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의 밤은 옅어져만 갑니다. 이제 서쪽 땅덩이 큰 나라를 떠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한번쯤 다가서고 싶었던 백두산 그 가슴에 안기어도 보았습니다. 넓은 마음 큰 마음 그리고 깊은 마음이 되라하며, 그 백두산 정상 아래 내리 깔린 광야를 가르키면서 나의 아들 가슴에 담기도록 되새겨 보기도 했습니다.
상해를 거쳐 연길 대우호텔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아주 아주 위험하니 결코 호텔 밖을 나서서는 안된다는 관광안내원 엄포로 함께 연길의 밤 속에 묻히기로 약속했던 친구 놈은 슬그머니 발뺌 하기에, 나 홀로 깜깜한 그 거리에 존재하고 싶어 발걸음 내딛었습니다. 많은 북한인들이 와 있다는 말에 홀로 나서기 두려워, 호텔 로비에서 근무하던 조선족 공안원을 꼬득여서( 공안원이 날 꼬득인 것인지도 모르지만요) 연남 야시장을 향해습니다. 혹 모르는 사고를 막기 위해 전자충격봉을 가져 오겠다는 그 경찰 친구를 기다리며 바라 보았습니다. 길가 삼층집 창가에 걸려 있는 하얀 천조각 세개. 아마도 새근새근 아기가 잠들고 있는 모양입니다. '만만디 만만디'라 하지만, 중국 땅 한 모퉁이에서 들려오는 귀솔의 울음도 '만만디 만만디'였습니다.
우리네 야시장과 길거리에 펼쳐진 술자리 그 모습입니다. 길가에는 장터가 벌여졌습니다. 자전거 충돌 사고 땜에 억세개 말타툼하는 여인네들의 옥신각신 소리를 뒷전으로 하고, 조선족 할마니들의 내뱉은 말 한마디에 발걸음 멈추었지요. 연길 감자떡하고 고추떡 한 움큼 사 안았습니다. 먹지 못하면 고스레라도 지내지요. 까짓 20원하는 감자떡 못 사드리리까. 조선족 아주마니가 파는 양고기 꼬치구이 맛있었습니다. 아니 멋 있었습니다. 좋았어요. 참... 그 야시장을 가는 길에 자전거 안장 앞에 사랑스런 여인을 태우고 가벼이 페달을 밟는 청년의 모습도 보았습니다. 벤쯔가 부러우리요, 다이너스티가 부러우리요. 돌아 오는 길 가 또 다른 자전거 행렬 있었지요. 여인이 몰아가는 자전거 뒷자리에 앉아 그녀의 허리에 두 손 얹고 있는 총각의 모습도 보았습니다. 좋겠다! 정말 좋겠다...
백두산 가는 6시간의 비포장도로는 긴 여정이었었습니다. 도회지에서 태어나 도회지에서 자라온 내게도 그 산하는 그리운 고향의 산하였습니다. 연길서 백두산 아래까지 가는 그 비포장도로변의 휴게소(?)는 두세군데 있었습니다. 몇시간을 달리다 멈춰선 휴게소. 도로가에 나무로 좌판 만들어 놓은 가게 몇평 남짓 있고, 바로 옆 개울로 흘러드는 물길 위에 나무로 남녀 화장실만 구분해 놓은 확실한 수세식(?)화장실이 있었습니다. 몇사람 간신히 들어가는 그곳은 칸막이도 문짝도 없는 완전히 개방형 화장실이었지요. 북경 근처 용경협이란 제법 큰 관광지의 화장실에도 남녀만 구분 되어 있을뿐 허리쯤 높이의 옆 칸막이만 있고 문짝 없는 화장실일진데, 그 촌구석이야... 의식의 차이일 뿐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 당연한 것일진데, 내 보내는 것 또한 당연한 삶의 일치레일 뿐이지요.
천지 아래 버스 종점에 다다르면 등산로 겸 장백폭포 가는 길과 천지까지 찦차 올라가는 길로 나뉘어집니다. 굽이굽이 가파른 시멘트길을 이리저리 몸 휩쓸리며 찦차에 실은 채 광활한 만주 벌판을 바라 볼 수 있습니다. 길가 백두산 정상은 이끼같이 땅바닥에 엎드린채 생명 이어가는 풀들만이 있었고, 그나마 정상 가까이는 그것 조차 볼 수 없는 나신의 땅덩이였습니다. '우리의 땅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 열심히 살아 갈 때 언젠간 되찾을 우리의 땅이다! 아들아! 저 넓고 큰 대지를 보아라. 아들아! 깊은 천지를 바라 보아라. 넓은 마음, 큰 마음 그리고 깊은 마음 - 너의 손을 잡고 들려 주고 싶었던 이야기이란다!'
