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천 원 짜리 도시락 두 개를 싸들고, 나의 애마 엑센트에
배불뚜기 아내와 함께 예술의 전당으로 향했습니다. 가던 중
클래식 방송에서 런던 필의 수석지휘자 쿠르트 마주어가 전 날
공연 후 건강에 이상이 생겨 유리 테미르카노프로 교체되어
장영주와의 협연이 진행되리라는 소식을 들으며, 씁씁한 마음
금할 길 없었지요.
뭐..... 내가 지휘자의 역량에 따른 정교한 선율의 차이를
알 수 있겠습니까마는 표 한 장에 10만원 가까운(그것도 R,
S 석도 아닌 A석 값이지만) 거금을 들여 두 달만에 그곳으로
향하는 것이고, ‘쿠르트 마주어 & 장영주 협연’이란 광고에
현혹되어 두 달 전에 예매했던 것이라 억울했죠. 그리고
작년의 그 분함도 생각났고요.
거의 매일 술 속에 빠져 지내는 나였지만, 때때로 고상한
내 모습을 그려보고 싶은 마음에 연주회 오페라 등을 찾아
헤매다가, 지난 해 한국 연주 사상 최고가로 발매되었던 런던
필의 공연을 잠시 정신이 나가 불쑥 표 두장을 예매해 버렸죠.
하지만, 공연 당일 굉장한 귀족이 되어 버린 듯 폼 잡고
연주회장을 들어서니 역시 객석은 관객들로 가득 메워져
있었고 단원들이 하나 둘 들어서자 우레와 같은 박수로
그곳은 터져 나갈 듯 하였죠.
하지만 선율에 맞춰 머리조차 끄덕거려서는 안될 공연장의
분위기는 왠지 어수선했고, 여기저기서 졸고 있는 사람, 옆
사람과 속삭이는 사람 등 수준 이하의 관객들의 모습이 모였
습니다. 그 때문인가? 깊은 감동을 가슴에 안겨 주리라
믿었던 런던 필의 연주는 나사가 빠져 삐거덕거리는 기계의
파열음과도 같았습니다. (물론 내 능력으로는 논리적 판단과
비평을 할 수는 없지만)
1악장이 끝난 뒤 객석에서는 나와서는 안 될 뜨거운 박수가
터져 나왔고, 2악장이 시작되어서도 어수선한 분위기는 가라
앉지 않은 채 선율은 이어졌고, 3악장을 끝으로 하나의 곡이
끝나자 우르르 관객들은 밖으로 향했습니다.
왠지 억울한 느낌으로 담배에 불을 붙이자니, 점잖은 양복
차림의 중후한 중년 남자분이 내게 담배를 하나 청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 - 자기는 음악 교수라 초대권을 받고 왔는데,
당신도 초대권으로 왔냐는 질문. 마치 표를 사 갖고 온 사람은
능력없는 사람인 양 비양거리는 모습이었습니다.
전체 객석의 20%만이 유료입장이었고, 나머지 80%는 초대권
으로 채워진 공연이었습니다. 너무도 비싼 입장료 때문에
텅빈 객석을 유명 오케스트라에게 보여 줄 수 없어 급히
초대권을 남발하였던 것입니다.
“차라리 와이프에게 옷 한번 사 줄 걸......‘ 하며 후회를 깊이
씹으며 다시는 런던 필의 공연을 오지 않으리라 작심했지만,
지난 여름 장한나, 런던필과 장영주, 그리고 조수미 3개 공연
할인 판매에 현혹되어 또다시 지난 여름에 예매를 했던 것
입니다. 그렇게 찾았던 런던필의 연주인데, 또 다시 수석지휘자가
빠진 공연을 찾게 되었으니...... 정말 악연인 모양입니다.
