 일을 해내자 아버지는 열심히 뭔가를 이루고 있는 나를 보고 매우 흡족해 하셨다. 자식들에게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자립의지를 키워 주시고자 늘 생각하신 분이셨다.

이렇듯 아버지는 특별히 외아들이라고 해서 나를 곱게 키우지는 않으셨다. 혹독하고 매섭게 일을 시키고 훈련받도록 하는 것은 공직시절 부하 직원을 다루실 때나 자식 교육하실 때나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반백이 되어가는 아버지

 

대학과 군 시절

아버지께서 내게 공부하라는 말씀은 거의 듣지 않았지만, 학창시절 나의 학교성적은 우수한 편에 속했다. 그래서 아버지 역시 은근히 내가 좋은 대학에 가기를 바라셨을 거다. 그러나 나는 대학 입시에 낙방하고 말았다. 내 생에 있어서 첫 번째 실패였다. 실수를 하지 않았더라면 일류대도 갈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이미 시험은 끝났다. 친구들은 대학에 간다고 모두 신이나 있었고 나보다 공부를 못하던 녀석들도 자기가 원하는 대학에 붙어 한껏 들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실의에 빠져 있어야 했다. 이런 나에게 가장 먼저 따뜻한 격려의 말을 주신 분은 바로 다름 아닌 나의 아버지이셨다.

“사내자식이 그렇게 힘이 없어서, 어디에 써먹겠냐. 힘내! 시험이 어디 이번 한번 뿐이냐!?

그날 아버지는 내게 걱정의 말씀과 함께 큰 용기를 주셨다. 게다가 적지 않은 용돈을 주시면서 멀리 혼자 여행이라도 다녀오라고 하셨다. 혼날 것이라는 내 짐작을 깨고 아버지는 결정적일 때 나의 힘이 되어주신 분이셨다. 며칠 후 나는 여행 대신 입시학원에 등록하고 재수의 길로 들어섰다.

이듬해 대학생이 된 나는 재수생활로 인한 뒤쳐진 일 년을 채우기 위해서 남보다 바쁘게 보냈다. 그러다 어지러운 시국과 학생들의 데모로 인해 휴학을 했고 군 입대를 생각해야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모님의 그늘을 떠나 낯설고 물 설은 곳으로 가는 것은 정말 두려운 일이었다. 나는 행여나 방위로 빠질 수 있는 길이 없지 않나 여러 곳을 알아보려고 고심을 했다. 그러나 이런 나의 심중을 아버지는 꿰뚫고 계셨다.

“사내라면 최전방에서 군대를 마쳐야 한다!"

그 말이 전부였다. 언제나 아버지의 말씀을 한 번도 거역한 일이 없는 나는 순순히 그 말에 복종했다. 현역으로 입대하여 신병생활을 하는 동안 군인으로서의 하루하루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아버지에게서 배운 근면 성실함이 몸에 배어 있었던지 우려했던 것 보다 잘 적응해 나갔다. 군에 있으면서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지난 20여 년간 나의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뿐만 아니라 내 모든 삶의 모델을 만들어준 훌륭한 교사 역할을 하신 분이셨구나…….’

그 무렵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내가 부산에서 군복무를 할 때 아버지가 육순을 맞이하신 것이었다. 가족들이 부대로 면회 와 준비해 온 음식으로 식사를 나눈 것이 육순 잔치의 전부였다. 내가 직접 좋은 자리를 마련해 아버지를 모시지 못한 것이 죄스러웠다. 아버지는 그날 도리어 내게 열심히 군복무에 임하라며 등을 두드리며 격려해주셨다.

자식들의 결혼 이야기

1984년 제대한 후 남은 학업을 마친 뒤 나는 첫 직장에 취직했다. 아버지는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 주셨지만 하나뿐인 아들이 당신을 이어 공무원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에 은근히 서운해 하는 눈치셨다.

