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가는 강물 위에 줄긋기였지요. 그날이 다가오길 기다렸습니다. 어느덧 다가서니 지나가 버렸습니다. 내게는 기다려지던 날이었습니다.
열일곱살 가을이던가, '국화 옆에서'를 처음 들려 주셨던 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인생의 뒤안길을 뒤돌아 볼 수 있는 40 중년 여인의 모습이라고... 꿈 안고 있는 봄날에는 먼 훗날이 그리워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고, 뜨거운 햇살과 함께 비바람 치던 그 여름날에는 안식처를 찾아 그렇게 헤매여야 했고... 비로서 가을 하늘 아래 국화되어 지나온 길을 돌이켜 보게 되는 완성된 모습이라 하셨습니다.
불혹이란 단어를 배웠습니다. 더 이상 흔들림 없이 삶을 관조할 수 있는 연륜의 다다름이라 하셨습니다. 명심대 앞에 바로 서서 자신의 모습 바라 볼 수 있다 하셨습니다.
기다려졌습니다. 아득히 머나먼, 차마 내게는 찾아 오지 않을 그날을 그리워했습니다. 발걸음 내딛었습니다. 지나와 보니 숱한 길들을 돌고 돌아 이제 삶의 절반의 그 선을 넘었습니다. 영혼 속에 가득 메우고 있는 안개 걷우고, 혜안으로 세상을 바라 볼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열살 아래 지우고 일흔살 위 떨구고, 육십 세월의 절반을 넘어섰습니다. 넘게 되는 그날 깊은 상념에 잠기고 싶었지만, 여느 나날 처럼 그 날을 지나쳐 버리고 또다시 오십여 나날을 지워 버렸습니다. 엊그제 벗들과 두달여만에 쏘주잔 기우렸습니다. 불혹의 마음으로 지나온 길을 관조하고 그 바위 앞에 설지라도 부끄럼없이 나머지 절반의 삶을 이끌어 갈 수 있냐 물었습니다. 그 질문 조차, 단칸방으로 피해가야 하는 벗의 이야기와 지난 날로부터 이어져 온 또다른 훗날의 혼돈에 대한 탄식 속에 묻혀 버렸습니다. 사치스런 질문이요, 득없는 낭비일 뿐이었습니다.
채 밝음이 찾아 오기 전에 차없는 강변도로 질주하는 기쁨으로 내딛던 출근 길을 오늘은 지난 밤 취기 때문에 아침햇살 안고서 동호대교 위를 달려 왔습니다. 그 철교 위 기둥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오는 '요정'의 모습이 그려졌습니다. 옥수동 언덕 위 교회 종마루에도 앉아 있었습니다. 지금 내 사무실에는 '백학'이 울리고 있습니다. 오늘만이라도 또다시 깊이 감정의 늪 속에 빠지고 싶어서, 부끄럼 감추고 용기내어 해질 무렵 씨디 하나 구해왔습니다. 차라리 삶에의 슬픔으로 눈물 넘치도록 고독해지고 싶습니다.
천년의 즙이라 했던 눈물이 아닌 전생의 수 겁년 전부터 쌓여진 고독에 나를 묻어 버리고 싶습니다. 망각해 버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러했듯이 얕기만 한 감정의 유희에 빠져 있을 뿐입니다.
방황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혼돈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지나온 길들은 한점 되어 버렸고, 새 날들은 그 한 점에 쌓여만 갑니다. 또다시 어느날인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비로서 모든 것을 망각할 수 있는 날을...
이십삼년을 기다리던 날이었기에, 아직도 버리지 못한 욕망과 현실의 굴레에 빠져 있지만, 더 이상 메말라 비틀어지기 전에 감정의 즙을 짜내어 삶의 절반을 넘어서는 마음의 흔적 남기고 싶었습니다.
가는 길 위 절반을 넘어 서면서...
98년 2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