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행을 떠나 보낸 뒤 현지 가이드의 도움으로 로마의 국내선 탑승 수속을 마치고 게이트 앞까지는 무사히 도착했다. 국제선에서 국내선으로 연결되는 길을 유심히 살펴 두었다. 3일 뒤에는 거꾸로 찾아 가야 할 길이었기에! 비행기 표에 적혀진 게이트와 시각을 확인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어느 노랑머리 아줌마가 내게 무어라 말을 건네며 손짓을 한다. 무슨 이야기일까? 이 아줌마 비행기 처음 타 보는 것이라
내게 어찌 타야 하는지 묻고 있는 것인가? 그 아줌마는 무표정한 내 모습이 답답한 듯 애타 하신다. 아뿔싸! 게이트가 바뀐 것이다. 분명 방송으로 나왔을 텐데, 귀머거리인 내게는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휴~ 베네치아에는 가 보지도 못하고 로마 공항에서 삼일을 죽칠 뻔 했다.
서울에서 아내와 단 둘이서 여행을 더 하리라 마음 굳힌 뒤, 무척 고민스러웠다. 로마에서 베네치아 프로렌스 그리고 다시 로마로 돌아와 우리를 비행기까지 바래다 줄 가이드를 알아보기도 했다. 삼일 일정에 오십만 원을 주어야 한단다. 비행기 값 대신에 가이드 차를 타고 이태리 지방 곳곳의 정경을 가슴에 담는 것도 바람직스러울 것 같은데... 왠지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는다. 백발이 된 할아버지도 아닌데... 까짓것 안 되면 택시 타고 대사관까지 찾아 가면 되겠지 뭐...
그런데 출발부터 삐거덕거렸다. 몸이야 베니스에 가겠지만, 어찌 잠잘 곳을 찾을 거며, 어찌 프로렌스(피렌체)를 거쳐 로마까지 올 수 있을까? 비행기는 제대로 탈 수 있을 런지... 마누라는 나보다도 더 귀머거리 더 벙어리이니 오히려 부담만 주는 존재고... 아무튼 비행기는 베네치아 인근 도시에 내렸고, 오직 남은 것은 서울서 예약해 놓은 호텔을 찾아 가는 일만 남았다. 휴~ 손짓 발짓으로 호텔을 알려주고 택시를 타고 내리니 로마 광장인가에 내려 놓았다. 아니... 왜 호텔 앞까지 데려다 주지 않는 거야~ 관광의 도시라면서 어이해 밤거리는 이리도 어두운지... 다리를 두어 개 건너 캐리어를 끌고 호텔에 도착해 보니, 아니 이것도 호텔인가? 경포대 여관들 정도 밖에 되지 않는가? 고급 호텔을 예약해 달라 했더니, 서울 여행사 아가씨에게 사기 당했나 보다. 오랜만에 아내를 사랑해 주려 해도 싸늘하게 식어 버린 나의 육체 마냥 그 방은 써늘하기만 했고, 웬 도둑놈들이 그리도 많아서 인지 유리창 바로 밖에는 철판으로 만들어진 또 다른 창이 달려 있다.(이탈리아 사람들은 낮에 낮잠을 자기 위해 그런 철판 창문을 만들었다) 에고... 괜시리 고전적인 호텔을 예약했더니 이 모양이다. 현대식 호텔 보다도 객실요금은 비싸기만 했고(하룻밤에 이십만 원), 시설은 형편없으니 비로써 문화의 차이를 느끼게 된다.
그저 나오는 것은 한숨뿐이다. 무엇을 둘러보고 어찌 찾아 가야 하는 건지. 사전에 철저한 조사와 계획이 필요하다 했지만, 매일 까먹기만 하는 주식 시세를 쫓다 보니 달랑 여행 책자 하나만 준비하고 찾아 온 것이었다. 그래도 비싼 돈 들여왔으니 부닥쳐야지. 그 호텔 방에서 마누라와 사랑만 나눌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영어라도 숙달 되었다면 관광안내소에 찾아가 물어 보련만, 그저 몸으로 때울 수밖에 없다. 그래도 짐을 떨구고 나서니, 길이 앞에 있어 길이 보인다. 지도를 들여다보고 동서남북을 헤아리어 배를 타고 나니, 비로써 베네치아의 모습이 들어온다. 갯벌 위에 세워진 도시... 발길로 이어지는 길 보다는 뱃길로 이어지는 길이 더 많은 베네치아! 버스가 지나 다니듯 배가 지나간다. 동대문 남대문 내리세요!