첫 직장이라 애로도 많았고 나름대로 설렘도 있었다. 직장생활을 통해 내 삶의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고 있을 즈음, 아버지가 이제 결혼도 생각해야 한다며 잘 아시는 분의 소개로 내 중매를 주선하셨다. 말씀은 안 하셨지만 아버지는 당신의 연세를 생각하고 빨리 손주를 보고 싶어 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할 수없이 나간 맞선자리였는데 여자 쪽의 부모님과 우리 부모님은 마치 모든 게 다 성사가 된 것처럼 서로 술을 따라 드리며 좋아하셨다.

그러나 정작 나는 상대 여자가 맘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없던 일로 하자고 말씀 드렸다. 아버지는 많이 실망하신 것 같았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아버지의 마음을 풀어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어디 가서 맘에 드는 여자를 당장 구해 결혼 할 수도 없었다. 아버지는 하루가 다르게 늙어 가셨고 점점 건강도 좋지 않게 되었다.

 

이즈음 누나가 조카 여민을 낳아 아버지께 안겨드렸다. 여민이 때문에 아버지는 다시 기쁨을 찾으신 것 같았다. 아버지는 여민을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인양 귀여워하셨다. 언제나 여민이가 쓸 장난감이나 먹거리를 챙겨오셨고 일부러 여민을 위해 냉장고 가득 음식을 넣어놓으셨다. 이런 아버지의 관심과 사랑은 사위에 대한 아버지의 애틋함도 녹아 있는 것이었다.

매형을 생각하면 돌아가실 무렵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라 눈시울이 붉어진다. 병원에 누워 계시던 어느 날 아버지는 모든 가족을 불러 모으시고 용돈을 주겠다며 당신이 지갑에 간직하고 있던 돈을 일일이 자식들의 손에 쥐어주셨다. 그 자리에서 아버지는 매형에게 가장 많은 돈을 주셨다. 그리고는 한 말씀 건네셨다.

“가족들의 화합에 힘쓰거라”

아버지는 사위에게 마지막 당부를 하며 당신의 가슴 속 사랑을 전하셨던 것이다.

여민이가 태어난 후로 아버지는 외손자를 보러 자주 누나의 집에 가셨고 귀여운 여민이를 보면서 은근히 나의 결혼을 채근하곤 하셨다. 당신의 친손주가 태어나기를 간절히 원하셨던 것이다.

 

몇 년 후 나는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되었고 결국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게 하기 위해 잠실 집으로 이끌었다. 언제나 며느리 될 사람을 학수고대하던 당신이었지만 정작 아내를 본 아버지는 냉담했다. 아버지는 며느릿감을 바라보면서도 좋다 싫다 아무런 말씀도 안 하셨다. 아내는 무척 당황했다. 아버지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없었던 아내로서는 시아버지 될 분이 무서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며느리 될 사람을 그런 식으로 꼼꼼히 뜯어보셨던 것이다. 그게 아버지의 방식이었다.

1988년 2월 나는 아내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후 우리는 일 년 동안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아내는 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만 곱게 자라온 사람이었다. 장인의 병환 때문에 직장생활도 못해본 아내였기에 낯선 시집살이로 무척이나 힘들어했다. 아버지는 심지어 첫 아이 임신으로 배가 불러오는 며느리를 불러 고추밭에서 일을 시키곤 하셨다. 자대배치 받은 신참 졸병 같던 신혼 시절 아내는 엄한 시아버지 밑에서 마음고생을 많이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하나뿐인 며느리를 특별히 아끼고 사랑하셨다. 가끔 여행을 다녀오면 며느리에게 줄 고급 핸드백을 챙겨 다른 사람 몰래 전해주기도 하셨다. 때로는 당신의 두 딸이 질투심을 느낄 정도로 며느리 사랑에는 아주 극진하셨다. 돌아가실 무렵에도 당신을 수발하던 며느리 손을 잡으며 “아가, 빨리 집에 가자.”고 마지막 말씀을 남기기도 하셨다.

“8일 후에······.” 라는 예언적인 말씀도 며느리에게 귀띔하시지 않았던가.

