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즘 140

고별

화로의 문이 닫힐 때 친구를 마지막 배웅했습니다. “친구여~ 잘 가게!” 그 이상 할 말이 없었습니다. 이른 아침마다 내게 전화를 걸어와 일상의 잡담을 늘어놓으며 시시(히히)덕거렸죠. 그 친구가 40대 중반쯤인가 상처를 하고 재혼도 하지 않은 채 아들 딸 시집 장가보내고 60대 장년의 여유로운 삶을 즐기려 할 때! 근육이 기능을 상실하는 희귀병에 걸려 절뚝거리며 걷게 된 지 2년이 지나자 아들의 간청으로 기도 절개 수술을 받았죠. 그리고 눈만 껌뻑이며 정신은 말똥말똥한 채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병상에 누워 있다가 삼 년의 시간이 흘러 눈마저 감아 버렸습니다. 만물 생명 존재 시간 - 왜 만들어졌나요? 애초에 없었다면 탄생과 죽음의 고통이 없으련만. 아무 것도 없는, 없는 것도 없는 그곳이 그립습니..

프리즘 2022.09.16

꽃무릇

파란 가을하늘 아래 꽃을 마주하기 위해, 여린 이파리는 겨우내 굳게 얼어붙은 땅을 헤집고 나왔지요. 하지만 어느 날 피어난 꽃은 흙 묻은 이파리가 싫다며 꽃대를 불쑥 내뻗고 그 위에 자리하고서는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내년에는 나를 바라봐 주겠지 하며 기다렸지만, 한 해 두 해 흘러가도 끝내 꽃은 이파리에 눈길조차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상처받기 싫은 이파리는 꽃잎을 그리워하며 여름이 오는 어느 날 땅속에 숨어버리고 말았어요. 뜨거운 햇살과 굵은 빗줄기가 내린 후 가을하늘이 보고파 꽃대를 쭉 뻗고 그 위에 사뿐히 앉은 꽃은 바람결에 속삭여주던 이파리가 더 이상 아래에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하루 이틀 기다렸지만, 흙 묻은 이파리는 끝내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이파리와 꽃은 영원히 마주..

프리즘 2021.09.12

돌아간다는 것

얼마 전 지인의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라는 소식을 받게 되었지요. 어디로 돌아가는 것일까? 어느 남과 여가 하나가 되었을 때 존재가 생겼기에 결국 여와 남이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음양이 결합하기 전에는 무엇이 있었던가? 공간도 시간도, 영혼도 분자도 없는 그런~ 느낌 생각 번민 행복도 없는 그런 곳! 有와 無조차 논할 수 없는 곳! 그저 얽혔던 인연에 흔적만 남기고 존재의 세계에 흔적만 남기고 떠나가는 것! 2021년 7월 9일

프리즘 2021.07.30

소풍 떠나는 날을 기다리며

너무도 매정하게 퍼 부었던 장마가 잠시 멈췄다가 지금은 굵은 장대비로 그 뒤끝을 보여주고 있어요. 오늘 빗님은 마음을 씻어주고 흙 내음 안겨줘 좋네요. 거실에서는 새로 다운 받은 선율이 흐르고 있고, 책상 위에는 비어가는 두 번 째 소주병이 놓여있고, 꽁초로 가득 찬 재떨이에서는 여전히 연기 피어나고! 오늘도 감옥으로 출근했어요. 화생방실이기도 하죠. 봄날의 꽃빛깔은 사라지고 시원한 바람은 멈추고 존재하지 않는 철창이 나를 가두고 있어요. 즐거움이 없네요. 마치 구름이 해님을 가리듯이, 오랫동안 그늘에 머물러 더 이상 햇살을 못 보네요. 나이 탓인가? 우울증인가? 그저 사라지고픈 마음! 그래도 내가 뿌린 씨앗들의 쫓기지 않는 삶을 마련하려고 이제 몇 년 동안 나를 무척 괴롭힐 일을 시작해야 하기에 지금 ..

프리즘 2021.07.30

직박구리 아기새

이십 년 전부터 나는 이곳 하늘아래정원에 매일 발길을 내딛고 있지요. 한때는 직박구리 새들의 놀이터였는데 못된 물까치 떼의 횡포에 떠나가 버렸어요. 그런데 얼마 전부터 몇 마리 모여 들더니 작은 연못가의 나뭇가지에 자리를 잡더군요. 물까치들과는 적이 되어 둥지를 무너뜨렸지만 직박구리의 노래는 가까이하고 싶더군요. 엊그제 낮은 철쭉 잎 사이에 숨어 있는 아기 새를 바라보게 되었어요. 누구 아기일까? 2020년 6월 5일

프리즘 2021.07.30

물까치 새집

오늘은 하늘을 우러러 바라봤습니다. 한 점 그 이상의 부끄러움을 확인하기 위함이 아니었죠. 긴 장대를 들고 새집을 찾았던 거예요. 몇 년 전부터 이곳에 터전을 마련한 물까치 새떼들을 쫓아내기 위한 몸부림이죠. 작년과 달리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아직 둥지에 아기 새도 하얀 알도 없었어요. 슬퍼하는 새들에게 덜 미안했지요. 하지만 어쩔 수 없군요. 나는 새총을 쏘고 장대를 들며 또다시 그들과 계속 맞설 수밖에 없어요. 작년 그리고 그 이전에도 물까치들은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내려는 듯 내 터전에서 날카로운 부리로 나를 엄청 공격해댔죠. 그래도 애써 만든 둥지를 헐어버린 미안함 때문에 아마도 오늘밤 꿈속에서 무척 괴로울 것 같네요. 예쁘게 함께 어우러져 지내면 좋으련만! 2020년 4월 29일 “잔디밭에 ..

프리즘 2021.07.30

라일락

어릴 적 미아리 집 내 방 창가에는 큰 라일락 나무가 있었죠. 사월이면 내 가슴에 짙게 스며드는 그 향기에, 사춘기 소년의 마음은 무척 설레었죠. 하지만 그토록 좋아했던 라일락 나무 가지를 오늘은 큰 톱으로 기다란 가지 하나를 잘랐어요. 그 옆에 심었던 살구나무로 뻗어 나온 그 가지 때문에 그쪽으로는 살구꽃을 피우지 못했죠. 아파하는 그 가지를 구석진 곳으로 내몰다가 채 펼치지 못한 꽃망울을 보고서는 너무 미안했어요. 짧게 꺾어다가 이렇게 모아놨어요. 하지만 어린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던 그 향기를 미운 나에게 더 이상은 건네주지 않을 것 같네요. 2020년 4월 1일

프리즘 2021.07.30

변신

주인공 그레고르는 잠자는 어느 날 아침 한 마리 벌레의 모습으로 변신하게 되며,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채 고독한 죽음을 맞는다. "주인공 그레고르는 잠에서 깨어난 어느 날 아침 한 마리 벌레의 모습으로 변신하게 된 자신을 느끼며,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채 고독한 죽음을 맞는다." 카프카의 변신. 중학교 때 감명 깊게 읽었죠. 나의 친한 친구가 변신하고 있군요. 이제는 카톡에 답도 못 보내고 통화도 힘들어서 그 아들이 대신 전화를 했네요. 월요일에 얼굴 보러 가도 되냐고 연락했더니 그의 아들이 전하더군요. "보고 싶으니 와 달라!" 2019년 8월 2일

프리즘 2021.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