베네치아 중심부에 있는 산타루치아 기차역 부근 호텔에 있던 우리는 베네치아를 굽이쳐 관통하는 큰 수로의 거의 끝에 있던 산마르코 광장에 내렸다. 말도 통하지 않고 글의 뜻도 모르지만, 갖고 간 관광책자의 글자와 같은 곳을 찾아 내렸다, 어디부터 눈도장을 찍어야 할지 망설이며 걷고 있을 때 낯선 아저씨들이 다가서서는 자가용 택시 같은 것을 타라 권유한다. 베네치아를 주된 섬이라 한다면 인근에는 4개의 작은 섬이 있다. 하루 낮 하룻밤의 일정으로 베네치아를 둘러보아야 했기에 유리공예로 유명한 무라노 섬을 찾기로 했었는데, 마침 그들은 요금을 받지 않고 무라노 섬까지 태워 준단다. 요금을 받지 않는다 했지만, 왠지 바가지를 쓰지 않을까 노심초사 하며 바닷길을 자가용 배 택시를 타고 달려가니, 유리공예 공장 전용 부두에 다가선다. 정말 멋진 상품들이 즐비했지만, 쇼핑을 결코 않으리라 굳세게 결심했기에 그냥 문을 나서려니 너무 미안하여 5만 원 정도의 물건을 사주고 말았다. "뭐... 택시비 낸 셈 치지... "
안내 책을 보니 그 섬에 유리 박물관이 있다 한다. 영어도 통하지 않는 곳이기에 책자에 적힌 박물관 이름을 행인들에게 보여 주며 물어물어 찾아 간다. 그래도 와 보았다는 기억만 남기었을 뿐, 남은 일정에 쫓기어 대충 둘러보고 발길을 재촉하게 된다. 그 섬에 올 때는 자가용 택시 배를 타고 신나게 달려 왔지만, 돌아 갈 때 터덜터덜 바포레토라는 배 버스에 몸을 실었다.
다시 돌아온 산마르코광장에는 산마르코사원 두칼레궁 그리고 감옥과 연결된 탄식의 다리가 있었기에, 입장료를 내고 또 하나의 흔적만을 남기기 위해 둘러보았다. 그 사원 2층에서 바라본 광장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광장을 가득 메운 것은 잔뜩 살찐 비둘기들과 이 나라 저 나라에서 모여든 관광객들이었다. 비둘기 먹이를 사들고, 아내와 나는 영화의 한 장면을 촬영했다. 아내에게 비둘기 먹이를 뿌리면 쏜살같이 달려 든 비둘기들에 놀라 그녀는 달아나고... 그 모습이 너무나도 재미있어서 난 또다시 그녀의 머리 위에 먹이를 뿌리고... 하지만 그 광장에서 아쉬웠던 것은 베네치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유명하다는 카페 플로리안을 찾지 못한 것이다. 말은 통하지 않고 그전 눈대중으로 찾으려 하니 허기진 배가 용서치 않았던 것이다. 그 카페에는 카날레토의 풍경화도 있고, 18세기의 플레이보이 카사노바도 이 가게 단골이었다 하며 바이런과 괴테 등에게서도 사랑 받았던 베네치아의 사교장이라 소개 되었던 그 카페를 찾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석양조차 저물어 가려 한다. 베네치아에 왔으니 그 유명한 곤도라를 타 보아야 하는 것 아닌가? 마침 광장 근처 뱃길 골목에 곤도라들이 모여 있다. 12월 초 겨울인지라 관광객들이 많치 않아 가격을 흥정하며 배를 잡아탔다.(당시 환율로 배 한척에 10만원쯤, 5인 탑승 기준인 듯) 아내와 나를 위하여 사랑의 테마를 들려 줄 악공을 태우지 못한 아쉬움을, 일본인 관광객 곤도라 위에서 들려오는 아코디언 선율과 뱃사람의 노래로 떨구어야만 했다. (악공 비용이 당시 환율로 10만원쯤이었던가?) 골목길 모서리에서 택시 경적 울리듯 뱃길 모서리에서 '워이~'하며 목소리 경적을 울려대는 사공의 모습은 서울 비좁은 거리를 쏜살 같이 달려가는 택시 기사의 솜씨 이상이었다. 관광 성수기였으면 곤도라 경주대회도 보고, 공짜 음악도 실컷 들어 보련만, 겨울 문턱에 들어선 베네치아의 뱃길은 썰렁하기 조차 했다.
