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묘년 새해에도 뜻하시는 일들 성취하길 기원하며
행복과 미소 가득한 한 해 되길 소망합니다.
새 한 마리
십년 전 아버지께서 이승을 떠나신 후 부모님이 사시던 집과 농원을 비워둘 수 없어 방 한 칸을 사무실로 꾸며놓고 매일 출퇴근해 왔다. 어느 날인가부터 연립주택과 아파트 그리고 학교로 둘러 싸여있고 원치 않는 도로 개설로 아버지가 가꾸시던 농원은 많이 바뀌었지만, 그래도 이곳은 도심 속의 쉼터처럼 봄부터 늦가을까지 온갖 꽃들의 개화가 정신없이 이어지고 있고, 새들이 무리지어 찾아와 하염없이 노닐다 가곤 한다. 산과 이어져 있을 때는 다람쥐 몇 마리가 느티나무를 기어오르기도 했지만 사면이 도로로 둘러싸인 이후로는 그 모습 찾을 수 없어 무척 내 마음을 아쉽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청솔모 한 마리가 어찌 길을 건너 찾아왔는지 몰라도 이른 아침 출근하여 하루를 계획하며 커피 향을 즐기고 있을 때, 사무실 창가 바로 옆 나뭇가지 위에 올라 바스락거리며 호젓이 홀로 있는 내 마음을 도닥거려 주고 있다.
작년 어느 여름날, 에어컨 바람을 가둬두고자 방문을 닫은 채 모니터를 보며 세상사와 씨름하고 있는데, 며칠 째 방 밖에서 ‘탁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살포시 발걸음을 내딛으며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다가서니 박새 한 마리가 현관 입구의 커다란 유리창을 작은 부리로 쪼고 있었다. 내 발걸음에 놀라 잠시 현관 밖으로 달아났다가는 다시 찾아와 또다시 유리창을 쪼아댔다. 짝 잃은 새 한 마리가 우연히 거울에 비춰진 자신과 닮은 새 한 마리를 보고 사랑을 나누고 싶어 뽀뽀를 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이 신기하고 애틋하여 커다란 망원렌즈가 달린 카메라를 들고 다가서니 또다시 도망을 가버렸다가는, 살며시 숨죽이고 있으니 다시 찾아 들었다. 카메라 셔터 소리에 결국은 멀리 날아가 버리고는 몇 날 며칠 동안 현관문을 열어 놓고 쌀 한줌을 거울 앞에 놓았어도 더 이상 그 새는 찾아오질 않았다.
거실의 벽면은 안팎이 하나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커다란 통유리로 되어 있다. 때문에 봄이면 사랑놀이를 하는 직박구리 새들이 쫓고 쫒기다가 유리창에 부딪쳐서 땅바닥에 떨어지곤 했다. 거실로 숨어들고 싶어 날아드는 새들의 충돌사고를 막아보려고 커튼을 내리기도 했지만, 파란하늘과 푸른 나뭇잎들이 그리워 이내 장막을 올리곤 했다. 반쯤 2층인 내 사무실 커다란 창문 바로 옆에 있는 감나무 끝가지에는 가을이 되면 따지 않은 감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으레 까치밥이 되곤 했다. 직박구리 새 그리고 까치가 치열한 싸움 끝에 하나하나 열매가 사라지게 될 때는 이심전심이랄까 나 또한 배가 불러오는 것을 느꼈었다. 비록 내 방 한 칸은 담배연기로 가득 차 있지만, 몇 걸음 밖은 푸른 나무들과 화사한 꽃향기 그리고 시끄러울 만큼 지지대는 새 소리가 어우러져 깊은 산속처럼 느껴지는 곳이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떠나가 버린 자기 짝이 그리워 커다란 거울속의 자신을 보고 애타게 옛일을 떠올리던 그 새의 존재는 잊어 버렸다. 그러다 가을이 찾아올 무렵에 하늬바람을 맞이하고자 창문과 현관문을 활짝 열어놓고 나만의 공간에 갇혀 세상과 씨름하고 있을 때, 나는 또다시 푸드덕거리는 소리에 이끌려 거실로 발길을 내딛었다. 아버지가 장작더미에 불을 지피시던 벽난로 옆 커다란 화초 가지에서 낯익은 새 한마리가 오르락내리락하고는 발걸음 소리에 놀라 후다닥 안과 밖을 가로 나누는 유리창으로 날아가 버린다. 반가운 마음에 쌀 한줌과 카메라를 들고 다가서니 아버지 침대가 놓여있던 그곳으로 옮겨가 고개를 이리저리 기우뚱거린다.