첫 손주 명섭이를 안겨드렸을 때 아버지는 기쁨의 표정을 감추지 못하셨다. 그렇게 맞았던 첫 손주가 장성해서 뭔가를 할 나이가 될 때까지 오래오래 사셨어야 했는데······. 나는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아프다.

준희는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미혼이었다. 부모를 잃은 자식의 슬픈 마음이야 모두 같겠지만 막내인 준희의 아픔은 누구보다 컸을 것이다. 그런 준희가 이제 짝을 찾아 5월에 결혼을 하게 된다. 하나 남은 막내딸 결혼을 못 보고 하늘로 가실 때 어머니 아버지도 가슴이 아프셨을 것이다. 이제는 두 분도 하늘에서 기뻐 웃으며 준희의 앞날을 축복해 주시리라고 믿는다.

 

 

불효의 통한

대학에 들어가고 내 생각들이 굳어지게 됨에 따라 아버지의 뜻을 따를 수 없는 일들이 하나둘 생겨났다.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 그저 순종만 해야 했던 나는 성인이 되면서부터 사소한 일들로 아버지와의 의견 충돌을 겪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아버지는 예전과 달리 당신의 생각을 한번 접고 물러나시는 것이었다. 이미 성장해 버린 아들에 대한 배려 때문인가? 아니면 농부로 살게 되신 아버지의 주름살이 깊어졌기 때문인가? 노년이 가까웠음을 인식하시고 당신 스스로 뒷걸음으로 물러나시려는 까닭인가? 대나무같이 곧기만 하던 아버지는 당신의 아들에게 많은 것들을 양보하고 계셨던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외출을 하면 사람들은 종종 아버지를 할아버지라고 부르곤 했다. 내게는 아직도 정정하신 분이신데, 할아버지라니······. 당신 뜻에 거슬리는 말이나 행동들을 결코 용납하지 않던 그 당당하고 거침없던 아버지가 이제는 달라지신 것이다. 할아버지라 불릴 만큼 아버지는 몸도 마음도 서서히 약해져 가고 계셨던 것이다. 늘어나는 당신의 흰머리만큼 점점 힘을 잃어 가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나는 인생의 덧없음을 느끼곤 했다.

결혼하자 아버지와 어머니는 잠실의 39평 아파트 건넌방에 신혼살림을 차려 주셨다. 아들이 결혼하면 분가시키기 위하여 미리 마련해 두었던 새 아파트도 있었지만, 가족애를 깊게 하기 위하여 일 년간 함께 살기로 했던 것이다.

증권회사에 다니던 나는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기 때문에 직장 동료들을 초대하기 부담스러웠지만, 집들이하라는 직원들 성화와 아버지의 배려 속에 손님들을 초대했다. 말단 직원이었던 나는 윗분들을 모시고 아버지의 방인 안방에서 손님상을 차렸다. 느지막이 농장에서 돌아오신 아버지가 아들의 직장상사와 합석하게 되면서 문제가 생겼다. 인사만 나누고 금방 비켜줄 줄 알았던 아버지는 오고가는 술잔 속에서 공직에 계셨을 때 우리 집을 가득 메웠던 아버지 동료와 후배들과의 자리가 떠올랐던지 오랜 시간 일어설 줄을 모르셨다.

나는 상사들의 불편해 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고, 그만 일어나 주셨으면 하는 의사를 밝혔지만 아버지는 눈치를 못 채시는 것 같았다. 몇 번인가 더 아버지께 당신의 안방을 양보해 주시길 강하게 요구했다. 마지못해 작은 방으로 자리를 옮기신 아버지는 무척 상심해 하셨다.

집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나는 서둘러 손님들을 보냈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화려하게 꽃 피웠던 당신의 자리를 뺏겼던 때의 설움만큼 이제는 아들에게서조차 당신의 자리를 빼앗기게 된 것이 서러우셨던가? “이제는 죽어야지······ 죽어야지······.” 아버지는 작은 방에 누워 탄식을 하고 계셨다.