이미 해는 사라지고 어둠이 밀려 왔다. 찾아 갈 수 있을까? 관광책자에 나와 있는 해물전문점을 향해 발걸음 옮긴다. 비교적 길눈이 밝다고 생각했던 내게도 그 좁은 골목들은 한계로 닥쳐왔다. 주민들에게 물으면 친절히 안내한다고 적혀 있지만, 물어 볼 수조차 없어 그저 책을 보여 주고 안내를 부탁하니, 알지 못한다며 손을 가로 젓는다. 그냥 아무 식당에 가서 골은 배나 채울 걸... 어렵사리 찾아가 보니 너무나도 허술한 식당이었다. 좁고 좁은 골목 한편에 붙어 있는 보잘 것 없는 식당이었다. 에이... 속았다~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파서 아무 자리에 앉아 음식을 시키려니, 험상궂게 생긴 아저씨가 다가와서는 나가란다. 무어라 떠드는데 이탈리어인지 영어인지 알 수도 없고... 간간히 들려오는 한 두 마디 단어로 눈치껏 판단해 보니 예약이 되지 않아 음식 주문을 받을 수 없단다. 에이 나쁜 사람들... 얼굴 마주하고서도 대화조차 나누지 못하는데 어찌 전화로 예약을 한단 말인가? 별 수 없지... 그 시간이 6시쯤이었는데, 1시간 뒤에나 다시 오란다. 식당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를 갔다가는 다시 찾아 올 엄두가 나지 않았기에, 근처 골목길을 헤매고 있으니 눈에 띄는 포스터가 있었다.
이탈리아 여행을 계획하면서 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그래도 이탈리아의 유명한 오페라 아니면 유럽풍 극장에 앉아서 연주회라도 가 보고 싶었다. 호텔 로비 그리고 베네치아 거리에 붙어 있는 포스터들을 보았지만, 전부 금요일 토요일 저녁 공연들뿐이었다. 금요일 밤에는 그리운 나의 집을 향해 달려 갈 시간인데... 하지만 식당에서 문전박대 당했던 것이 내게는 행운으로 다가섰다. 목요일 그 날 밤 연주회가 있었다. 자세히 살펴봐도 공연시간과 비발디란 단어만이 눈에 띈다. 에라~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지... 다시 또 올 수 있으랴... 그런데 어찌 찾아가야 하는가? 정통 해물요리를 맛보여 주겠다고 아내에게 큰 소리 치고 예약까지 해 놓은 식당은 어찌하고.. 아무튼 예약시간까지는 시간이 남았으니 부딪쳐 보자는 심보로 포스터에 쓰여 있는 장소인지 거리인지 무언지 알 수는 없지만 무조건 종이 위에 그려 놓고, 길 가는 행인 붙잡고 쪽지만 건넨 뒤 얼굴만 바라본다. (그래도 포스터 찢어 보이질 않았으니, 한국 양반 체면 살린 것이렸다!) 무어라 손짓하며 떠드는데, 그저 그 사람 손끝만 바라보고 발길 내딛는다. 우리나라 달동네 골목 저리 가라였다. 용기 내어 다른 이에게 물어 보니, 아니 메모를 보여 주니 그 사람들도 관광객인 모양인 듯 손을 가로 젓는다. 그 순간 천사를 가장한 악마가 나타났다. 무어라 떠드는데 알 수 없어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으니 자기를 따라 오란다. 오~ 그대 이름은 천사인지라! 근데 아뿔싸... 그녀는 천사가 아닌 악마였다. 내 머리 위에 머리 하나 더 붙어 있을 만한 큰 키의 그 아가씨는 성큼 성큼 걸어간다. 나는 베네치아 뒷골목에서 엉덩이 씰룩거리며 빠른 걸음 걷기 바쁘다. 뒤따라오는 아내는 나를 놓치지 않으려고 달음박질을 한다. 그대의 이름은 천사를 가장한 악마~
그녀가 알려 준 곳은 교회였다. 아~ 속았구나! 하여간 힘든 걸음 내딛었으니 그냥 갈 수는 없었다. 되지도 않는 영어 단어 몇 개를 이어 가면서 1시간 30분 쯤 늦게 도착해도 입장할 수 있는지 물어 보았더니, 돈 내고 표만 사면 좋단다.(거기도 돈이면 다 되나 보다.) 아무튼 가슴 속에 여행의 사치로라도 남기고 싶은 추억이었기에, 가뜩이나 IMF로 어려운 나라 살림 축내어 표를 구하고서는, 굶주린 배를 움켜잡고 식당을 향해 돌아간다. 에고고... 못 찾겠다. 길목마다 머릿속에 담아 놓았지만, 헷갈리는 골목길은 우리를 오도 가도 못하게 하고 말았다. 그때 정말 백발의 천사가 나타났다. 책자에 실려 있는 식당을 보여 주니 단번에 할머니는 우리를 안내해 주신다.
