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년도 카카오스토리
요즘 덕유산 등산과 사진 이야기만 들린다.
그래서 나도 곤도라 타고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2015년 1월 7일 오후 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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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맛있는 반찬 먹으라고 권할 때, 막내 현주가 한마디로 “싫어요!”라고 말하면 더 이상 소용없단다. 아빠 성격을 닮아서 그렇다며 볼 멘 소리를 늘어놓는다.
종종 보험 인터넷 등 홍보의 전화가 올 때면, 나는 “관심 없으니 끊어요.”라며 곧바로 종료 버튼을 눌러 버린다. 또다시 그 번호로부터 벨이 울리면, “이제 욕이 나올 수도 있으니 더 이상 전화하지 말아요!”라며 거의 ‘갑’질 수준의 신경질을 부린다.
오래 전 증권사 다닐 때 회장의 아들인 부사장 방침에 한 달 가량을 버티며 그의 지시와 다른 ‘안’을 계속 결제 올렸다. 하지만 결국 “자네 생각이 맞지만, 나도 어쩔 수 없으니 그냥 방침대로 올려 달라!”는 말에 내 뜻을 접고 말았다.
언짢은 일로 하루 종일 심기가 불편했던 어제 저녁 어둠이 내릴 때, 낯 설은 핸드폰 번호로부터 전화가 왔다. “강남에 있는 역사편찬연구소인데……”라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똑같이 그냥 끊으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다가 내 입에서는 “그런데요?”라고 바뀌었다.
“광주시의 역사인물 선정에 아버님이 명단에 올랐고 제가 그 일을 맡게 되었는데, 선생님께서 출판하신 책을 참고하려고 합니다.”
“아이고! 너무 고마운 일이지요. 제 책을 모두 베끼셔도 됩니다. 찾아오시는 수고 마시고 필요한 자료 있으면 제가 모두 갖다 드리죠.”
선친 삶의 이야기를 10년 이상 벼르다가 타계하신 후 거의 일 년 가까운 시간 동안 내 머리와 마음을 짜내며, 선친 추모록을 13년 전에 세상에 내 놓았던 것이다. 왜? 음모술수로 가득한 더러운 세상에 항변하기 위해서!
어느 날인가부터 내 얼굴은 잔뜩 찌푸려진 채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나도 묵의 향기처럼 은은한 멋을 풍기며 살고, 산사의 해맑은 스님의 미소를 가득 안고 살고 싶었지만, 어느덧 나한의 얼굴이 아닌 악마의 표정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이제는 이렇게 말해야겠다.
“좋은 정보 고맙지만, 관심도 시간도 없으니 전화 삼가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15. 1. 10. 오전 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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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밤 EBS ‘도움’ 프로그램에서 13살 네팔 소년의 이야기를 보면서, 눈가를 적신 채 잠결에 빠져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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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있는 곳까지 하루를 걸어가야 하는 네팔의 촌락을 지나칠 때였다. 내리막길임에도 걷기 힘들 정도의 급경사에 작은 집 한 채가 있었고, 그 앞마당 한 구석에 멍석을 깔아놓고 앉아 있는 소년이 있었다.
그의 곁에는 서너 살 남짓한 어린 소녀가 오빠 곁에서 흙장난을 하고 있었고, 찌들어지게 가난한 그의 부모는 밭에 나간 모양이다.
카메라 렌즈를 들이대는 이방인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소년은 몽땅 연필을 꼭 쥔 채 책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말 한마디조차 건네기 힘들 만큼 고요함 속에서 책장을 넘기는 그 소년의 눈빛을 잠시 훔칠 수 있었다. 뜻이 있고 꿈이 있었다.
더 이상 소년의 정신을 어지럽히기 미안하여 일행을 쫓아 서둘러 내리막길로 발을 내딛는다. 한참을 내려간 뒤 뒤돌아보니 그 집은 아득하게 멀기만 하다.
큰 후회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카메라를 들이 대기보다 뒷주머니의 지갑을 꺼내지 않았던 나의 무심함을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나머지 트레킹 내내 떠올린 그 소년의 눈빛은 내게 미안함과 함께 미소를 안겨 주었다.
2007년 9월 6일
2015년 1월 23일 오전 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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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도 Format이나 Reset이 있을까?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는 있지만, 처음부터 삶의 이야기는 다시 쓸 수 없겠지.
하지만 일상에서는 새롭게 시작하는 것들이 무수히 많이 있다. 아끼며 즐겨 입던 옷을 어느 날 수거함에 던져 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기도 하고, 반복해서 듣던 MP3의 곡들을 모두 바꿔버리기도 하고, 낯 설은 친구들과의 모임으로 우정을 갈아타기도 한다.
어제 아내와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나누다가 막내 현주의 잠옷 이야기가 나왔다. 한 쪽은 긴 바지 다른 한 쪽은 반바지 그리고 막내가 서투른 솜씨로 찢어진 곳을 엉성하게 직접 꿰맨 소매 끝!
애착이 가는 것은 차마 버리지 못하고 껴안고 있어야 하는 아빠의 심성을 닮아서인가 보다. 새 잠옷으로 갈아입게 된다 할지라도, 정들었던 잠옷을 버리지 못하고 서랍 속에 곱게 간직해야만 하는 삶의 얽매임! 쉽사리 미련 없이 리셋을 하지 못하는 성품인가 보다.
하지만 일상에서는 어쩔 수 없이 리셋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25년 동안 승용차를 고집하다가 26만 킬로미터를 달려준 애마를 버리고 SUV로 바꿨던 일, 10년 가까이 반복해서 듣던 애청곡 모음을 서랍에 넣고 지인이 건네 준 몇 백 여곡이 담긴 USB를 벗으로 삼게 된 일. 그리고 다음 주에는 Format을 해야만 하는 어떤 일이 남아 있다.