재수를 마치고 백마강 낙화암에 올라 저 멀리 백사장을 바라보며 태고의 숨결과 숱한 병사들의 함성을 가슴 속에서 느꼈던 그 마음이 되고 싶었습니다. 굳이 무거운 노트북과 쏘주를 배당 속에 담고 올랐던 건 아련한 감정에 젖고 싶었습니다. 차라리 맑은 하늘과 천지의 모습을 바라 볼 수 없을지라도 렌즈에 그 모습 담기 보다는 나의 가슴과 영혼에 자욱 남기고 싶었습니다. 아니 그 품 속에 진정 용해 되어 버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정상에 버려진 쓰레기들 마냥 이미 깊이 때묻어 버린 내게는 찦차에서 내려 불과 오분 발걸음 옮김과 삼십분 가량의 사진 촬영을 위한 짧은 행락이었을 뿐입니다.
다시 갈림길로 돌아와 장백폭포를 향했습니다. 20여분 내딛는 가벼운 산보길 끝에 다달았습니다. 잠시도 발 담을 수 없을 만큼 차가웠습니다. 손이 뻗뻗해져 올 만큼 마시기 힘든 물이었지만, 두손에 모담아 한 마음 빌며 한 모금, 또 한 마음 빌며 한 모금 마시었습니다. 설사 되어 나오라 치지요. 오염되어 버린 나의 오장육보 씻어 낼테니까요. 뻗뻗해진 손 마냥 굳어 버리라지요. 때때로 터져 버릴듯 솟구치는 욕망을 갇우어 버릴 수 있을테니까요. 그 산보길가에 수증기 피어 올리며 달걀 삶아 토해내는 노상 온천도 있습니다. 길가 바로 옆에 작은 벽돌집 지어 온천 목욕탕 지어 놓고 조선족 종업원 부리며 동방에서 온 우리네 주머니 덜어내는 떼놈들 모습이 밉기만 합니다.
좀 떨어진 곳에 있는 허스름한 일층 모텔은 백두산 깊은 숨결을 전해 주기에 좋았습니다. 창틈으로 스며오는 깊은 밤기운은 몇날 몇일이고 아주 작은 점 되어 그 숲과 하나가 되어 있고 싶었습니다. 순박하게만 전해져 오는 조선족 아가씨들의 모습은 명동 거리 짙게 화장 드리운 모습들 보다 깊은 아름다움을 느끼게 했습니다.
연길로 돌아가는 비포장도로 그 휴게소는 전쟁터였습니다. 버스 두개 지나가는 길가에 열대 가까운 대형버스들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그 수세식 개방형 화장실 앞에는 줄줄이 몇 사람씩 묶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몇몇 사람들 입에서 욕이 튀어 나왔습니다. 100위안(만원) 지폐 한장 내고 생수 하나(천원) 들었더니 또다시 돈 내라 합니다. 목 축이려 나 또한 10위안(천원) 내고 물 하나 달랬더니, 하나 주는 척 하고는 돈 받으니 딴 청 피우고 있습니다. 별 수 없지요. 물 한병 낚아 채고는, 날강도 소리 내밷고 버스에 올라 타 버렸습니다.
연길에서 백두산 가는 길에서 해란강을 바라 볼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자그마한 하천이 되어 버려서인지, 모름직이 한번쯤 깊은 눈길 드리우고 싶은 그 강물은 그냥 눈가로 스쳐 흘러 갈 뿐입니다. 멀리 나즈막한 산 봉우리 위에 일송정도 그냥 달려가는 버스 창가에 채 머물지도 못한채 지나쳐 버립니다. 일송정 푸른 솔은 이제 사라져 버렸고, 노래 가락 속에 아쉬움 느끼는 우리네들이 꾸며 놓은 아기 소나무와 정자만이 머너먼 옛 주인의 심정만 아쉽게 합니다.
연길을 지나쳐 도문이란 국경도시에 도착했습니다. 두만강 잇는 다리 끝에 전망대 설치 되어 있고, 조선족 여인들 북한돈 북한 물건 내 놓고 삶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북한 막걸리는 아니었지만, 을지로 인쇄소 골목 오천냥 판자집 그 막걸리 생각나 한 모금 축이니, 설탕 탄 미싯가루물인지 설탕물 탄 막걸리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참, 도문을 가기 전에 용정이란 곳도 들렸습니다. 대성중학교가 이었습니다. '죽은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윤동주 시인의 모습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기념관이라며 성금도 받고 있었고, 일층에는 학교를 위한 기금으로 쓰인다면서 기념품 매장도 설치해 놓았습니다. 떼놈들 주머니 불리는 일이 아니라면 내야지요, 사야지요!