“아버지 정말 잘못했습니다. 어찌 용서를 빌어야 합니까?”

술상을 들이고 후회의 눈물을 섞어서 아버지 앞에 한 잔의 술을 올렸지만, 당신의 탄식은 멈출 줄 몰랐다. 나는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빌고 또 빌었다. 지금도 그때의 불효를 떠올리면 나는 가슴이 메어진다.

 

 

직장을 정리하며

1993년 가을, 농장의 일부를 팔기로 하고 계약을 체결하였다. 하지만 건설회사의 사정으로 계약이행은 그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자칫하면 무산될 위험도 있었다. 부의 축적을 위해 발걸음을 바삐 내딛으며 사셨던 분은 아니지만, 일이 잘못될 경우에는 당신 삶의 발자취의 큰 부분을 허공에 날려야 할 우려도 있었다.

나는 직장을 8년 넘게 다니고 있었지만, 내 직장은 건설회사와의 문제를 비롯해 부친의 자산을 관리하기 위하여 나의 시간을 쪼개기에는 적절치 않은 곳이었다. 나 또한 가정보다는 직장에 일과의 대부분을 쏟으며 생활했기 때문에, 외아들이었던 나는 휴일에나 간신히 부모님을 찾아뵙는 정도였다. 부모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들이 얼마나 남아 있다고, 몇 년쯤 뒤에는 결국 그만두어야 할 직장인데, 거기에 연연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지만 직장문제는 결코 쉽게 정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께 직장을 그만두겠다고 어렵게 말씀드렸는데,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는 허락하시지 않으셨다. 당신이 직장동료들을 떠나 홀로 삶의 발자국을 내딛었던 아픔 때문이었기도 하고, 돈이 있다고 허례허식하며 사업을 벌이는 자식의 모습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매서운 사회의 바람결 속에 당신의 아들을 내어두기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안전한 곳에 머물기를 바라셨기 때문이기도 했다.

“비굴하지 않고 소신껏 직장생활 해라. 하지만 그 직장이 네 인생의 전부이자 마지막인 것으로 알고 최선을 다해라.”

직장에 첫 출근할 때 당신이 하신 말씀이었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나는 그해 12월 사직원을 냈다. 하지만 회사에서도 내 사직원을 반려하고 더 근무해 달라고 청했다. 나는 후임자에게 인수인계할 때까지 퇴사를 미루기로 했다. 하지만 아버지께는 회사를 그만 두었다고 말씀 드렸다. 아버지는 크게 화를 내셨고 또한 낙담하셨다. 식음을 전폐하면서까지 인정하려 들지 않으셨기에, 회사의 요청으로 사직의 날을 연장하고 있던 나는 아버지께 나의 뜻을 번복한 것으로 말씀드려 간신히 당신의 마음을 누그려 뜨릴 수 있었다.

그러나 아들의 진심을 아셨던 것일까? 얼마간의 거짓 직장생활을 하고 있던 중에 안정된 사업을 바탕으로 한 퇴사 이후의 계획을 말씀드리고 사직의 허락을 다시 구했다. 결국 끈질긴 나의 설득에 아버지는 그제야 허락을 내리셨다. 모진 세파에 대한 염려의 말씀과 함께······.

그 뒤 아버지는 당신이 피땀 흘려 이룩하신 모든 것을 아들에게 맡기고 세상의 일들을 훌훌 털어버리고 빈 몸으로 사시다가 빈 몸으로 돌아 가셨다. 말년에 자식에게 건네 준 가장 큰 선물은 자식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 믿음은 아버지가 떠나가셨어도 영원히 내게 드리워져 있다. 나는 결코 그 신뢰를 떨굴 수 없을 것이다. 내게 주신 그 믿음대로 나는 한발 한발 나의 삶을 펼쳐 나아갈 것이다.