2월 말의 먼 곳 여행에서는 휴대 전화를 두 개씩 갖고 다닐 수 없기 때문에, 종종 뒤엉켜 버리기도 하고 메시지 기능이 멈춰 버린 스마트 폰을 포맷해야만 한다. 전화번호의 백업 기능도 작동시킬 수 없다. 전화와 관련해서는 다시 백지 상태에서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가요는 스케치된 도화지 위에 색을 덧입히는 것이라면, 30 여 년 간 고정된 FM 채널에서 들려오는 클래식은 아무 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하얀 바탕 위에 물감을 떨어뜨리는 것과 같다. 그동안 정들었던 카카오톡과 카카오스토리와의 인연 그리고 밴드와의 연줄은 과연 가요가 될까 클래식이 될까? 22년 째 같은 번호를 고수하고 있는 통화 전용 011 272 0025 그리고 3년 째 인터넷 전용으로 쓰고 있는 010 5445 0025!
때때로 나의 인생도 Format 아니면 Reset하고 싶을 때가 있다. 매일 눈살을 찌푸리며 살고 있는 그러나 버리기는 아까운 삶을 되밟을 수 있을까? 아니면 눈가에 주름살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삶의 후회를 마주하지 않고 살아가게 될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 내가 Format 아니면 Reset 버튼을 누르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이승에서 나의 발자취를 남길 수 없다는 것! 내가 내 손을 그 버튼 위로 갖다 놓을 수 없는 단 하나의 이유는 내 팔에 너무나도 무거운 인연들이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매일 술로 내 삶의 후회를 망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오늘도! 지금도!
2015년 1월의 마지막 날.
2015년 1월 31일 오후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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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ll we dance?
그녀가 내 앞에 나타나 준다면,
나는 손을 내밀 것입니다.
“함께 춤을 추실까요?” 라며!
별을 헤아리게 된 이후로 몇 십 년 동안 동경하던
그곳을 이제 며칠 뒤에는 발을 내딛게 됩니다.
평생 한 번 갈까 말까하는 연회 장소이지요.
운이 좋다면 무도회도 열린답니다.
그녀의 환상적인 춤사위 모습을 담기 위해
여행 가방을 항상 채워왔던 소주를 빼내고
캠코더 그리고 카메라 2대와 삼각대 3개를 넣었어요.
세상을 환히 비추던 조명이 시나브로 꺼지면
그녀는 저기 북쪽 하늘 끝에서 불현듯 날아 올 겁니다.
왈츠의 부드러운 곡이 내 입술을 스쳐갈 지
플라밍고의 신바람 난 선율이
내 얼굴을 어루만질 지 알 수 없지만,
내 몸은 그녀를 품고 저 하늘 아래에서
가장 아름다운 몸짓을 함께 펼치게 될 것 같아요.
매일 매일 기다리던 마음은
어느덧 사랑이 되어 버린 것 같아요.
무대의 장막이 그녀의 모습을 끝내 볼 수 없게 만든다면,
아마도 나는 목 놓아 울어 버릴 지도 몰라요.
그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리던 만남인데!
혹시라도 내가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면,
나의 혼을 빼앗는 그녀의 손을 잡고 춤을 추다가
북쪽 오로라 여신의 나라로 이끌려 간 줄 아시구려.
아니면 그녀의 눈빛에 나의 심장이 멎은 줄 아시구려!
2015. 2. 16. 오후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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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나선 지 30시간이 경과되었는데
아직도 아이슬랜드 땅을 밟지 못하고 있다.
지금은 스웨덴 스톡홀름 공항 호텔에서
동터 오는 아침을 방의 창을 통해 맞이하고 있다.
앞으로도 8시간이 지나야
아이슬랜드 땅에 발을 내딛게 될 거다.
아~ 오로라 여신을 마주하는 길이
이리도 멀구 멀구나!
2015년 2월 23일 오후 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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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바람 나지 말라고,
그 미소에 내 심장 멈추지 말라고
신비한 모습 보여주지 아니하는 여신!
고마워해야 하나? 야속해야 하나?
어제 오늘 아이슬랜드의 하늘은
카스토리에 올려진 사진 그대로이다.
게다가 거센 바람은 저 파도로 하여금
일행 중 2명의 중상자와 다수의 경상자를 만들어 버렸다.
두 명은 파도를 뒤집어 쓰고
카메라와 온 몸을 바닷물에 세탁했고,
나머지 경상자들도 신발과
아래 바지의 묵은 때를 씻어냈다.
아름다운 여인을 품에 안고
저 하늘에서 춤을 추는 것이
이토록 힘든 것인가?
2015년 2월 25일 오전 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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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낭만은 사라지고,
현실만이 나를 짓누르고 있다.
거센 폭풍으로 도로가 폐쇄되어 버렸다.
사람도 차도 바람을 피해 숨어 버려야 했지만,
차량 세 대 중 두 대가 일부 파손되고 말았다.
7시간 동안 휴게소 신세를 진 뒤
얼마 전에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했다.
밤하늘은 여심처럼 변덕이 심하다.
별빛이 보였다가는 이내 눈발이 내린다.
오로라 여신의 미소가 그리워 유빙 해변으로 나갔지만
결국 허탈한 마음에 숙소로 되돌아 와야 했다.
2015년 2월 26일 오전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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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라 여신을 마주하고 돌아왔어요.
아이슬랜드의 세 여신의 이야기는 다음에~
2015년 3월 8일 오전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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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랜드를 그림으로 그려 달라면, 하얀 도화지 한 장을
그냥 건네 줄 것입니다. 나무가 거의 없는 산과 들을
하얀 눈이 온통 덮었고, 거센 바람이 눈보라를 일으켜
파란 하늘을 가렸기 때문이지요.