연길 자그마한 공항에 서 있던 비행기는 승객들이 다 들어서자 출발시간 보다 30분 앞서 하늘로 향해 버렸습니다. 비원칙적인 출발 때문에 연길로 되돌아 올 뻔 했던 북경의 극히 좋지 않은 밤하늘을 간신히 피해 북경 다른 공항에 내렸습니다. 언젠가 좀더 여유있는 일정으로 만주 땅과 백두산의 그 숲 속에 묻힐 것을 가슴에 새기고 또다시 도회지의 틀 속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듣고 보던데로 자전거 행렬, 자전거 다닐 수 있게 만들어 놓은 북경의 육교. 북경 근처 만리장성과 용경협 그리고 39도까지 열 올라가는 통이 때문에 놓쳐 버린 북경의 밤거리. 중국 고전건물의 특징을 담아 새롭게 하늘을 향한 건물들은 부러운 모습이었습니다. 사회주의 통제의 위력 때문이기도 했지만, 각진 건물들로만 덮혀진 육백년 한양의 우리네 모습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천안문 광장, 자금성, 슬럼화 되어 버린 도심 속의 옛건물들...
두번째 찾은 상해의 공항, 1920년과 2000년의 도시가 혼재된 상해. 고가도로 위로 이어지는 자동차 행렬. 빈민촌에 자리하고 있는 임시정부 건물, 또다시 39도까지 열 올라간 통이 때문에 건물만 바라보고 말았고... 도심 속에 자리하고 있는 홍구공원 - 윤봉길 의사의 그 거사 장소를 숲 넘어 그려만 보았고, 극장 처럼 꾸며진 건물 안에서 펼쳤던 10살 남짓 소녀들의 써커스는 감탄 보다는 슬픔을 자아내게 했고... 피로가 몰려 왔습니다.
1시간 반 남짓 달려간 소주란 도시는 정원의 도시라 합니다. 비단이 장사 왕서방의 고향답게 실크로드의 출발점이랍니다. 북경까지 인공으로 만들어 놓은 운하의 도시. 오나라의 수도. 오월동주 와신상담의 발원지. 오나라 첫째 왕의 능이 있는 호구산- 그 산의 마부로 잡혀 있던 월나라 왕이 귀국 후 와신상담하게 되었다는 곳. 갑작스레 쏟아지는 비 때문에 우비를 꺼내는 틈에, 손에 들었던 만화책에 열중해 엉뚱한 행렬을 쫓아 갔다가 잠시 미아가 되어 버렸던 통이.
소주에 살던 부자들이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주택의 정원 중 졸정원이란 곳 들렸지요. 아기자기하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습니다. 숱한 평민들의 땀과 피가 서려 있겠지만, 남원의 광한루에서의 느낌은 갖을 수 없었습니다.
'한산사의 종소리' 어렴풋 기억 납니다. 소주 한 모퉁이에 자그마하게 자리하고 있는 한산사는 굳이 찾아 갈 곳은 되지 못했지요. 물론 여느 다른 눈에만 비추어지는 관광지와 마찬가지였겠지만... 하지만 입구에 있던 촛불과 향으로 기원하는 곳에서 초 하나 건네 주면서 너의 소원을 빌라했더니, '받아쓰기 백점 맞게 해 주세요!'라며 초에 불을 붙이던 통이... '빵점 맞은 받아쓰기가 걱정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것이 너의 마음을 어둡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 가슴 아픈 일이란다. 서둘지 말고 천천히 가자꾸나. 언제나 기쁜 마음 밝은 마음 안고서 그리고 꾸준히 걸어 갈 수 있다면, 가장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거란다. 아빠가 너에게 바라는 것이야!'
마지막날 저녁에 들린 상해 외탄이란 강변(항구?)은 중국의 힘을 보여 주었습니다. 끈질기게 돈 달라며 붙어 다니는 아기 안은 거지 아줌마들도 있었지만, 발전된 문물을 받아 들이고 언젠간 중국의 힘을 실어 내 보낼 곳이었습니다. 일행에서 통이와 친구 그리고 그의 아들 넷이서 떨어져 나왔습니다. 연길 쪽 여행에서는 부딪기는 이들이 조선족이었기에 언어 소통에 문제 없었지요. 같은 한자권이었지만, 정말 힘들었습니다. 손짓발짓만이 통했습니다. 열여덟 고등학생의 유창한 영어회화 실력과 엄마 아빠에 대한 예의바름 그리고 친절하고 깨끗했던 그녀의 모습이 그간의 거칠고 지져분하게만 보여졌던 중국 인민들의 모습을 지우게 하였습니다.
상해의 마지막 밤은 통이에게도 밀려 왔습니다.
'천지에서 들려 주었던 이야기가 무엇이었지?'
'음... 넓은 마음 큰 마음 그리고... 뭐더라?'
'깊은 마음! 아들아! 낼 집에 가는 날이야. 잘자! 예쁜 꿈 꾸고...'
'아빠도 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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