 

 

 

 

 

 

당신의 뒷모습

 

 

지상에서의 마지막 날들

우리 가족에게는 한 가지 연례행사가 있었는데 겨울철이면 김장을 하기 위해 온 식구들이 광주 농장에 모이는 것이었다. 그런 날은 모든 자식과 손주들이 모여 잔칫집이 되었고, 아버지는 그렇게 온 식구가 모이는 것을 매우 좋아하셨다. 온 집안 식구들이 모여 김장을 담근 후 제각기 집으로 돌아갈 때면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각자 몫을 챙겨주셨고, 당신 손으로 자식의 먹거리를 줄 수 있음을 기뻐하셨다. 그리고는 언제나 아쉬운 마음으로 현관까지 나와 배웅하시던 두 분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자고 가지 그러니······.?

“아니에요. 내일 일찍 출근해야 돼요.?

아쉬움이 가득한 아버지와 언제나 애틋하게 자식들을 바라보던 어머니는 현관 밖에 나와 자식들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오래오래 서 계셨다.

아버지는 마지막 입원을 위해 떠나기 전날까지도 농장에서 보내셨다. 예전처럼 큰일들은 하지 못하셨지만, 언제나 이른 아침에 일어나 손수 해야 할 일들로 분주하셨다.

1999년 난생 처음으로 가족 해외여행을 다녀와서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어머니가 갑자기 쓰러지셨고 우리 집에는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아무런 예고도, 준비도 없었던 돌연한 어머니의 임종 앞에서 가족들은 모두 깊은 슬픔에 잠겼다. 특히 아버지의 슬픔은 가족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당신이 공직을 그만 뒀던 그때처럼 의욕을 상실한 채 멍하니 혼자 안방을 지키곤 했다. 밥도 일체 입에 대지 않으셨고 그 누구도 만나지 않으셨다. 그때 아버지가 한 일은 유일하게 불경 테이프를 틀어 놓는 일이었다. 아마 돌아가신 어머니의 영혼이 좋은 곳에 가기를 간절히 기도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종종 소파에 쓰러져 주무시다가 새벽에 일어나 혼자 안방 문을 열어보기도 하셨다. 혹시 어머니가 다시 살아오셔서 누워있지 않을까 생각하셨던 것일까. 그런 아버지의 모습은 우리 모든 가족들을 안타깝게 했다.

그해 늦가을, 어머니와의 이별의 아픔도 조금 잊혀질 무렵 아버지는 나와 같이 일본여행을 다녀오셨다.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 여행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일본에서 사 갖고 온 그 휠체어는 서울에서 단 한 번도 타보지 못하셨다.

언젠가 아버지는 나에게 유언처럼 말씀하셨다.

“상구야, 이 아버진 깨끗하게 살았다. 비록 남들에게 노랭이 소린 들었다만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살아왔단다. 그러나 너희들은 나처럼 살지 말아라. 너희들 하고 싶은 것 하고, 쓰고 싶은 것 쓰면서, 싸우지 말고 서로 사랑하며 살거라.”

지상에서의 마지막 나날들을 아버지는 그런 생각을 하며 보내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얼어붙은 땅과 하늘처럼 나의 마음은 슬픔으로 꽝꽝 얼어붙었다. 나는 방 한켠에 접힌 채 비스듬히 세워져 있는 휠체어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장지뿐만 아니라 49제까지도 아버지의 젊은 시절 함께 했던 분들이 많이 오셨다. 그분들은 붉게 상기된 얼굴로 진심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안타까워했고 명복을 빌어주셨다.

 

 

팔당 아버지의 산소 자리

1979년 위 수술을 받으신 후, 아버지는 사후의 유택 자리에 대해서 종종 말씀하셨다. 천현골 선산이 있지만, 이제는 장소가 협소하고 또한 형님의 신세를 지기 싫어서인지 공동묘지를 알아보곤 하셨다.

