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

장마 첫날 아침에

묵향의 이야기 2007. 3. 23. 08:22
 

여기는 우촌의 집이었습니다. 우촌은 선친의 호였죠.

비 우, 촌락 촌!

그래서인지 비 오는 날이면

숲에 둘러싸인 이곳의 운치가 더해집니다.

해마다 겪는 우기이기에 새삼스럽지는 않습니다.

이제는 정말 중년의 아저씨인데

뭐 그리 감정이 남아 있다고 고독에 몸부림치겠습니까마는,

그래도 이런 날에는 아침부터 소주에 나의 영혼을 팔아 버리고

그저 자유를 만끽하고 싶은 날입니다. 

장마철 첫날에 이렇게 많은 비가 쏟아진 날도 흔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기왕에 시작된 것 화끈한 것도 좋죠!

그런데 창밖 어디선가 새 소리가 들리네요.

밤새 빗물에 몸 둘 바를 몰랐을 텐데,

외박하고 돌아오지 않은 짝을 애타게 기다리는 것인지

그 울음이 이리도 슬프게 들리네요.

지금 마음 같으면 이 아침부터 쏘주를 들이키고 싶지만,

이번 주는 더 이상 미루지 못하고 해야 할 일들이 많네요.

당장 오늘...

일 년 동안 폼 잡고 앞에 앉아 있는 그런 허풍의 옷을 입는

첫날이기에 남들 앞에 서 할 얘기도 정리해야 하고,

이달 말까지 관공서에 제출해야 하는 서류도 마무리 져야 하고,

소송 건을 의뢰했지만 감감 무소식인 변호사에게도 연락해야 하고,

배 째라며 분양 중인 빌라에 눌러 앉은 그 아줌씨에게도

새로운 협박 및 공갈과 함께 실질적인 조치도 취해야 하고...

할 일은 많은데 마냥 뒷전으로만 미루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일 년 동안 기다렸던 장마철 어둠의 날들....

차라리 하늘에서 쏟아 붓는 빗물은

골방에 쳐 박혀 쏘주에 나의 영혼을 푹 담고

자학의 기쁨을 탐닉하도록

나를 가두어 둘 것입니다.

그 행복 예감 때문에

나는 지금 이 아침에

묵향의 낙서장을 오랜만에 펼쳐 보았습니다.



  2005. 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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