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년 새해 첫날 아침이 밝았다.
첫째 딸은 남겨두고 장모 처남 아내와 막내 현주와 함께 트렁크에 짐을 잔뜩 담고 연천으로
향했다. 텅빈 부대 카페에서 알게 된 선임 엄마가 알려준 숙소의 번호를 곱게 간직한 채 전
곡에 다가서서 한탄강 관광호텔에 전화를 하니 방을 잡을 수 없다고 한다. 내산리로 향하는
길로 우회전하려 하니, 무심코 지나쳤던 동막골온천이 눈에 띈다. 잠시 들려 물어보니 숙박
할 방은 별도로 있지만 취사는 안된다고 하여 일단 예약을 보류한 채 아들에게 달려갔다.
군복 입은 아들이 아직도 낯설어서인지 긴가민가 하며 위병소로 다가오는 일행을 마주하니,
일병 그리고 이병 두명의 동행자와 함께 아들이 함박미소를 지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부대 바로 앞 '내산마루' 팬션에 별채로 지어진 해마루에 짐을 펼치고 전곡 시내로 향했다.
(방에 따라 4인 기준 9만원, 6인 기준 13만원이며, 1인당 1만원이 추가임. www.naesanmaru.com )
장모가 이전에 맛있게 먹었다던 버섯 샤브샤브 집과 군용물품을 파는 군장점을 찾으려고
전곡 시내를 두루두두 차로 돌고는 허기진 배를 채우려 우선 점심을 먹고, 버스터미널
근처에 있는 군장점을 들렸다. 바로 얼마 전에 왔다는 후임병의 선물과 선임병이 부탁한
모자 등을 군장점에서 구입하게 하고, 간부가 먹는 것을 보고 침을 흘렸다던 샌드위치도
몇 살 차이 안나는 삼촌과 함께 쇼핑을 시켰다.
양평쪽 기도원에 갔던 누나와 여동생 가족에게 연락이 왔다. 조카가 먹고 싶다는 회초밥을
사려했지만 가까운 곳은 문을 열지 않아서 늦을 것 같다며...
점심을 먹을 때 위치 보고를 해야 한다며 전화를 했던 당직사관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연천군 왕징면에 있는 '허브빌리지'가 좋으니 둘러 보란다. (www.herbvillage.co.kr)
공사 중이라 입장료(1인 6천원)를 면제 받았지만, 오히려 꽃피는 봄날 다시 들려도 입장료
가 아깝지 않을 만큼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커다란 실내허브온실을 둘러보고 있으니,
누나와 동생가족이 합류를 했다.
부대 위병소 앞에서 불과 1키로 남짓 떨어진 그 팬션에서 바라본 내산리 계곡의 모습은
담장없는 195포대의 병영 안에서의 모습과 똑같겠건만, 부대 안과 밖의 공기가 틀릴거라는
삼촌의 말에 명섭이는 연신 맞다며 맞장구를 쳐댄다. 따스한 날에 그곳을 찾아왔다면
야외에 놓여있는 식탁에 둘러앉아 청명한 내산리 밤하늘의 별빛을 바라보았을텐데,
매서운 겨울바람에 우리 열 명의 일행은 방안에서 고기 굽는 연기와 함께 다정한 이야기
꾸러미를 내산리의 밤하늘 높이 높이로 날려 보냈다.
제부와 명섭이의 코고는 소리에 잠을 뒤척인다. (내가 코고는 소리는 들을 수가 없으니~)
게슴푸레 눈을 떠 시계를 보니 새벽 3시다. 어찌해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결국 살며시
방을 나섰다.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온 세상은 수북히 하얀 눈으로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날이 밝은 뒤의 일들이 걱정되었지만, 그때는 그때의 일일 뿐!
달빛도 없는 보금자리 주변을 뽀드득 눈을 밟으며 눈을 맞는 강아지 마냥 나는 발길을
휘젓는다. 저 멀리 부대 앞까지 다가서려 했지만, 미운 놈 개 한마리가 짖어댄다.
한 마리의 외침은 내산리 높고 높은 산을 되받고 몇 마리의 울음소리로 되돌아온다.
한 시간 가까이의 방황은 내 차속으로 마무리를 짓고, 혹여라도 남들 잠을 깰까 조심스레
시동을 켠 차 속에서 씨디 선율과 함께 연신 담배연기로 밤하늘에 날려 보낸다.
날이 밝기도 전에 동생이 나를 찾아온다. 이미 어른들은 모두 잠에서 깨어나 있으니
방안으로 들어 오란다. 눈이라도 안왔으면 동막골 온천으로 옮겨 갔으련만,
계속 쌓여가는 내산리 계곡의 눈발은 여전히 휘날리고 있었다. 이 없으면 잇몸이라도
안되는 상황을 어찌하랴~ 귓가에는 '라라의 테마'가 울리고, 내산리 계곡은 햐안 눈으로
덮혀진 시베리아 벌판으로 바뀌었다. '눈'의 축제가 시작되었다.
9살 현주 그리고 8살 사촌동생 예솔이는 눈싸움 눈사람 눈빙수 눈썰매 그저 신이 났다.
아빠와 이모부는 차바퀴에 체인을 채우느라 치열한 싸움이다. 낭만을 잃어버린 누나와
아내는 그저 음식 만들고 설거지 하느라 여전히 방콕이다. 장모는 길잃어 헤매던 발리에서
처럼 오랜 시간이 흐르도록 소식이 없다. 하루에도 몇 번씩 코 골지 말라며 깨우는 선임들
의 눈치에서 벗어나 내산리가 떠나가도록 클대 자로 뻗어 소리를 내며 명섭이는 여전히 잠자고 있다.
여하튼 국방부 시계를 돌고 있다. 병영에서건 외박 때이건 휴가를 나와서이든 국방국 시계
는 돌고 있다. 하지만 왜 그리고 병영 안에서의 시계는 느리게 가는 것인지... 처남과 명섭
이와 잠시 전곡으로 다시 나갔다. 선임이 오바로크를 부탁해서 전날 맡겨 놓은 군복을 찾고
내산리 계곡에서 잠시라도 좀더 벗어나 있어 보라고 세상 공기가 다른 곳으로 데려갔다.
눈이 내렸으니 2시간 일찍 귀대하라는 부대 연락에 풀 죽어 있는 아들의 등을 두드리며
아들의 짐을 챙겨 주고 있으니 또다시 울화통이 터진다.
"야~ 이놈아! 이렇게 싸면 짐이 줄어들쟎냐?"
자대배치 한달여 만에 외박 나왔다가 복귀하는 아들이 걱정이 된다.
"가능하면 빠른 시일 내에 전화해라!"
등을 돌리며 위병소를 떠나는 아들의 모습을 보며 잠시 머뭇거리다 차에 오른다.
진하디 진하게 추억을 남겨 놓은 내산리 계곡은 점차 멀어져만 갔다.
동막골 온천을 지나쳐 나오려는데 얼마 전에 전화를 준 큰 딸이 생각났다. 친구와 홍천의
스키장에 갔던 딸이 친구 먼저 가서 밤 10:30분에 있는 버스를 타고 올거란다. 은근히
아빠가 데려와 주길 바라면서... 서울까지 갔다가 다시 홍천으로 가야 하는데 이를 어찌
한단 말인가?
종알종알 엄마와 외할머니에게 도란도란 이런저런 하는 첫째딸의 목소리를 음악 삼아
달려왔다. 바짝 핸들을 쥐어잡고... 아파트 앞 순대국 집에서의 소주 한 잔을 생각하며~
2010.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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