그러다가 선산을 지켜오신 큰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할아버지에게서 받은 전답, 임야 등이 남의 손에 넘어갈 위기에 처하자 아버지는 당신의 형편도 넉넉하지 못한 상태에서 여기저기 많은 돈을 빌려 큰아버지의 빚을 갚아주셨다. 이에 큰아버지는 그 보답으로 예봉산 중턱, 광주에 첫발을 내딛으셨던 나의 8대조 할아버지 산소 바로 아랫자리로 이끌어주셨다. 강 건너 검단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그 옆으로는 하남 평야와 멀리 잠실벌도 보이는 전망 좋은 자리다.

산지기 아저씨의 안내로 큰아버지와 그곳에 오른 아버지는 그 자리에 마음을 정하고 일 년에 두어 차례 찾아가 터 가꾸기를 하셨다. 그 산에 처음 오르던 날, 그 산소 터 바로 아래 옹달샘 쉼터에 가느다란 산뽕나무가 풀을 헤집고 삐져나와 있는 것을 발견하셨다. 산지기 아저씨는 지게 자루를 만들어야겠다며 그 뽕나무를 베려 했다. 그것을 보신 아버지는 잃었던 오랜 벗을 만난 듯 그 뽕나무를 반기었고, 해마다 정성을 쏟아 그 나무를 키우셨다. 이 인연의 뽕나무는 이제는 아름드리 나무가 되어 당신의 삶을 각인시켜 주고 있다.

가묘를 만들기 위해 터를 파던 때의 일이다. 몇 삽 파고 내려간 그곳은 더 이상 삽으로는 도저히 파지지 않았고 곡갱이로 찍으면 흙이 갈라지는 곳이었다. 몇 명의 동네 분들이 힘들여 파보았는데, 석자 깊이도 이르지 못하여 몹쓸 땅이라고 해서 그 자리를 포기하려고 했다. 그 때 지관이 올라와 보곤 한 자만 더 파보란다. 마지막으로 곡갱이질과 삽질 후에 흩어진 흙을 걷어내자 하얀 흙이 모습을 나타냈다. 손으로 걷어내도 될 정도의 곱디고운 흙이었다. 일하던 인부들의 탄성과 함께 그 가묘는 제 자리를 잡고 다시 흙으로 덮여졌고,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주인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 자리는 차가 세워진 곳에서 30분을 넘게 올라야 하는 곳에 있다. 해마다 정성을 들여 길을 넓히고 진달래를 심고 나무를 베어냈어도 오르실 적마다 걱정을 하셨다.

“훗날 상구 네가 큰 고생하겠구나. 관짝 하나 올리기도 힘들 테니 상여는 쓸 생각 말고 가장 가벼운 관 하나 써서 올리려무나.”

봄과 가을이 되어 동네 분들과 산에 오른 아버지는 그 뽕나무 아래에서 흥겨운 술잔치를 벌이곤 하셨다. 반나절 일을 마치고 나면 동네 연세 드신 분들의 잔에 소주를 따라주며 호탕한 웃음소리와 농담을 섞으며 흥겨워하곤 하셨다. 당신의 무덤을 가꾸면서도 무엇이 그리 흥겨우셨던 것일까?

그리 자주 찾던 예봉산 중턱이었건만 어머니의 꽃상여가 올라 갈 때는 차마 오르시지 못하고 동네 어귀에서 막걸리 한잔에 당신의 슬픔을 담아야 하셨지만, 결국 당신도 꽃상여를 타고 마지막 오름길을 내디디셔야 했다.

 

 

몇 개의 단상들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고 난 그해 가을 어느 날, 아버지는 팔당 그 자리에 인부와 포크레인을 불러 작업을 할 일이 있다고 하셨다. 제법 큰일이었지만 여느 때처럼 배낭에 음식을 담아 그 산을 오르려는 나를 말리시고 아버지는 홀로 산을 향하셨다. 얼마 뒤 안 일이었지만, 부모님의 유택 인접한 곳에 또 다른 산소자리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들을 위한 훗날의 집터를 직접 장만해 주신 것이다. 당신이 이승을 떠나기 불과 몇 달 전이었다. 생명을 주고 삶의 틀을 만들어주고 생활의 터전도 펼쳐주셨건만, 아버지는 떠나면서도 아들의 먼 훗날의 자리까지 마련해주셨던 것이다. 어느 날이 될지 모르지만 나 역시 당신 뒤를 따라가게 되는 날, 한 줌 재 되어 정성껏 마련해 주신 그 자리로 꼭 가리라.