도착 첫날부터 바람의 여신은 우리 일행을 열렬히 환영하여
주었습니다. 대서양 해류 때문에 비교적 춥지 않은 곳이지만,
매서운 바람결은 여신에 대한 경외감에 온 몸을 움츠리게
만들었지요. 그리고 여정 중 두 번을 바람의 여신의 열정적인
포옹을 피해 휴게소에서 몇 시간씩이나 대피해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 여신의 입김은 일정 내내 먹구름을 몰고 와
오로라 여신에 대한 알현을 계속 방해했지요. 분명 아이슬랜드
바람의 여신은 무척 심술 많고 질투가 심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로라 여신만 있다고 믿고 갔던 우리들에게 바람의
여신보다 더 고약한 여신이 다가섰습니다. 바로 파도의 여신
이었지요. 이틀 째 날, 백사장에서 바람의 여신이 몰고 온
눈발을 맞아가며 새로운 세상을 렌즈에 담고 있는데,
반갑다며 달려든 파도의 여신이 두 명을 카메라와 함께
그만 바닷물에 목욕재계하게 했고, 여러 명의 바짓가랑이까지
젖게 했지요. 그 뿐만 아니었어요. 유빙 해변에서 오로라 여신을
알현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일행들을 볼링공이 핀을 넘어
뜨리듯 덮쳐서는 17개의 핀 중 4개의 핀을 줄줄이 쓰려 뜨려
카메라와 함께 수장시켜 버렸지요. 참으로 아이슬랜드 여신
들의 심보는 고약하기만 했어요.
하지만 정말 댄스는 참~ 잘 추고 왔네요. 바람의 여신의
유혹에 이끌려 이리저리 스텝 밟고 요리조리 몸을 비틀었지요.
그리고 파도 여신은 우리를 밀고 당기고, 앉혀다 일으켰다
전신 운동을 시키며 춤사위의 기본부터 가르쳐 주었지요.
결국 일정을 바꿔가며 기다렸지만 두 여신에게 혼이 빠져
오로라 여신의 미소를 마주하리라는 기대는 포기하고 말았어요.
아이슬랜드 출국 전날! 공항 근처로 가는 중에 큰 버스도
작은 승용차도 길가로 미끄러져 나가 버린 모습을 거세게
흔들거리는 승합차에서 바라봐야만 했습니다. 그나마 바람
그리고 파도의 여신의 프러포즈를 살짝 피해갈 수 있었던 것을
다행이라 생각하며, 비록 하룻밤이었지만 아이슬랜드에서
가슴 터지도록 행복했던 그 순간을 되새기며 마지막 날 밤
귀국길 짐을 챙겨야 했답니다.
2015. 3. 8. 오후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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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저 빔을 쏘아 올리듯 남쪽 하늘을 향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며칠 동안 먹구름 하늘의 장막이 가려져 마주할
수 없었던 오로라 여신이 드디어 아이슬랜드의 밤하늘을
수놓기 시작한 것이다.
그냥 길쭉하게 남쪽을 향해 뻗어 있던 빛줄기는 서서히
나래를 펼치는가 하더니, 오작교 위에서 연인이 만나듯
남극과 북극을 한 줄기 빛으로 이어 버렸다.
그녀의 모습을 담기 위해 타임을 벌브 모드로 놓고
“하나 둘 셋...” 숫자를 세기 바빴다. 그러나 더 이상 릴리즈를
손에 쥐고 있을 수 없었다. 끊임없이 펼쳐지는 여신의 율동을
쫓아 바라보려 하니 내 몸 또한 제 자리에 멈춰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냥 얼음판 위에 벌렁 누워 하늘을 바라보니, 여신의 무희가
새색시 첫날 밤 옷고름 풀 때 가슴이 부풀었다가 오그라지듯
하니, 내 심장이 멈출 것 같아 차라리 고개를 돌려 버린다.
그녀가 치마폭을 펼친다. 살짝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결에
흩날리는 속치마가 내 얼굴 위를 스쳐 지나가듯 하니,
내 숨결은 가빠지기 시작한다.
더 이상 바라볼 수 없어 차라리 눈을 감아 버렸다. 비로써
나는 여신의 손에 이끌려 보석처럼 깔려 있는 별들을 밟으며
춤을 춘다. 그녀의 “Shall we dance?" 그 한 마디에
나는 세상을 잊고 하늘을 날고 있다.
기진해 버린 나를 배려하기 위해 잠시 모습을 감추었다가는
또다시 유빙 해변에 모습을 드러낸다. 나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서는 독무대의 화려한 댄스를 펼친다. 내 귀에는 천상의
천사들의 코러스도 들려온다.
열흘 간 아이슬랜드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단 한 번 오로라
여신을 마주했건만, 귀국길 짐을 싸면서 그 것만으로도
더 이상 채울 수 없는 행복을 되새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냥 떠나보내기 미안했던지, 마지막 날 밤 여신은 그녀의
시녀를 보내 또 다시 북극 나라의 무도회를 펼쳐 보여
주었다. 그 여정의 추억은 이제 잠결 속 꿈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 꿈은 남미 여행의 꿈으로 이어진다.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살았던 삶의 여정을 나 또한 밟아
가고 있지만 나는 매일매일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야 하듯,
내 발을 내딛지 못한 그 곳을 향한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2015. 3. 9. 오전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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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라 아기 공주도 나오셨네요.
요즘 열공 중인 포토샵의 과제를
제출하기 위해 만들었는데,
막내에게 카톡으로 보내주니
불호령이 떨어졌어요. “지워욧~!”
2015년 3월 16일 오후 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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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편없는 오로라 동영상이지만,
처음으로 타임랩스를 시도하여
여기 카카오스토리에까지 올리는데
성공했다는 것에 만족해야지요.
바람의 여신이 인터벌 촬영하던
카메라를 쓰러뜨리지 않았다면,
더 멋진 동영상을 만들었을 텐데~
오로라는 캠코더로 찍을 수 없다고 하네요.