주문을 받으러 온 중년의 아줌마! 정말 밉다 미워... 캔유 스피크 잉글리쉬 라는데... 그건 알아들었다. 근데 이어서 나오는 말들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바삐 오가는 아줌마를 붙잡고 영어회화 하자고 할 수도 없고... 적당히 알아서 달라는 말도 꺼내려 하니 도저히 생각나지 않는다. 에라 모르겠다. 그 식당의 맛있다는 요리를 실어 놓았던 책자를 펼치어 보여 주었다. 몇몇 단어를 훑어보고서 그녀는 주문표에 글씨 휘갈긴다. 아무리 영어를 못한다 할지라도 포도주 주문만은 빼 놓을 수 없어 덧붙였다. 해산물 요리에는 백포도주라 했던가? 뭔지 모르지만 아무튼 음식은 나왔는데... 후추를 쳐야 할 것 같아서 후 추 통을 집어 들었다. 어디서 보긴 보았는데... 어찌 쳐야 하는가? 두드려 보기도 하고 잡아 빼 보기도 하지만 도통 나오질 않는다. 왼쪽에는 독일인 연인인 듯한 커플이 냉정한 표정으로 둘만의 얘기에 열중하고 있다. 오른쪽엔 미국 켄터키 주에서 왔음직한 아저씨 아줌마 둘이 우리를 힐끔힐끔 쳐다본다. 에이... 촌놈 정말 먹기도 힘들다! 그때 그 아저씨 미안한 듯 표정을 지으며 살짝 감춘 채 돌려 보라며 손짓을 보낸다. 마음속으로 쌩큐 쌩큐 연발하며 드디어 아내와 나는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고 정통 이탈리아 해산물과 백포도주를 음미하게 되었다.
말이 음미지 서둘러 뱃속에 음식과 술을 밀어 넣은 우리는 또다시 잰 걸음 뜀박질 걸음으로 그 교회에 다다랐다. 작은 열린 음악회였다. 아마도 연주 동호회의 모임이었던 것 같았다. 관중은 모두 친지들로 보였고, 순수한 관객은 아내와 나 둘 뿐이었던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귀에 익은 비발디의 선율이 흘러나올 때는, 마음에 품고 있던 또 다른 여행의 맛을 음미할 수 있었다. 진정 그때 유럽 여행에서의 향기를 만끽할 수 있었던 것은 베네치아에서의 그 날 밤 그 저녁식사와 연주였던 것이다.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지만, 단체 여행 아닌 개별여행의 진미를 한껏 맛본 뒤인지라 베네치아 밤길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서울의 큰 찻길과 이면도로는 수로라 생각하고 차 한 대 간신히 다니는 길은 도보라 생각한다면 베네치아의 모습을 그릴 수 있으리라... 베네치아 끝과 끝이라 할 수 있는 산타루치아 역과 산마르코 광장은 한 시간 쯤의 걸음걸이일 뿐. 그러나 하루 일정 동안 베네치아에 익숙해진 우리는 지친 발걸음 보다는 쉽사리 배 버스 바포레토를 선택하여 호텔로 돌아 왔고, 또다시 걱정만 앞서는 내일의 일정을 위하여 짐을 꾸려 놓은 채 설 잠을 청해야만 했다.
