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지바고 그리고 해바라기 영화에서의 순백의 설원과 광활한 평원을 보고 싶었다. 지난 1월까지 이르크츠크까지의 직항편이 있었지만, 이제는 북경을 거쳐 가야 하는 고단한 출발이었다.
60만 인구의 국제공항은 남루하고 입국수속은 지루하기만 했다. 몇 명되지 않는 교민의 식당에서 옷을 겹겹이 껴입고 촬영지 다리 위에 카메라 삼각대를 세우고 작은 섬 오두막집에 짙은 안개 사이로 일출 햇살이 비추기만을 기다렸다. 사진에서 보았던 환상적인 장면을 나도 담길 바라는 마음에 영하 30도의 가까운 추위도 잠시 스쳐지나가는 듯했지만, 이내 마스크는 콧물로 뒤범벅이 되고 살을 에는 바람에 눈에서 흐른 눈물은 뺨 위에 작은 얼음조각들을 만들어냈다.
알흔 섬으로 향하다가 잠시 멈춰 섰던 앙가라강 다리 아래의 풍경! 물방울 얼음들이 나뭇가지마다 쌓여 만들어낸 상고대가 아니었다. 방금 백설의 축복이 대지와 나무들을 온통 덮고서 하얀 도화지 위에 하얀 점들을 찍어 놓은 듯 했다.
미니버스 속에서 6시간 동안 봄날의 닭처럼 졸다보니 드디어 바이칼 호수에 도착했다. 얼음에 갇힌 배는 출입통제소처럼 호숫가에 서 있고 땅과 호수의 얼음이 만나는 곳에는 차로 폭 만큼 떨어져 박혀 있는 말뚝 두 개가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하늘과 맞닿은 ‘빙평선’을 향해 내달리니 호수 위에는 속도제한 표기 그리고 미끄럼 주의 표지가 서 있고, 저 멀리까지 왕복 차로를 안내해 주는 말뚝 네 개가 나란히 이어져 간다. 얼음이 깨져버리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봄 햇살에 얼음 녹듯 소리 없이 밀려오지만, 되돌아가자고 할 수도 없고 내려 달라도 할 수 없으니 그저 지그시 눈을 감아 버릴 수밖에 없었다.
청정지역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에 있는 알흔 섬에서 처음 마주한 별빛은 아프리카 세렝게티 초원 그리고 몽골의 초원에서 내 영혼에 쏟아졌던 그 별빛과는 달랐다. 시베리아 혹한에 얼어붙었나? 매서운 바람결에 저절로 감겨지는 눈꺼풀 때문에 밤하늘의 별들을 모두 담을 수 없기 때문일까?
아침 7시가 되어도 동터올 조짐도 없다. 거리상으로 북경은 1시간, 여기는 2시간 한국보다 늦어야 하지만, 동서로 길게 뻗어있는 러시아의 정책 탓에 한국과 시간이 같기 때문이었다. 몇 겹 껴입었던 것들을 모두 벗어 던지고 속옷만 걸친 채 있어도 더울 만큼 마음씨 좋은 통나무집 주인아저씨 배려 때문에 편한 잠을 취했지만, 순간온수보일러가 고장 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아무리 오래 틀어도 차디찬 물 밖에 나오지 않기에 고양이 세수로 하루 일과를 시작해야 했다.
러시아의 승합차인 푸르공을 타고 바이칼 호수 위를 달린다.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일출의 순간을 놓쳐 버리고, 처음 접하는 풍경들이 내 눈과 렌즈에 담겨져 온다. 대륙과 대륙이 충돌해 에베레스트 산이 만들어졌듯이 얼음과 얼음이 힘겨루기 끝에 부딪쳐 이런저런 모양의 얼음덩이들이 솟구쳐있다. 하얀 눈으로 덮인 산야와는 달리 또 한편에는 티끌 하나 없이 맑고 투명한 얼음이 속살을 훤히 내 비춘 채 두 발을 지탱해주고 있다.
바다처럼 넓은 호수의 물결에 움푹 파여 만들어진 동굴 끝자락에 절벽 같은 산 위에서 녹아내린 눈이 커튼을 두르고 있다. 여인의 치맛자락을 들춰보고 싶듯 동굴 속에의 모습도 보고 싶다. 얼음판에 등을 밀착하고 코끝에 닿을락 말락한 고드름을 피해 안으로 안으로 들어간다. 코끼리 물개 모양의 얼음조각, 허공에 떠 있는 얼음덩어리, 숱하게 이어지는 동굴의 얼음 커튼들!
세상을 처음 만난 어린 아이처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눈길을 여기저기 돌린다. 저 멀리 푸르공 버스 옆으로 일행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호수가로 밀려 쌓여진 얼음덩어리들은 둔한 내 발걸음을 잡고 늘어진다. 힘들게 얼음덩어리들을 넘어서니 평평한 빙판이 깔려있고, 몇 십 미터 앞에 휴식처가 펼쳐져 있다. “빨리 가서 담배 연기 깊숙이 빨아야지!”
앞에 논두렁 같은 것이 앞뒤로 두 개 놓여 있고, 그 사이로 속살까지 드러내 놓았던 투명한 빙판이 1미터 폭 가까이 좌우로 길게 뻗어있다. 아마도 몇 시간 전에 생겨 살얼음으로 살짝 모습 감추고 있는 크레바스였다.얼음두렁을 피해 담배 한 모금 생각하며 오른발을 쭉 내밀은 순간!