2015년 3월 17일 오후 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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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렇게 운전하지 말아요~
급격한 변화는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많지요.
변화도 천천히...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해도,
항상 위험이 옆에 있다 생각하며
사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요?
내가 피하지 못하고 저 차를 받았다면
어찌되는 것일까?
2015년 3월 28일 오후 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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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가방을 모하비에 싣고
요즘 빈번하게 남북을 오가고 있다.
지난 일요일에는 봄의 여신이 남녘에
노랑 진분홍 연분홍 그리고 흰색의 물감을
붓에 흠뻑 묻혀 산야에 흩뿌렸는데,
오늘은 어젯밤 봄비로 깨끗이 씻어내고는
연초록 진초록 퍼즐로 모자이크를 만들어 버렸다.
봄이 오는 가 했더니,
불쑥 떠나가고 있나 보다.
* 봄비 따라 덩달아 꽃비 내리더니,
꽃비 따라 덩달아 내 마음도 떨어진다.
* 저 소들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쏟아지고 있다.
2015. 4. 15. 오후 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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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도 불지 않는데,
이파리가 떨고 있구나.
아~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나 보다.
2015년 4월 29일 오전 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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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는 서교동 뒷골목
마쳐 말씀을 못 드렸지요.
“어머니 고마웠습니다!”
그렇게 인사도 못 드리고
이별을 고해야 했습니다.
많이 울었지요.
16년 전에~
2015년 5월 27일 오후 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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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만이네요.
얼마만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네요.
다섯 명의 식구가 한 곳에 모여서 이야기를 나눈 지가!
이번 여름의 가족 여행 때문에 가족 카카오톡 방을 처음으로 열고 함께 말문을 터뜨린 것이에요.
오래 전부터 여름 겨울 방학 때면 가족 여행을 떠났죠.
거의 대부분 여름에는 속초, 겨울에는 홍천이었어요.
물론 가물에 콩 나듯(?) 해외여행도 다녀왔지요.
태국 발리 캄보디아 대마도 터키 - 누나와 여동생 가족과 함께 장모님을 모시고 떠난 특별한 해외여행이었지요. 발리 때는 처가 본가 식구 한 명도 빠짐없이 17명이 한 장의 사진에 모두 담겼었어요.
이번 여름에는 불쑥 다섯 명이 한 식탁에 앉고 싶었어요.
어느 곳에서 추억을 담게 되느냐는 후차적인 문제이겠지요. 그냥 한 자리에 머물고 있다는 추억을 남겨주고 싶었던 것이에요. 캐나다 5명의 가족 여행(막내 현주는 엄마 뱃속에 있었네요) 때 차 안에 함께 머물렀던 그 시간들처럼!
막내는 하와이에서 수영하고 싶다하고, 큰 딸은 필리핀의 세부 싱가포르의 반탐 남태평양의 괌 등등..., 아들은 북해도에서의 자유여행, 아내는 더운데 어디 가냐며 방콕! 나는 산수화가 그려지는 중국 계림. 그냥 울릉도 여행도 좋은데~
어디를 가게 되던 청포도가 익어간다는 칠월에는 오래도록 남겨질 사진 한 장을 남기고 싶은 거예요. 아니~ 혼자 저 멀리 아이슬랜드로 날아가 오로라 여신과 진하게 Dance를 추고, 여기 저기 카메라 속에 그리고 내 마음 속에 삶의 흔적들을 홀로 남기고 다니는 것이 미안하기 때문인가 보네요.
이제 카톡 방도 조용합니다. 아무리 자식들에게 모두 주고 싶어도 결국 아이들이 스스로 헤쳐가야 하는 것이 삶의 진실이니, 27살 24살 16살 그 때의 나날들에 먹구름보다는 상큼한 햇살이 가득하길 바랄 뿐이죠. 그 희망이 나의 존재의 이유입니다.
2015. 유월 마지막 날.
2015년 6월 30일 오후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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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12월 초 22살 때 홀로 여행 : 광주 송정리와 남원을 거쳐 무주에 도착 (전기 생략) … 무주읍과 동떨어진 산반이동이라는 첩첩 산중에 위치한 마을을 찾아, 가로등도 달빛도 없는 시골의 초행길을 1시간 여 남짓 홀로 걸어 간신히 마을 불빛을 보게 되었을 때는 길을 잃고 동사하지 않았다는 안도감에 큰 숨을 내쉴 수 있었다. 관사에 혼자 머물고 있던 누나의 남자친구가 건네주는 더덕주 술잔에 비추는 호롱불빛은 두 끼를 굶은 내 눈에는 진수성찬의 안주로 보였고, 그 몇 잔술과 안주에 내 마음은 누나 결혼을 찬성하겠다는 쪽으로 기울고 말았다. (누나가 결혼해도 괜찮은 남자인지 판단하기 위해 그 밤길을 걸었다오. ㅠㅠ) … 대전 외숙부 상, 공주, 금잔디, 갑사, 남매탑, 동학사, 느티나무 밑 박정자 상회, 석장리 유적지, 무령왕릉 그리고 부여행 밤차는 중략 …
웅진에서 하루를 더 지체하지 못했음을 아쉬워하며, 또다시 길손의 시선은 여인숙 간판에 맞춰지고 있었다. 반가이 맞이해 주는 아가씨에 대한 첫 인상은 우연히 엿들은 그녀의 여동생과의 우애 깊은 대화 속에서,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겨지는 듯 했다. 그러나 손님들이 빈 방을 채우고 밤이 깊어지자 그 아가씨가 보여준 해프닝은 끝내 객의 잠만 빼앗아가고 먼동이 트기도 전에 부소산을 찾게 하였다. 너무 시간이 일렀던 관계로 발길을 돌려 정림사지 석탑을 찾았으나, 읍내 도로변의 공허한 터 위에는 절을 재건하려는 공사로 철책이 둘러 쳐져 있었기에, 슬픈 옛 이야기도 가까이서 놔누지 못한 채 멀리 떨어져 서로의 모습만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수복정을 찾아 다시 아침 길을 재촉하여 찾아보니 호수 위에 남루한 정자만이 모습을 드리우고 있어, 멸망한 옛 도읍의 설움이 지금까지도 미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듯하였다. 공주와 논산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에서 논산 쪽으로 30분가량 걷다보니, 능산리 고분이라는 조그만 팻말이 나왔다. 이름 없는 고분들만이 정적을 지킨 채 말없이 놓여 져 있었으며, 문외한을 반겨주는 이는 이름 모를 산새들의 움을 뿐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나뭇짐을 짊어진 할아버지에게서 일본인들이 도굴하던 때의 이야기를 듣게 되니, 나라 없던 묘의 통곡을 듣는 듯했기에 나름대로 의미 있는 발걸음이 되었다.