큰 호텔의 뷔페 조식으로 생각했던 아침 식사는 빵 몇 조각이었다. 딱딱하게 생긴 지배인 아저씨는 형편없는 시설의 호텔 숙박비 내라며 내 주머니를 강탈해 간다. 싸울 때가 아니었다. 아침 기차를 타고 피렌체까지 가야만 한다. 그리고 거기서 로마행 비행기를 타기로 되어 있다. 전날 표 파는 곳을 둘러보기는 했지만, 막상 표를 사서 기차에 오르려 하니 막막하기만 하다. 어찌 표를 사야 하는가? 섣불리 영어를 썼다가 알아듣지 못할 영어로 되돌아오면 낭패다. 어찌 프로렌스 행 표 두 장을 달라 해야 하는가? 기왕이면 영화 속에서 보았던 그런 일등 칸막이 방으로... 어찌해야 할 것인가???
1997년 12월
(여기부터는 2005년 12월 추기한 것임)
"To Firenche(?), Two persons, First class, Right now"라고 쪽지를 건네니, 주말에 여행을 떠나는 젊은이들과 담배연기로 가득 찬 열차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혹시라도 피렌체를 지나칠까봐 아내와 나는 번갈아가며 두 눈을 부릅뜨고 잠을 쫓은 채 지나치는 기차역의 팻말을 응시해야만 했다. 드디어 카사노바의 고향이었던 피렌체 역에 내린 나는 아내 모르게 마음속으로 외쳤다. “카사노바여! 한국에서 내가 왔다. 우리 한번 겨뤄보자!”
목표는 두오모 성당이었다. 입을 딱 벌리게 할 만큼 아름다운 그 성당까지는 편한 발걸음이었고, 산책하듯 내딛는 걸음걸음에 이국의 정경은 밀물 듯 밀려왔다. 자유로운 여행의 멋을 한껏 만끽하는 아내의 표정은 마냥 행복해 있었지만, 한국행 비행기와 바로 연결되어 있는 로마행 비행기 탑승에 대한 걱정에 나의 마음은 조급하기만 했다.
아뿔싸! 어렵사리 항공권 발매 창구에 다가서 예매권을 내 놓으니, 안에 있던 아저씨의 표정이 심각해진다. 몇 번의 반복된 설명에 탑승자가 아닌 대기자 명단에 올라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비행기를 놓치면 한국행 비행기도 놓친다. 정말 택시타고 대사관에를 가야 하는가? 마음을 조아리며 대합실에서 서성거리는 데 낯익은 말이 들린다. 정장을 한 몇 사람의 한국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얼마만인가? 로마에서 일행을 먼저 보낸 후 3일 만에 만나게 되는 한국인들이었다. 그러나 반가움도 잠시 뿐! 내 얼굴은 이내 붉어지고 말았다. 그들은 출장 온 대기업 직원들이었다. 비록 각자 자신의 삶을 위하여 이국만리 나와 있지만, 그들은 고국의 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땀과 노력을 나눠주고 있지 않은가? 비록 IMF가 터지기 전에 예약된 여행이었다 할지라도, 나는 나만의 행복을 위하여 그곳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붉어지는 나의 얼굴을 애써 감추기 위하여 나는 자리를 피해야만 했다.
그날 밤 우리의 안식처가 된 한국행 비행기에서 우리는 깊은 잠에 빠져 버렸다. 비록 2박3일의 시간은 지난 과거가 되어 망각에 묻혀 버리겠지만, 두려움과 모험이 함께 했던 여행은 진정 아름다운 추억으로 아내와 나의 삶에 영원히 남게 되었다. 또한 그날 밤 로마 공항에서 있었던 또 다른 해프닝도 오랜 이야깃거리가 되어 되씹을 수 있으리라!
97년 11월
'구름 따라 길 따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티벳을 향해 (0) | 2007.03.23 |
---|---|
케냐 탄자니아 (0) | 2007.03.23 |
아들과의 중국 여행 (0) | 2007.03.18 |
백두산에서 (0) | 2007.03.18 |
샌디에고 (0) | 2007.03.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