3개의 곡으로 예정되었던 어제의 연주는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라장조 OP35와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4번 바단조 OP 36
두 곡으로 변경 되었습니다. 첫째곡은 장영주와의 협연곡으로
예정에 있던 곡이었습니다. 어떤 곡일까 설레는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니, 1악장은 귀에 익은 곡이었습니다. ‘아~ 이 곡이었구나’
생각하며 감었던 눈을 떠 보니, 선율에 맞춰 고개를 까닥거리는
와이프의 모습이 곁눈으로 보였습니다. 손으로 툭치며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고 장한나와는 다른 느낌의 20살 장영주의 모습
보니 그 명성에 걸맞는 자신감에 풍만한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내 실력으로는 연주력을 평가할 수는 없을지라도 흩트러짐이
없는 연주실력은 역시 그 평판에 걸맞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8월의 장한나의 연주회에서 느꼈던 깊은 영혼의
표현 그리고 연주를 더해가면서 절정에 다다르는 한 인간의
진실된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특히 결코 경쾌하게 연주
해서는 안 될 부분이라 생각되는 곳에서, 장영주는 지휘자에게
미소로써 무언의 이야기를 전하기도 하고 또한 객석을 향해
미소를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차라리 눈을 감고 청취했다면
몰랐겠지만, 연주장에서는 연주자와 선율이 하나가 되는 모습을
바라보는 즐거움이 있는 것인데 그녀의 표정과 곡의 흐름은
종종 상반되게 전해지고 말았습니다. 마치 마지못해 런던필
공연에 들러리 서 준 것과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두 째 곡은 익숙치 않은 곡이었습니다. 끊임없이 이어진
박수에 앙코르 한 곡을 던져주고 장영주는 무대 뒤로 향했고,
급히 마련한 곡이었기에 작품 해설도 없이 둘째 곡을 감상해야
했습니다.
나만의 상상 속에서 가슴에 밀려 오는 곡을 그려 봤습니다.
1악장은 폭풍처럼 밀려오는 번뇌와 방황을 그리고 있었고,
2악장은 안식을 찾으려 노력하지만 또다시 터져 버릴 듯한
삶의 고뇌에 잠재울 수 없는 열정이 휘몰아 오는 것을 받아
들여야만 하는 듯 했습니다. 마치 1악장과 2악장은 나의
가슴 속을 그려내고 있는 듯 했습니다.
3악장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방황과 번뇌를 끝내며 떨구어야 할 헛된 욕망을 걷우어
내고 비로서 텅 빈 내면의 세계에 새로운 영혼을 탄생
시키는 출발의 악장이었습니다.
4악장은 영웅의 출현이었습니다. 자신을 가다듬고
세상을 향해 진리를 펼치며 밝은 미래를 창조해 가는
영웅의 모습과 그의 출현을 축복하고 반기는 세상 사람들의
합창의 악장이었습니다. 진정한 삶의 열정이었습니다.
가고 싶은 나의 모습이었지만, 결코 다다를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세계가 3악장과 4악장에서 연주되었습니다.
뜨거운 박수였습니다. 기립하여 환호를 보내는 관객들도
있었습니다. 쿠르트 마주어가 지휘했다면 몇 곡의 앙코르
곡도 선사 받았을테지만, 하룻만에 섭외되었던 객원 지휘자
였기에 단원들을 이끌고 무대 뒤로 향해 버렸습니다.
담배 한 대 피기 위해 아내와 함께 잠시 노오란 가로등
아래 벤취에 앉았습니다. 가로등 불빛에 곱게 모습 드러낸
단풍잎이 예쁘다며 하나를 따 달라 했습니다. 팔을 뻗어
한 잎 나뭇가지에서 떼어 내려다가, 손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함께 있을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을텐데...... 바람결에
이별을 맞이해야 할 그 때까지 그 잎을 나뭇가지에 머물게
하고 싶었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 하나 들어 아내에게
건네어 주었습니다.
장영주의 씨디를 들으며 집으로 향해 운전하는 나의 입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습니다. 알 수 없는 슬픔과 고독이
또다시 밀려 오고 있었습니다. 또 다시 1악장이 시작된
모양입니다. 나의 마음 속에서......
그녀가
가로등 불빛에
곱게 모습 드러낸 단풍잎이 예쁘다며
하나를 따 달라 했습니다.
팔을 뻗어 한 잎 나뭇가지에서 떼어 내려다가,
손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함께 있을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을 텐데......
바람결에 이별을 맞이해야 할 그 날까지
그 잎을 나뭇가지에 머물게 하고 싶었습니다.
결국
난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 하나 들어
그녀에게 건네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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