 

농장 거실 유리창 바로 앞에 목련이 한 그루 있다. 아버지 잠자리였던 침대 쪽 유리창을 향해 있던 목련의 큰 가지에 피어난 꽃 봉우리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새 봄이 왔어도 꽃을 피우지 못한 채 그만 떨어지고 말았다. 반대편으로 뻗은 큰 줄기가지에서는 꽃을 활짝 피웠건만······. 그 목련도 아버지의 돌아가심을 슬퍼해서 꽃을 피우지 못했던 걸까. 올 겨울에도 그 목련 가지에는 꽃망울이 가득 맺혀 있는데, 과연 봄이 오면 꽃을 피울지······.

 

휴일이면 항상 아이들과 함께 농장으로 향했다. 결혼 후 일 년 뒤 분가하고 부모님이 잠실에서 광주 농장으로 집을 옮기신 뒤로는 공휴일이면 그 농장이 아이들의 놀이동산이 되곤 했다. 놀이기구를 타는 대신 할아버지가 사 주신 작은 모종삽을 들고 흙과 더불어 노는 아들······. 꽃을 따다가 반찬 만드는 딸······. 하루 종일 함께 아버지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기자기한 이야기꽃을 피우지는 못했다.

함께 점심을 들고 어둠이 찾아 올 무렵이면, 손수 다듬어 놓으신 상추, 파 등을 건네며 서둘러 서울 집으로 돌아가라 채근하셨다. 어두워지면 위험하니, 속도를 줄여 천천히 운전하라시며······. 어머니는 현관 밖에 나오셔서 아들 손자가 탄 차가 골목으로 돌아 갈 때까지 오래도록 서 계셨다.

그렇게 아버지 집에서 휴일을 보내고 어두워질 무렵 서울로 향할 때는 그저 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젊은 시절부터 일로 혹사시켰던 육신의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편치 못한 잠자리에 들게 될 어머니가 떠올랐고 다리의 관절염 때문에 술 몇 잔에 잠을 청하고도 새벽에 잠을 깨어 이 서랍 저 서랍을 뒤적이며 무료함을 달래실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나는 한 번도 편안한 잠을 자지 못했다.

 

1996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는 큰 승용차를 사셨다. 몇 달 지나지 않아서 휘발유가 많이 든다며 소형차를 하나 더 구입하셨다. 손님을 모셔야 할 때가 아니면 언제나 큰 차는 차고에 넣어두고 소형차만을 타고 다니셨다. 장거리 여행을 하실 때는 승차감이 좋은 큰 차를 타고 다니시라고 말씀드렸지만, 당신께는 작은 차가 어울린다면서 작은 차 타시기만을 고집하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는 그 큰 차를 차고에 세워놓는 것 마저 낭비라시며 그것보다 작은 차로 바꿀 생각도 하셨다.

오직 일밖에 모르며 사셨던 아버지가 너희들 세대는 예전과 다르니 골프도 치고 삶을 즐기며 살라고 말씀하기도 하셨지만, 당신의 마음 깊은 곳에는 당신의 자식들이 늘 근검절약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어쩌면 지금도 그런 마음으로 지내실지 모른다. 아스라한 저 하늘에서도······.

 

농장 집의 현관 앞에는 돌로 조각된 학이 하나 있다. 그 학 앞에는 작은 돌기둥이 7개 놓여 있는데, 어느 날 그 작은 돌기둥을 바라보시던 아버지가 무심코 말씀하셨다. 7개의 돌기둥은 당신 인생의 70년을 의미한다고.

“이제 몇 년 만 지나면 하나 더 세워놓아야겠구나······.”

