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즘

제주 올레 첫번째 이야기

묵향의 이야기 2009. 5. 23. 16:54

하염없이 이리저리 흘러가는 바람결처럼 걷고 싶었다. 남도 길을... 호젓한 어느 섬 해변가를... 그저 마음속에서만 그렇게 걷기를 몇 년! 우연히 알게 된 ‘제주 올레’! 다리의 깁스 때문에 결국 한 달이 늦어져, 이제야 나는 제주 올레 제 1코스 출발점 시흥초교 정문 앞에 서 있다. 6시 10분! 이른 시간이지만, 생의 현장으로 나서는 이들이 내 마음을 찌르고 만다. “열심히 산 당신! 떠나라” 했거늘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떠날 자격이 없거늘...

 

자그마한 뒷동산 같은 오름이 시작되었다. 가벼운 산책길 걸음을 옮기니 목장 문이 닫혀 있고 왼쪽으로 오솔길이 있다. 결국 되돌아와 보니, “소 방목 중이니 문단속 부탁합니다. - 올레길옵디가 반갑수다 혼적옵서 놀당갑세 잘갑서예”라는 문구가 이제야 보인다. 올레(길)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멀리 성산일출봉이 보이고 검은 흙으로 덮여진 너른 들판이 아래 풍경을 만들어낸다. 쇠똥을 피해 나아가니 또다시 문단속 부탁의 글귀가 써진 사립문(?)을 열고 나가 얼마간 걸으니, 파란색 화살표가 또 다른 문을 향해 있다. 또다시 오름은 시작되고 산등성이 넘어 내리막길에 들어서니 올레(길)에 말들이 무리를 지어 풀을 뜯고 있다. “어쩌나~ 뒷발에 차여 초전박살 나는 것은 아닐까?” 말눈치 살피며 말똥 피해가며 나는 앞으로 갈 수밖에 없다. “이그~ 이른 아침부터 똥 천지네!”

 

아스팔트길을 따라 종달 소금밭을 지나니 종달 시흥 간 해안도로가 펼쳐진다. 지팡이를 짚고 거친 해변을 걸으며 밤새 파도를 타고 온 해산물을 골라내고 있는 할머니... 아무리 갈 길이 바쁘다 할지라도 나는 햇살에 반짝이는 아침바다의 해맑은 미소를 렌즈에 담고 말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 대략 6시간 씩 예정되어 있는 코스 2개를 걷기로 마음을 먹고 출발했다. 내 발걸음의 보폭은 뱁새 황새 다리 쫓아가는 격으로 넓게 내딛고 있다. 어느덧 성산 일출봉 마을에 들어서면서, 오랫동안 아주 가끔 말썽을 느끼게 했던 엉치 뼈와 다리 사이의 관절에 통증이 오기 시작한다. 뱁새가 황새 쫓아가다가 다리가 찢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일출봉을 왼쪽으로 두고 펼쳐져 있는 1코스 마지막 관문인 광치기 해안을 지팡이에 의지한 채 마무리를 져야 했다. “아직도 해가 중천에 떠 있다. 어찌 할 것인가?”

 

광치기 해안 입구부터 시작되는 제 2코스의 파란색 화살표를 쫓아간다. 바로 눈앞에 펼쳐진 순결한 백색의 천사들 - 두루미인가 백로인가의 무리가 나를 맞이한다. “그래! 난 이미 끝을 맞이했다. 이런 상태로 2코스를 완주할 수 없다. 코스 중의 공동묘지쯤에서 나는 별님의 미소를 마지막 추억으로 간직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직은 현주의 아빠로 남아주어야 할텐데...” 앞에도 뒤에도 느껴지지 않는 인기척! 나는 두루미를 벗 삼아 시간을 지워가며, 야심차게 이루고자 품었던 12시간 두 개의 올레 코스를 2/7코스만을 맛본 채 8시간 만에 마무리를 짓고 만다.

 

또다시 그 자리 그 화살표를 찾아 가려하니 쩔뚝이는 다리를 끌고서 찾아갈 자신이 없다. 교차로! “그곳이라면 잠시 두리번거리다 보면 찾을 수 있으리라!” 또다시 아침 6시에 찾아온 그곳! 파란색 화살표는 올레꾼을 반가이 맞이해준다. 두 손으로 한쪽 다리를 잡고 간신히 택시에서 내려 또다시 나의 일정은 시작되었다. 2킬로쯤 걸었을까? 더 이상 지팡이에 의지할 수도 없다. 가슴 깊이 처절하게 흘러내리는 눈물! 한두 번 흘렸던 눈물이던가? 좌절의 눈물... 내 생애 중딩 시절 두 번째 짝사랑이었던 사촌 동갑내기의 펜션을 가자며 택시기사에게 쓴 미소를 짓는다.

09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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