읍내로 돌아와 부소산을 찾으니 바로 입구에 부여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옛 분들의 손길이 스쳐간 유물들을 나는 그 형상만 담을 뿐 그들의 숨소리를 제대로 품을 수 없다는 것이 아쉬웠지만, 암키와와 수키와를 구별하게 된 것에 만족해야만 했다. 갈림길로 시작되는 부소산 공원을 들어서니 기나긴 여독과 설친 밤잠 때문인지 산책로와 무성한 나무 사이의 누각들은 묵묵히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 구구절절이 사연이 적힌 많은 누각들을 지나치다가, 넓은 빈 터 위에 철책만이 둘러 싸여 있는 곳을 다다르니 곧 군창지임을 알 수 있었다. 애써 1300년 전의 아우성을 되새기며 가게 집 아주머니로부터 재로 변해버린 보리쌀을 얻고는, 백마강이 굽이굽이 감싸고도는 사비의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송월대에 올라, 향연에 빠져 있던 의자왕이 되어 나 또한 소주병에 나를 떠맡기게 되었다. 비애로 끝나야 했던 백제국을 그다지도 슬피 읊어야 했던지 달을 보내는 송월루에는 애를 끊는 사연들이 가득했고, 나 또한 시인의 마음이 되어 하얀 메모지 위에 추위로 굳어버린 손길 자국을 하염없이 남겼다.
제각기 왔다가 님의 부름에 모여졌다가, 님 때문에 삼천 개의 꽃잎으로 나뉘고는, 님에게 하나의 꽃으로 사라져간 삼천 궁녀의 전설을, 낙화암은 술의 힘을 빌려 천년이 지나 그 때로 돌아가려는 나에게 옛 이야기로 들려주어야 하는 자신의 운명도 모르는 채, 그저 묵묵히 그 옛날부터 낙화암 앞에 잠시 머물다가는 또 다시 흘러가야 하는 백마강을 천년 전에도 오늘도 그저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오른편에 아련히 보이는 산야에는 태고의 개벽 때부터 강물을 따라 명사십리로 펼쳐지는 백사장이 있고, 그 모래벌판에는 계백의 혼이 어려 있다. 왼편의 멀리 보이는 시가지에서는 어제도 오늘도 일상이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의 소리가 들려온다. 잡다하게 마음을 늘어놔도 채워지지 않는 하얀 노트를 움켜 쥔 채 무심히 계단을 내딛다 보니 낙화암은 병풍이 되어 조금만 암자를 감싸고 있었다. 벼랑에서 피어난 고란초 잎을 따다가, 부소산의 기를 한데 모두고 솟아오르는 샘물에 띄어 임금에게 조석으로 받치었다는 이야기를 간직한 채, 고란사에는 오늘도 님을 향한 삼천의 마음이 하나의 향내음 되어 가득 차 있었다. 나룻배를 타고 백마강을 따라 내려갈 때 당나라 장수가 용을 낚았다던 조룡대가 현실 톱니바퀴 속으로 빠져 들어 가련던 내 마음을 또다시 그 시절로 되돌렸다. (부소산에서 채웠던 찢어진 노트 몇 장을 어디선가 잃어버려, 당시의 상념들을 간략히 줄여야 했음이 아쉽기만 하다. 고란사에서 떠나는 배는 부소산 입구로 연결되는 나루터에 머물게 된다. … 이후 대천해수욕장에서 굶을 뻔 했던 아침 식사를 여대생들 사진 찍어 주고 얻어 먹었던 이야기와 마무리 후략.
1981. 12. 8.
2015년 7월 11일 오전 12:04 부여 여행에서 돌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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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해도 가족 여행 이틀 째.
이번에는 단촐하게 장모님과 누나와 함께
일곱 명만이 어제 아침에 인천공항을 떠났다.
“휴가는 국내에서!”라는 캠페인에 해외여행이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내년에는 사회에 발을 내딛을
아들, 4학년 취업준비생이 되는 큰 딸 그리고 곧
여고생이 될 막내 등 5명의 가족조차 한 동안 여행의 추억을 함께 만들지 못할 것 같아 이곳 홋카이도로 행선지를 결정했던 것이다.
가족여행은 안개처럼 행복도 스며들게 하지만,
장마철 비바람처럼 짜증을 돋우기도 한다.
나 홀로의 여행은 그 어떤 일행에 합류하여
홀로 훌쩍 가벼이 공항을 빠져나와 내 할 일만 지키며 나만의 추억과 사진을 담으면 그 뿐이지만, 가장이라는 자리에서 이런저런 신경을 곤두세우며 이끌어가야 하기에, 가족여행이 단지 즐겁지만 않은 이유이다.