순진한 아이처럼 가볍게 웃음을 지으시며 나를 바라보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그리워진다. 청아한 학처럼 살아오셨던 나의 아버지. 그 학 조각은 아버지가 오르내리시던 그 현관 앞에 변함없이 서 있다. 일곱 개의 기둥을 안은 채······.

 

 

 

 

 

 

 

에필로그

 

 

검단산에 올라

“우리 한 달에 두 번은 꼭 모이자.”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마저 떠나보낸 뒤 우리 삼남매는 각자의 삶 속으로 흩어지지 않고 서로 격려하며 하나가 되기 위해서 그렇게 약속했다.

아버지의 1주기도 지나고 유난히 추웠던 겨울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고 해서, 우리는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을 새겨보기 위해 검단산을 오르기로 했다. 아버지의 어린 시절을 지켜보았을 검단산, 먹구름으로 가득한 아버지의 고향 하늘은 눈발이 흩날리고 있다. 이 눈발이 몇 번 더 내리고 나면 곧 삼월이 되고 새로운 생명으로 만물이 움트기 시작하겠지. 나는 아이들과 함께 산을 오르며 곧 다가올 봄을 생각한다.

 

검단산 산행은 처음이었기에, 우리는 가늘게 쌓여가는 눈길을 조심스레 오른다. 아버지 어린 시절 올랐음직한 그 길을 따라 나는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이미 알 수 없는 저 건너 세상으로 가버리셨지만, 당신의 발자취는 검단산 곳곳에 깊이 아로새겨져 있다. 나는 그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발자국 위에 내 발자국을 포개며 산을 오른다.

잠시 멈춰 서서 저만치 뒤쳐져 오는 아이들을 내려다본다. 내 아이들과 조카들이 헉헉거리며 내 발자국을 따라 오르고 있다. 힘겹게 한 발 한 발 내딛고 있지만, 이미 앞서 가고 있는 나는 발길을 되돌려 그들의 손을 이끌어 줄 수가 없다. 무사히 올라올 수 있도록 격려하고 마음속으로 기원할 수밖에······. 아이들에게 힘을 내라며 외치고는 손을 한번 흔들어 주자 힘겹게 올라오며 울상을 짓던 아이들도 잠시 서서 미소를 지으며 나를 향해 손을 흔든다.

‘얘들아, 할아버지가 그랬듯이 내가 그랬듯이 너희들도 그렇게 이 비탈진 산을 올라야 한단다. 열심히 오르는 법을 스스로 깨달아야 허눈 거야. 인생이란 그런 것이란다.’

 

나는 다시 부지런히 발걸음을 대디뎌 검단산 중턱에 다다른다. 크게 숨을 들이키며 산을 둘러본다. 강 건너 예봉산이 보이고 부모님이 나란히 모셔진 그 곳도 하얀 눈으로 덮여있다. 한눈에 바라다 보이는 그 곳. 몇 걸음 발을 내디디면 닿을 것 같은 곳에 계시지만 당신들 곁으로 다가서기에는 너무나도 멀고 먼 곳이다.

어느새 눈은 그치고 햇살이 비친다. 흰 눈에 덮여있는 예봉산과 검단산 사이 하늘에는 하얀 구름이 흘러가고 있다. 나는 송글송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눈을 감는다. 아련하게나마 봄기운을 안고 불어오는 바람결에 이별의 아픔을 담은 브람스의 선율이 묻어온다. 두 산을 가로질러 흘러내리는 강물을 따라 흐르는 ‘브람스의 현악 6중주 안단테, 마모데라토’가 꿈결처럼 흐른다.

 

아이들은 내가 서 있는 산 중턱까지 올라오고 있다. 이마의 땀을 닦아내고 서로 손을 잡아주며 열심히 오르는 아이들······. 대견하다. 이제 겨울눈으로 덮인 이 산에도 봄 햇살이 따스하게 비추겠지. 열심히 산길을 오르는 아이들의 가슴에도 넉넉하게 봄빛이 스미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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