그곳으로는 창밖의 커다란 목련이 가지를 뻗고 있다. 밑 둥지부터 두 갈래로 큰 줄기가 갈라진 그 목련은 겨울이 올 무렵에 꽃망울을 가지마다 품었다가는 해마다 삼월이 지나갈 무렵에 화들짝 놀라듯 온 나무를 하얗게 덮고는 인생사처럼 이내 땅바닥에 떨어지고 만다. 그 해 일월에는 몹시도 추웠다. 선친과의 이별에 천붕지탄으로 나날을 보내야했던 겨울이 지나고 봄 햇살이 무르익기 시작할 때 겨우내 추위를 이겨내고 산수유가 피어나니 목련도 순백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해 봄에는 밑 둥지부터 갈라진 두 줄기의 목련은 반신불수가 되어 버렸다. 아버지의 침대가 놓여있는 곳으로 뻗은 줄기는 봄이 왔음에도 겨울을 품고 있는 듯 앙상한 가지의 꽃망울을 펼치지 못하고, 남쪽으로 향한 줄기에서 만개한 꽃잎들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한 줄기는 얼어 죽었나 보다. 꽃잎 떨어지고 새잎 돋아날 때까지는 기다려야겠지.” 다행히도 사월에 들어서니 한 뿌리에서 올라온 두 줄기는 연두 빛 새잎들로 하나가 되어갔고, 또 한 겨울을 지내고 봄을 맞이하니 거실 쪽으로 뻗어 있는 그 줄기의 가지의 꽃망울들도 마지막 침상에서 “깨끗이 살았다. 그리고 열심히 살았다.”라며 내게 들려 주셨던 아버지의 말씀처럼 힘든 추위를 이겨내고 티 한 점 없이 순결한 모습으로 활짝 펼쳐졌다. 그 줄기가 뻗어있는 거실 한 구석에 그 새가 날아들었던 것이다.
어릴 적에는 멋모르고 꽃잎에 앉아있는 벌을 낚아채고는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했지만, 세월이 흘러갈수록 혹시라도 개미 한 마리라도 내 발에 밟혀 짓이겨질까봐 땅을 밟기가 조심스러워진다. 내 발걸음에 놀라 어쩔 줄 몰라 하는 그 새를 가두어 둘 수는 없다. 무리에서 떨어져 어찌 이곳까지 날아들었는지는 알 수 없어도 아버지가 태어나신 검단산과 영면의 자리를 지키고 계신 예봉산이 강물로 갈라져 있듯이 우리는 커다란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사는 세상을 달리해야 하는 것이다. 또 다른 유리창들을 열어 제치고 자리를 비우니, “8일 뒤에 떠날 거다.” 라고 며느리 손바닥에 희미하게 글자를 쓰시고는 더 이상 아무 말씀 없이 떠나갔듯이 그 새도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
이제 며칠 뒤에는 십주기가 된다. 거의 한 달 내내 저 멀리 계신 아버지께 다가서려 해도 다가설 수 없는 꿈속에 시달린 그때도 십 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지난 인연에만 묶여 살 수 없는 것이 세상사의 이치기에, 나는 선친의 유지를 욕되지 않게 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다. “가락시장 큰 길 가 트럭 위의 돼지들! 죽어서라도 고기 한 점 남기련만, 나 주검이 된다할지라도 풀 한포기 거름조차 되지 못할 삶! 세상을 향해 무엇을 남길 것인가?” 십여 년 전 나의 뇌리를 스쳐지나갔던 그 생각을 되새기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동짓달 추위가 매섭게 몰아치던 얼마 전! 일상의 생활이 반복되고 있었다. 모니터를 응시한 채 일희일비하며 유리창과 현관문 모두를 꼭꼭 잠그고 자연과 단절하고 있을 때, 또다시 생소한 소리가 들렸다. 그저 추위에 집이 움츠려드는 소리인가 생각하며 일손을 놓고 있지 않았지만, 이어지는 ‘딱딱’ ‘푸득푸득’ 소리에 결국 밖을 둘러보려 거실로 향했다. “언제 어떻게 꽉 닫힌 이곳으로 날아 든 것인가?” 바로 그 박새가 거실로 다시 찾아 온 것이었다. 목덜미부터 다리까지 넥타이 모양의 짙고 검은 선이 하얀 배 위로 새겨진 수컷 박새가 이제는 아버지 당신의 사진 액자 위에 앉아 있었다. 그저 새 한 마리가 길을 잘못 찾아온 것이라 무시해 버릴 수 있겠지만, 세 번째의 만남에서는 더 이상 우연이라고만 생각할 수 없었다. 당신의 손길이 아직도 짙게 묻어있는 거실에 새가 되어 날아들어, '맑고 바르고 슬기롭게' 아들이 살아가고 있는지 바라보고자 오셨던 것인가 보다. 아버지의 사랑은 그렇게 끝이 없나보다. 나는 아이들에게 어떤 아버지로 남을 것인가?
“아버지! 현명한 지혜를 주세요! 험상 세상 헤쳐갈 수 있도록 혜안을 주시고, 아이들의 진정한 아빠가 되도록 사랑의 마음을 안겨 주세요. 당신의 딸들과 아들이 지금까지처럼 어우러져 함박 미소를 지우며 살아갈 수 있도록 보살펴 주세요! 당신의 아들로 태어나게 해 주신 것에 진정 감사드리며, 또한 새 한 마리 되어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심에 감사드리며, 당신의 비문처럼 ‘깨끗하게 살았노라! 열심히 살았노라!’ 라고 저 또한 새길 수 있도록 보살 펴 주세요!”
2010년 12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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