하지만 고교 때 내 기억에 깊게 자리했던 ‘의자’라는 시 구절처럼, 부모와 자식으로 이어지는 인륜의 도리를 제래로 펼치며, 나의 아이들에게 행복한 세상과 미래가 만들어지도록 하는 것도 내가 살아가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이기에, 나의 편함과 기쁨은 뒤로하고, 아이들에게 그 자리를 내 주는 것이다.
나의 부모가 그러했듯이 세상의 모든 아버지와 엄마는 그들의 아이들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 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여기 홋카이도에 있는 것이다.
2015년 7월 26일 오후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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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휴 배불러!”
택배 온 CD 모음 묶음을 푼 순간
나는 포만감에 한 마디 내뱉었다.
하루가 저무는 저녁 무렵에
내 가슴을 후려친 뒤
세상으로 퍼져 나가는,
삼 십 여년 쯤 이어진
선율이 오늘도 흐르고 있다.
KBS FM의 ‘세상의 모든 음악!’
한없이 떠돌고 싶은 나의 영혼이
아마도 술 향기, 담배 연기,
그리고 선율의 나래를 타고
저승과 이승을 넘나들고 있나 보다.
지옥이 따로 없다!
세상 사람들 얼굴도 보기 싫고
세상사가 그저 아지랑이처럼 헛되고
나의 외침은 덧없이 들려오는 메아리일 뿐이다.
삶은 여행일 뿐이다.
결코 그 자리에 영원히 머물 수 없다.
그저 우습기만 하다.
삶이 아닌 생을 위해
아귀다툼 속에서 자신의 성벽만을
한없이 높이 쌓고 있는 세상이
또한 한없이 가소롭다.
그저 변화의 하나일 뿐일 것을.
바로 그것이!
그래도
얄팍한 그 경계선 위에서
아직은 이쪽에 발을 내딛고 있는 내게는
마무리 되어가는 이 시간에
마무리 들려주는 음악 속에
마무리를 준비해 가야하는 내 삶에
아직 USB에 옮기지 못한
‘세상의 모든 음악!’의 CD에서
흘러 나 올 속삭임은
연인의 키스처럼 달콤할 거다.
나는 드디어 떠난다.
그 달콤함을 꿈꾸며.
어디로?
남미 그 곳!
언제?
곧!
2015. 8. 23. 오후 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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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 장애인의 한계를 극복 못하고
창고에 골프 가방을 쳐 넣은 지
삼 년만에 다시 꺼냈다.
첫 타석 드라이브 샷이 공을 맞출 수 있을지
심히 걱정이다. 물론 타수를 헤아릴 수 없을
것은 자명한 일일 테고.
친구의 온갖 협박에도 굳굳이
골프와의 재회를 거부했지만
필드를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여동생의
머리를 올려주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다시 내딛은 것이다.
안되면 공 들고 걸으면 되겠지.
아무튼 하늘 파랗고 잔디 푸르고 좋기 좋다.
2015년 9월 15일 오후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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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건물 모서리를 돌아서는데
아기 새가 앉아 있다.
한 걸음 다가서도 그 자리에 머문 채
하늘만 응시한 채 동동거리고 있다.
차에 치이면 어쩌나?
고양이에게 물려 가면 어쩌나?
힘차게 나를 수 있을 때까지 곁에 둘까하고
깃털이 느껴지도록 살포시 손을 내밀었을 때
푸다닥 날갯짓하며 엄마를 찾아 나선다.
제발 무사히 엄마를 찾아 가렴!
2015. 10. 06. 오후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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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현관을 나선 지 30여 시간 만에 새벽에 리마 호텔에 도착 후 오전에 자유여행으로 중심가 광장에 발을 내딛었다. 웬 횡재~ 큰 종교 행사에 운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오후에는 피사코라는 곳으로 대중 버스를 이용하여 이동. 읍내 같은 시내에서 저녁 식사 중 요란한 행렬 소리에 거리로 우르르~ 같은 종교 햇아의 행진이 펼쳐졌다.
예상 못했던 남미 여행의 보너스를 얻었다. 다시 맞은 새벽. 새 소리가 요란하다. 섬 보트 투어와 사막 체험 그리고 낙조에 물들기 위해 2시간 뒤 출발.
2015년 10월 19일 오후 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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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 많은 새들의 보금자리. 물개들의 쉼터. 몇 마리의 펭
귄들의 모습~ 그런데 정말 펭귄인가? 여기서도 살 수 있
는 것인가? 아무튼 새똥 안 맞으려면 모자를 써야 한다기
에 폼 안나는 등산모를 눌러썼는데, 그만 새똥이 내 카메
라 렌즈를 명중시켰다. 사막으로 옮겨 쌩쌩카를 타고 언덕
사막을 위아래 좌우로 가로질러 샌드 보드를 타고~
고대하던 사막의 석양은 오아시스 아래에서 감상하란다.
홀로 6만월을 주고 차를 빌려 석양을 맞이하러 올라갔다.
어둠이 깊게 드리운 뒤 나스코 시내 호텔로 들어섰다. 새벽 1시에 별을 바라보며 워터 칵테일 소주를 홀로 들이 키고 있으니 가이드 역할의 팀장이 다가섰다. 맥주는 마신단다. 간신히 시내 구멍가게를 찾으니 청창으로 닫고 문을 열고 있는 구멍가게 아저씨에게 맥주 값을 건네니 철창틀 사이로 돈을 받고서는 철창 아래 쪽문으로 맥주를 건넨다. 그런데~ 마츄피츄의 관문인 쿠스코에서 폭동이 일어났단다. 공항에서 호텔로의 진입이 불가 한단다. 내일은 나스코 문양 경비행기 일정. 모래 아침에 리마에서 쿠스코 행 비행기~ 어찌 흘러 간건가?