순간 아무 생각도 없다. 그저 나는 조교의 불호령에 팔꿈치가 깨지던 말든 앞으로 포복해 전진해 가는 훈련병이 되었다. 발이 빠진 얼음 가장자리가 나의 포복에 또다시 깨질 수 있다는 생각에 양쪽 팔꿈치를 게 눈 감추듯 움직여야만 했다. 가장자리에 걸쳐 앉은 순간 그토록 원하던 담배에 불을 붙였다. 동승했던 선배님이 약을 올린다. 두 모금 빨고 담배가 부러진 줄도 모르고 계속 빨아댔다고!
남인근 작가가 내 뒤를 이어 그 둔 턱을 넘으려 한다.
“잠깐!‘
훌쩍 뛰어 넘으면 앞의 둔 턱으로 넘을 수 있는 간격이었지만, 혹시라도 미끄러진다면 또다시 내 신세가 되기에 그의 카메라와 가방을 건네받고 편히 뛰어 넘게 했다.
아내가 나 모르게 가방에 넣어줬던 염주 덕분이었을까? 카메라 보호한다고 균형 잃어 옆으로 쓰려져 빠졌다면, 어설프게 앞의 둔 턱을 잡고 포복하다가 옆으로 미끄러졌다면, 나는 실종 상태로 몇 개월 해빙될 때까지 내 모습을 바이칼 호수 빙판 아래 숨기고 있었을 것이다.
“이그~ 오늘 오후 촬영은 끝!” 오른쪽 다리는 무릎까지 빠졌지만, 안의 방풍(수) 홑겹 바지 덕분에 내 발과 신발만 바이칼 호수에 흠뻑 젖어 있었다. 이미 신발은 얼음덩어리가 되어 있었지만, 핫팩과 렌즈수건으로 둘둘 감아 싼 내 발은 이틀 동안 씻지 않은 때를 말끔히 벗어 던지고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바이칼 호수의 얼음을 깨고 발 닦은 사람 있나요?
성실과 겸손함이 느껴졌던 남인근 작가의 따스한 마음이 또다시 전달되었다. 덧신었던 그의 양말을 양쪽 하나씩 벗어 건네준다. 덕분에 내피를 벗겨낸 신발을 신고 오후 일정에 동참할 수 있었다.
아내와 단 둘이서 베네치아를 여행했을 때였다. 오페라 아니면 연주회라도 관람하며 여행의 참맛을 느끼고 싶었기에, 미로의 골목길을 한참 헤매며 교회에서 열린 동호인의 작은 음악회를 찾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의 변방 그리고 바이칼 호수에 둘러싸인 섬의 한적한 외진 마을에서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곡과 ‘백 만 송이 장미’의 러시아 민요를 들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한 명의 피아니스트와 세 명의 동네 아낙으로 구성된 중창단은 이번 여행의 가장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겨졌다. 이런 시골마을에서 피어나 한 아름 꽃을 피웠던 러시아 문화의 진실을 알게 된 소중한 시간이었다.
호수 밖의 세상을 호수 안에 고스란히 담을 만큼 투명한 얼음이 그 경계를 이루고 있다. 떠오르는 태양은 하나일 수 없다. 거울 같은 바이칼 호수 얼음에 또 하나가 만들어지고, 불쑥 삐져 솟구친 유리 같은 얼음 조각에 또 다시 몇 개가 모습 드러내고, 동굴 앞 커튼을 펼치고 있는 숱한 고드름에 알알이 붉게 타오르는 자태를 새기고 있다. 보석처럼 빛나는 일출 촬영을 끝내고 바이칼 호숫가 설원에서 질주하는 군마를 렌즈에 담기 위해, 영원히 머물러 있으라고 나를 잡아끌었던 호수를 등지고 섬으로 올랐다.
다시 이르크츠크로 향하는 오후 여정은 하얀 도화지 위에 한 점 푸르공의 흔적이었을 것이다. 끝없이 펼쳐지는 백설의 평원은 펑펑 눈이 내리길 바랐던 내 마음을 위로하기에 충분했다. 도중에 들린 카페의 외부 화장실에서도 빙벽을 볼 수 있었다. 남자들의 흔적이 얼음이 되어 쌓이고 또다시 쌓여 야릇한 빛깔의 빙벽을 이루고 있었다.
러시아의 마지막 하루를 렌즈에 담기 위해 호텔을 나선다. 쭉쭉빵빵 털모자 털코트 그리고 긴 부츠를 신고 긴 다리를 경쾌하게 쭉쭉 내밀려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러시아의 아가씨들 모습이 가득하다. 며칠 전 알흔 섬으로 향하는 다리 위에서 멀찌감치 바라보았던 상고대 숲 속으로 발길을 내딛는다. 회색빛의 시내와는 달리 강변에서 하얀 빛깔로 온통 덮고 있는 동화나라가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유네스코 문화재로 지정된 몇 백 년 전통의 통나무집 창틀은 오래 전 러시아인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통나무집 절반까지 눈에 갇혀 있어 온통 세상이 같아 보일 때, 제각기 다른 소박한 치장의 창틀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놓고 그 창틀 안에서 봄이 오기를 기다리며 철학과 예술 이야기로 꽃 피웠을 그들의 속삭임을 들려준다.
우리들의 속삭임은 김포공항에서 끝이 났다. 한껏 세상을 누비며 명예와 여유를 쌓아놓고 이제는 삶의 향기를 피우기 위해 카메라를 벗 삼는 선배님들, 그리고 삶의 여백을 넓히기 위해 세상을 담아가는 또래님 후배님들과의 5박 6일의 여정은 잠시 커튼을 내렸다. 처음 접했지만 편안한 여행을 만들어 주었던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2012년 3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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