2015년 10월 28일 오후 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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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 유적의 보고이자 마츄피츄의 관문인 쿠스코에서 삼일 전부터 큰 데모가 시작되었다. 때문에 어제 비행기에서 내려 호텔까지 1시간을 걸어왔고 오늘은 중심 광장에서 대규모 집회가 열렸고, 관광객들에게는 색다른 여행 경험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마츄피츄 행 기차 및 관광버스들에게 날아드는 돌덩이들 때문에 올스톱했고, 우리는 하루 관광일정을 빼먹고 밤 11시에 떠나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더 이상 시내 관광으로 시간을 때울 수 없어 호스피텔을 얻어 잠시 누워 있다. 그나마 8시간 밤 버스와 기차 편이 제대로 연결되어 마츄피츄에 발길이라도 내딛어야 하는데~ 살다보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진로를 선택해야 하는 경우가 숱하게 있다. 그 때 그 때의 최선을 택한 결정이 옳은 결정이 되기를 바랄 뿐.
2015년 10월 23일 오전 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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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시간을 밤새 비포장도로를 달려, 애초 탑승하려던 반대편 기차 정류장에 도착했다. 매표 착오로 22명 중 일부만 탑승하게 되었고, 발차 시간에 맞춰 기차문이 닫히려는 순간 우리는 죽을 힘을 다해 문을 비집고 불법 탑승을 했고, 마츄피츄 아랫마을에 발을 내딛었다.
굽이굽이 절벽에 난 길을 따라 달리는 중형 버스에 몸을 맡기고 드디어 마츄피츄 입구! 관람 끝무렵에 쏟아진 소나기에 몸을 적시고 서둘러 기차역으로 돌아왔다. 3시 50분에 출발해야 하는 우리 열차편은 앞선 기차들의 출발 지연에 맞물려 마츄피츄를 바라보기만 한 채 멈춰서 있다. 대합실은 전쟁터이다. 화장실 바로 앞에 죽치고 눌어 앉아 하염없이 기다렸다. 대합실을 가득 메운 서양 관광객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기차가 출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우리도 4시간 지연하여 플랫폼을 떠나는 열차에 몸을 싣게 되었다. 정말 가기도 돌아오기도 힘든 마츄피츄 여정이었다. 그나마 그곳의 모습을 내 눈을 통해 가슴에 담을 수 있었던 것에 만족해야 한다. 우리 기차 춢발의 지연도 시위대가 쌓아 놓은 돌더미 때문에 앞선 기차가 탈선했던 이류라고 하고, 오늘 현재 우리가 묵었던 쿠스코 공항이 폐쇄되어 있다 하니, 지금 무사히 티티카카 호수의 4200미터 고도의 도시 푸노의 홀텔에 숙박한 것만도 다행이다. 그리고 드디어 내일은 페루 일정을 끝내고 볼리비아 넘어간다. 무척 그리던 우유니 사막을 행해!
2015년 10월 25일 오후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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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좋은 나라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 담배를 물고 시내 중심가를 활보해도 아무도 인상 찡그리지 않는 착한 나라. 그녀는 닫힌 가게 문 앞에서 아베마리아를 부르며 무엇을 염원하고 있을까? 명동 골목 사거리에서 탱고를 추는 남녀는 동전 몇 푼을 바라서 정열을 발산하고 있는 것인가? 한산해지 거리에 주저않자 오늘의 수입을 헤아리는 그녀와 클래식 4중단의 모습! 대낮 길거리에서 디스코를 부끄럼 없이 흔들어대는 여인. 현란하게 화폭을 채우는 길거리 화가! 자유분망한 산티아고의 금요일 풍경이다. 그런데 해안 그리고 와인 국가 칠레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해산물 요리와 와인을 음미하고 팠던 나의 꿈은 룸레이트 70 어르신의 고집에 수산시장 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허스름한 식당에서 연어구이와 피스코 샤워 칵테일 한 잔에 묻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혼자 갈 수도 없고. 아르헨티나에서는 기필코 혼자서라도 탱고의 정열을 스테이크에 얹어 우아하게 칼질을 해 보리라~
2015년 10월 31일 오전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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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망설이고 서성이다가 발길을 내딛었다. 전통 고급 레스토랑. 동양인은 나 하나뿐. 스패인어는 전혀 모르고, 영어도 형편없이 서툴지만 꼭 이 속에 끼고픈 마음에 몸짓발짓하며 들이 밀었다. 입장하니 요염한 댄서와 사진 찰칵. 한 시간 동안 식사 후 탱고 쇼. 혼자라서 창피하지만 언제 또 보랴~ 암튼 눈치껏 실수는 말아야지. 그런데 비싼 만큼 아니 고급인 만큼 정말 매너 굿이다. 와이파이도 웨이터가 연결해 주었다. 현장 중계 중. 그런데~ 어찌 한 시간 동안 포크를 잡고 있어야 하나~
2015년 11월 8일 오전 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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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의 막은 내려졌다. 미처 현장중계를 할 겨를없이 탱고는 이어졌다. 디너와 쇼 합쳐 140달러를 ok하고 입장했더니 단체예약자 명단에 포함시켜 90달러로 깍아 준 것 같다. 예술의 전당 공연도 10만원 넘는데, 아르헨티나 스테이크까지 맛보게 했으니 그리 비싼 것은 아닐 듯. 게다가 눈으로 보는 것이 여행의 전부는 아니지 않는가? 오늘밤 비로써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지불한 비용을 되돌려 받은 듯. 단지 거의 2백명 가까운 서양 사람들 속에서 나 홀로 있었다는 것이 아쉽다. 일행이 있었다면 바로 옆 골목 선술집에서도 뒤풀이로 술집 안 그들과 흥을 함께 나누었을 텐데... 내일 이과수 폭포로 가서 2박하고 리오데자네이로에서 마지막 남미의 밤을 보낸 뒤 귀국길! 리오에서도 삼바의 정열을 더 할 수 있을까? 탱고와 삼바의 생동감 넘치고 열정이 솟구치는 모습은 후에 내 블러그에 다시 올려야 할 듯~
2015년 11월 8일 오후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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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리오데자네이로에서의 1박만 남은 것이 아쉬워서인가? 몇 시간 잠시 잠든 뒤 새벽 1시에 눈을 뜨고 호텔 로비에 내려와 있다. 엊그제 과수 공항에 내리는 순간 천둥 번개와 함께 장댓비가 우리를 맞이해 줬다. 우산과 우비를 뒤집어썼지만,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는 막아줬어도, 이과수 폭포의 입김에는 아무 소용없었다. 하지만 버스 타고 넘어 온 브라질 쪽에서의 이과수의 모습은 궂은 날씨가 오히려 동양화의 몽환적 느낌을 더해 주는 것 같앗다. 오늘 바라본 아르헨티나 쪽에서의 이과수 폭포는 장엄함 그 자체였다고 할까? 강과 폭포를 가운데 두고 국경이 나눠진 이과수의 모습을 브라질 쪽에서 담은 몇 장의 사진을 올린다.
2015년 11월 10일 오후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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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내려 온 강물은 장엄한 폭포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바다와 만나게 될 것이라는 안도와 기대의 꿈이 갑자기 존재를 알게 된 순가 피할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절벽에서 산산히 부서지게 되는 것이다. 인간들은 그 자신들도 어느 날 죽음이라는 절벽을 만나게 되어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 될 것이란 것을 먼 훗날의 이야기로만 치부하고, 강물처럼 현실 흐름에 모든 것을 맡기며 살고 있다. 오늘 밤은 잠이 올 것 같지 않다. 이십 여 일간 아껴 마시던 30도 소주를 드디어 오늘 끝내게 될 것 같다. 리오데자네이로에서 마지막 방울을 목구멍에 넘기려 했건만~ 이제 버스 타고 국경을 넘어갔던 아르헨티나 쪽 이과수 폭포의 모습을 올린다.
2015년 11월 10일 오후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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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여행의 마지막 밤! 마지막 소주를 목구멍 속에 털어 넣었다. 30도 소주를 물과 섞어 15도 칵테일하여 버티어 왔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유난히 많은 부부님의 구설수에 오르지 않으려 무척 자제했던 이유로 마지막 밤의 벗을 삼게 된 것이다. 짧은 여정이었으면 싱글 룸 비를 더 부담하더라도 혼자 방을 썼겠지만, 긴 여정에 2백만 원 넘는 추가 비용은 너무 큰 출혈이기에 담배 코골이 눈치 보며 할배 아저씨와 한 방을 써 왔다. 하지만 마지막 밤은 나만의 자유가 그리워 더블 침대를 지금 나 혼자 쓰고 있다. 이제는 감성도 메말라서 묵묵히 흘러가는 강물이 되어 있을 뿐이다. 지난 여정을 되돌아보지도 않고. 또다시 일상으로 맞이할 사흘 뒤의 맞이할 사흘 뒤의 나날에 대한 계획도 이과수 폭포의 악마의 목구멍 속에 던져 버린 채, 이십 여 일 만에 누리게 된 침실에서의 흡연을 만끽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가장 큰 고비가 나를 짓누르고 있다. 여기 올 때는 기대와 설렘으로 긴 비행시간을 버티었지만, 그 보다도 더 긴 금연의 시간들을 어찌 버티어야 할까? 특히ㅐ 휴스톤에서의 5시간의 ㅎ솬승 대기 시간은 28일 여정 중 가장 고통스런 시간이 될 것 같다. 거기에는 스모킹 룸도 없으니~
2015년 11월 11일 오후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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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정리는 끝이 없죠.l
지난 2월에 담아왔던 아이스랜드의 사진은
미처 정리 못했지만, 이번 남비 사진은
추억을 함께 만들었던 분들에게 보내려고
부지런히 정리했어요.
나의 블러그에 담아 놨으니 둘러 보세요.
blog.daum.net/ss99cc
2015년 12월 19일 오후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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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 짓도 못해 먹겠다.
지난 상반기에 포토샵 수업을 받았을 때
2시간 강의 녹음을 7시간에 걸쳐 반복해서 들으며
복습 자료를 빠짐없이 기록했던 것들이 아까워,
초가을부터 일부는 무료 일부는 수강료를 받고
포토샵 과외 선생을 하고 있다.
전문 선생은 2시간 강의하고 15만원 받는데,
나는 내 자료를 써 먹는다는 기분에
주변 소개로 5만원에 응하고 구의동까지 출장을 갔다.
차를 집에 주차하고 전철타고 가면 1시간 30분 거리!
2시간 기준인데 룸을 3시간 빌렸다며 1시간 연장!
초짜 선생이라며 엉뚱한 질문의 연속!
또 다른 분들이 내 농원으로 와서 수업 받겠다며
2회에 15만원을 주겠다는 것을 10만원으로 깎아 주었는데,
질문할 것이 있다며 1시간 일찍 찾아오고
질문할 것이 있다며 1시간 자리를 떠날 생각을 안 한다.
2시간 수업이 4시간으로 연장!
2시간 수업을 위해 나는 네다섯 시간 동안
자료를 훑어보고 실습하며 준비한다.
5만원 수입에 8시간 투자!
그 보다 아직도 많이 부족한 내 실력이기에
이제 선생 짓은 그만 두어야겠다.
그런데
다음 달에 한 분이 2시간에 10만원의 수강료를 내고
포토샵 공부를 하고 싶단다. 더 이상 선생이라는 틀에
얽매이고 싶지 않지만, 한편 내가 알고 있는 모든
포토샵 지식을 건네고 싶어진다.
어찌 할 건가?
그냥 5만원으로 할까?
아니 한다고 할까?
그냥 10만원 꿀꺽?
2015. 12. 21. 오후 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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